Title Toyotomi Hideyoshi and Yakusugi

  • Kagoshima
Topic(s):
Nature/Ecology $SETTINGS_DB.genreMap.get($item)
Medium/Media of Use:
Pamphlet
Text Length:
501-750
FY Prepared:
2020
Associated Tourism Board:
The Yakushima Environmental and Cultural Foundation
Associated Address:
Yakushima-cho Kumage-gun , Kagoshima

豊臣秀吉と屋久杉

屋久島の象徴的な杉である屋久杉が全国的な名声を得たのは、16世紀後半に豊臣秀吉(1536-1598)がこの島に良い杉があることを知り、京都の寺院の本堂建設に屋久杉の使用を命じたことが始まりとされています。


秀吉が屋久杉に目をつける

長きにわたる内戦の末、十六世紀後半に秀吉はその支配の下に日本を統一しました。1586年四月、彼は京都の方広寺に大仏殿を建てるための杉と檜の捜索を命じました。当時九州の大半を支配していた島津家は秀吉のライバルであったため、当初は命令に従いませんでした。しかし、1587年には秀吉が島津氏を破り、当主の島津義久(1533–1611)は屋久杉の貢ぎ物を送るようにと命じられました。

秀吉は側近であった大名石田三成(1560–1600)に、家老の伊集院忠棟(没1599年)と島津忠長(1551–1610)に屋久島に行って木材の調査をさせるよう求めました。二人が島民の案内のもと、数本の木を調査したところ、屋久杉は建設材料に適した、美しい節を持つ高品質で耐久性のある木材であることがわかりました。この調査は1595年に義久と兄弟の義弘(1535–1619)が出した布告の中で言及されており、そこには「大仏本堂のための木材調査で記録されてた木は、そのままにしておくこと」と記されています。

これだけの大きさの木を運ぶのは物流的にも金銭的にも難しい課題であったため、秀吉が命じた屋久杉が最終的に京都に到着できたのかどうかは不明です。1592年に秀吉のもとに軍を配備したことで、島津家には屋久島から木材を運ぶ船が不足し、またおそらく経済力も板や柱に使う加工木材を京都に送るだけしか残っていなかったでしょう。この話は未だ解明されていません。


ウィルソンの株

寺院のために伐採された屋久杉のうちの一本は、1914年にその切り株を発見し世界に紹介した、イギリスのプラントハンター兼植物学者、アーネスト・ヘンリー・ウィルソン(1876–1930)の名を付けられた、ウィルソン株であったと考えられています。1917年にウィルソンに出会った日本の植物学者、田代善太郎(1872–1947)は、1918年から1923年の間に屋久島に初めて調査のため訪れ、1926年の報告書の中で、この切り株の再生状態はこの木が十八世紀初頭に伐採されたことを示唆していたと記しました。

この切り株は、屋久島国立公園の特別保護区域内にある大株歩道沿い、標高1,030メートルのところにあります。原木は樹齢2,000年以上であったであろうと推定されています。切り株の直径は四メートルを超えています。中空の内部には小さな泉があり、山の神である彦火火出見命、木の神である久久能智神、そして山と海の神である大山祇命を祀る木魂神社があります。宮之浦のシーサイドホテルの敷地内にはウィルソン株のレプリカがあり、訪問客は実際の大きさの切り株を知ることができます。


豐臣秀吉與屋久杉


屋久杉是屋久島的象徵。16世紀晚期,一代梟雄豐臣秀吉(1536-1598)聽聞島上出產優質杉樹,便下令要用屋久杉在京都建造一間寺院的本堂(主殿)。此舉使屋久杉在日本全國名聲大噪。


豐臣秀吉的青眼

16世紀晚期,經過長期內戰,豐臣秀吉統一了日本。1586年4月,為供奉一尊大佛,他下令尋找杉木和柏木,在京都方廣寺新建一間大殿。當時九州大部分地區處於島津家族控制下,他們是豐臣秀吉的對手,因此起初並沒有聽令。1587年,豐臣秀吉打敗島津家族,命令家主島津義久(1533–1611)向他進貢屋久杉。

豐臣秀吉要求親信大名領主石田三成(1560–1600)派出家臣之首伊集院忠棟(?-1599)和島津忠長(1551–1610)一起赴屋久島進行木材調查。兩人在島民指引下察看過幾棵樹木後,發現屋久杉確實品質優良且耐用,還有美麗的疤瘤花紋,非常適合用作建築材料。島津義久和弟弟島津義弘(1535–1619)於1595年頒佈的佈告中提及了這次調查,如此寫道:「大佛本堂木材調查中記錄過的樹木,應保持原樣。」

豐臣秀吉需要的屋久杉最後到底有沒有抵達京都,如今不得而知,畢竟運送如此龐大的原木無論在物流還是在財力上都是挑戰。1592年,因豐臣秀吉對麾下的軍事部署導致島津家族沒有足夠的船隻從屋久島運送木材,且財力方面也只能支撐把原木加工成的板材和柱材運往京都的費用,因此這個故事的後文還有待考證。


威爾遜樹樁

這個被稱為「威爾遜樹樁」的屋久杉樹樁,被認為是為豐臣秀吉修寺而砍伐留下的其中一棵杉樹。它以英國植物獵人及植物學家歐尼斯特·亨利·威爾遜(Ernest Henry Wilson, 1876-1930)的名字命名,紀念他在1914年發現了這個樹樁並公諸於世。1917年,日本植物學家田代善太郎(1872-1947)和威爾遜會面後,於1918年至1923年在屋久島展開了他的首次學術考察。他在1926年的報告中表示,樹樁的再生狀態說明這棵樹的砍伐時間應在18世紀早期。

這個樹樁位於屋久島國立公園特別保護區裡的大株步道旁、海拔1030公尺處。砍伐前樹齡據推測已2000多歲。樹樁直徑超過4公尺,中間的空洞裡有小股湧泉,還有供奉著山神彥火火出見命、樹神久久能智神以及山與海之神大山祇命的木魂神社。宮之浦的海濱酒店內展示著威爾遜樹樁的複製品,遊客可以親身體驗這個樹樁的巨大。

丰臣秀吉与屋久杉


屋久杉是屋久岛的象征。16世纪晚期,一代枭雄丰臣秀吉(1536-1598)听闻岛上出产优质杉树,便下令要用屋久杉在京都建造一间寺院的本堂(主殿)。此举令屋久杉在日本全国名声大噪。


丰臣秀吉的青眼

16世纪晚期,经过长期内战,丰臣秀吉统一了日本。1586年4月,为供奉一尊大佛,他下令寻找杉木和柏木,在京都方广寺新建一间大殿。当时九州大部分地区处于岛津家族控制下,他们是丰臣秀吉的对手,因此起初并没有听令。1587年,丰臣秀吉打败了岛津家族,命令家主岛津义久(1533–1611)向他进贡屋久杉。

丰臣秀吉要求亲信大名领主石田三成(1560–1600)派出家臣之首伊集院忠栋(?-1599)和岛津忠长(1551–1610)一起赴屋久岛调查适用木材。两人在岛民指引下察看过几棵树木后,发现屋久杉确实品质优良且耐用,还有美丽的疤瘤花纹,非常适合用作建筑材料。岛津义久和弟弟岛津义弘(1535–1619)于1595年颁布的布告中提及了这次调查,如此写道,“为修建大佛本堂而调查记录过的树木,不得擅动。”

丰臣秀吉需要的屋久杉最后到底有没有抵达京都,如今不得而知,毕竟运输如此庞大的原木无论在物流还是在财力上都是挑战。1592年,因丰臣秀吉对麾下的军事部署,使得岛津家族没有足够的船只从屋久岛运送木材,且财力方面也只能支撑把原木加工成板材和柱材后再送往京都,因此这个故事的后文还有待考证。


威尔逊树桩

这个被称为“威尔逊树桩”的屋久杉树桩,被认为是为丰臣秀吉修寺而砍伐留下的见证。它以英国植物猎人及植物学家欧内斯特·亨利·威尔逊(Ernest Henry Wilson, 1876-1930)的名字命名,纪念他在1914年发现了这个树桩并公诸于世。1917年,日本植物学家田代善太郎(1872-1947)和威尔逊会面后,于1918年至1923年在屋久岛展开了他的首次学术考察。他在1926年的报告中表示,树桩的再生状态说明这棵树的砍伐时间应在18世纪早期。

这个树桩位于屋久岛国立公园特别保护区里的大株步道旁、海拔1030米处。砍伐前树龄据推测已2000多岁。树桩直径超过4米,中间的空洞里有小股涌泉,还有供奉着山神彦火火出见命、树神久久能智神以及山与海之神大山祇命的木魂神社。宫之浦的海滨酒店内展示着威尔逊树桩的复制品,来访者可以直观地感受到这个树桩是何等的巨大。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야쿠스기 삼나무


야쿠시마 섬의 상징적인 삼나무인 야쿠스기 삼나무가 일본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16세기 후반에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가 이 섬에 좋은 삼나무가 있음을 알고 교토 사찰의 본당 건설에 사용하기를 명한 게 시초라고 보고 있습니다.


히데요시가 야쿠스기 삼나무에 주목하다

오랜 내전 끝에 16세기 후반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지배하에 일본을 통일했습니다. 1586년 4월, 히데요시는 교토 호코지 절 대불전 건설에 쓸 삼나무와 노송나무를 물색하라고 명했습니다. 당시 규슈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마즈 집안은 히데요시의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587년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씨를 무찔렀고, 당주인 시마즈 요시히사(1533~1611)는 야쿠스기 삼나무를 공물로 보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히데요시는 측근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에게 요청하여 사쓰마가 본거지인 고위 가신 이주인 다다무네(1599년 사망)와 시마즈 다다나가(1551~1610)가 야쿠시마 섬에 가서 목재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두 사람은 섬 주민의 안내에 따라 여러 그루의 나무를 조사했는데, 야쿠스기 삼나무의 질이 좋고, 마디가 아름답고, 내구성이 있어서 건축 자재로서 적합한 목재임을 알았습니다.


이 조사는 1595년에 시마즈 요시히사와 남동생인 요시히로(1535~1619)가 발표한 포고에 언급되어 있는데, ‘대불전을 위한 목재 조사에서 기록된 나무는 그대로 둘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나무를 운반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명한 야쿠스기 삼나무가 최종적으로 교토에 도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에 시마즈 집안도 나갔기 때문에 야쿠시마 섬에서 목재를 운반할 배가 부족하고, 또한 경제력도 판자나 기둥으로 사용하는 가공 목재를 교토로 보낼 정도밖에 안 남았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윌슨카부 그루터기

대불전 공사를 위해 벌채된 야쿠스기 삼나무 가운데 한 그루는 1914년에 그 그루터기를 발견해 세계에 소개한, 영국의 진귀한 식물 채집가이자 식물학자인 어니스트 헨리 윌슨(1876~1930)의 이름을 따서 그 이름이 지어진 윌슨카부 그루터기였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1917년에 윌슨과 만난 일본의 식물학자 다시로 젠타로(1872~1947)는 1918년에서 1923년 사이에 첫 조사를 위해 야쿠시마 섬을 방문하여, 1926년의 보고서에 이 그루터기의 재생 상태는 이 나무가 18세기 초엽에 벌채되었음을 시사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그루터기는 야쿠시마 국립공원의 특별보호구역 내에 있는 오카부 보도를 따라 해발 1,030m 지점에 있습니다. 벌채되기 전의 나무는 수령 2,000년을 넘었을 거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루터기의 직경은 4m를 넘습니다. 나무 안쪽의 커다란 동굴에는 샘이 있고, 산신인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 나무의 신인 구쿠노치노카미, 산과 바다의 신인 오야마쓰미노미코토를 모시는 고다마 신사가 있습니다. 미야노우라의 시사이드 호텔 부지 내에는 윌슨카부 그루터기의 복제품이 있어서 방문객이 실제 그루터기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Toyotomi Hideyoshi and Yakusugi

Yakusugi, the iconic cedars of Yakushima, first attained national prominence in the late sixteenth century after the warlord Toyotomi Hideyoshi (1536–1598) learned that there was good cedar on the island and ordered the use of yakusugi for the construction of a temple hall in Kyoto.


Hideyoshi Sets His Eyes on Yakusugi

Hideyoshi unified Japan under his rule in the late sixteenth century after a long period of civil war. In April 1586, he ordered a search for cedar and cypress with which to build a hall for a great Buddha statue at Hokoji Temple in Kyoto. The Shimazu family, which then controlled most of Kyushu, were rivals of Hideyoshi and initially did not comply with the order. In 1587, however, Hideyoshi defeated the Shimazu, and the family head, Shimazu Yoshihisa (1533–1611), was instructed to send tribute of yakusugi.

Hideyoshi asked his aide, the daimyo Ishida Mitsunari (1560–1600), to have chief retainer Ijuin Tadamune (d. 1599) and Shimazu Tadanaga (1551–1610) go to Yakushima and conduct a survey of timber on the island. The two men inspected several trees under the guidance of islanders and found that yakusugi was a high-quality, durable timber with beautiful burls, suitable for construction material. This survey is mentioned in an edict issued in 1595 by Yoshihisa and his brother Yoshihiro (1535–1619), which states, “The trees recorded in the timber survey for the main hall of the great Buddha statue shall be left untouched.”

It is unclear if the yakusugi Hideyoshi ordered ever reached Kyoto, as transporting trees of such large size was a logistical and financial challenge. The deployment of military forces under Hideyoshi in 1592 left the Shimazu family with insufficient ships to transport the wood from Yakushima, and perhaps with only the economic resources to send processed timber for boards and pillars to Kyoto. The story has yet to be fully revealed.


Wilson’s Stump

One of the yakusugi cut down for the temple is thought to be Wilson’s Stump, named after British plant hunter and botanist Ernest Henry Wilson (1876–1930), who discovered the stump in 1914 and introduced it to the world. Tashiro Zentaro (1872–1947), a Japanese botanist who met Wilson in 1917, visited Yakushima for his first academic exploration there between 1918 and 1923, stating in his 1926 report that the stump’s state of regeneration suggested the tree was cut down in the early eighteenth century.

The stump is located at an altitude of 1,030 meters along the Okabu Trail in the special protection zone of Yakushima National Park. The original tree is estimated to have been over 2,000 years old. The stump is over four meters in diameter. Its hollow interior contains a small spring as well as Kodama Jinja Shrine, which enshrines Hikohohodemi no Mikoto, a deity of the mountain, Kukunochi no Kami, a deity of the tree, and Oyamatsumi no Mikoto, a deity of the mountain and sea. There is a replica of the Wilson’s stump on the premises of the Seaside Hotel in Miyanoura, where visitors can get a sense of the immense size of the actual st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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