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Jūmyō’in (Subtemple of Engyōji)

  • Hyogo
Topic(s):
Shrines/Temples/Churches Public Works & Institutions (Museums, etc.)
Medium/Media of Use:
Interpretive Sign
Text Length:
≤250 Words
FY Prepared:
2020
Associated Tourism Board:
shoshazan engyoji kankoshinkokyogikai
Associated Address:
2968, Shosha, Himeji-shi , Hyogo

十妙院

十妙院は、16歳の若さで亡くなった娘を祀るために、大名赤松満祐(1381 – 1441)から委託された寺院である。十妙院の本尊は、慈悲の千手観音像である。お像は比較的大きく、満祐の娘の等身大に作られたと考えられている。観音像は両脇に四天王の一人である鎧姿の毘沙門天と、来世に子供たちを守護する地蔵菩薩を従えている。塔頭寺院の中央の部屋の三枚の襖には有名な狩野派の創設者の孫である狩野永納吉信(1631–1697)の美しく保存された水墨画が描かれている。

この塔頭の客殿は1691年に建てられた。その構造は、客殿と台所として機能していた建物である「くり」を組み合わせたものだが、2つのエリアは厳密に分離されていた。外門の波打った庇と、書院造の部屋の絶妙なデザインは、それが位の高い賓客のために意図されていたことを示している。満祐の娘の死の物語は、中世日本の歴史の激動の時代を物語っている。15世紀の前半、この地域は独裁的な将軍足利義教(1397–1441)によって支配されていた。裏切りを恐れた義教は自分に近かった武士たちや当時複数の藩を支配していた赤松満祐をはじめとする側近の暗殺を企てた。満祐の娘は将軍の館に居候していたときに陰謀を知り、父親に警戒するように伝えた。しかし、義教は満祐の娘によるその行動を知り、彼女の殺害を命じた。満祐は娘の悲劇的な犠牲のおかげで、先制攻撃をすることができた。1441年の夏に京都で行われた能上演の場で暴君義教を暗殺した。


十妙院(圓教寺塔頭)


十妙院是大名(大領主)赤松滿祐(1381-1441)為紀念16歲早逝的女兒而建造的「塔頭」(附屬寺院)。院內供奉本尊大慈大悲千手觀音菩薩像,像身較一般尺寸稍大,可能是赤松滿祐女兒的等身像。寺院中央房間的三扇拉門繪有狩野派創始人之孫狩野永納(1631-1697)的水墨畫,保存狀態完好。

這座塔頭寺院的客殿建於1691年,包括客殿和「庫裡」(廚房)兩個完全獨立的空間。從寺門起伏的屋簷和設計精巧的「書院造」房間推測,此處客殿應是為貴賓而準備的設施。

赤松滿祐幼女之死反映了日本中世紀(12-16世紀)歷史上一段動盪的時代。15世紀上半葉,當地正處在獨裁將軍足利義教(1394-1441)的統治之下。因為擔心謀反,足利義教打算暗殺赤松滿祐等數名親信。赤松滿祐的女兒正好寄居在將軍府內,得知陰謀後去信示警父親。但此舉被足利義教知曉,遂將其殺害。幸虧女兒的拼死相救,赤松滿祐才得以先發制人,於1441年夏天在京都舉行的慶祝宴會上派人暗殺了暴君足利義教。

十妙院被指定為國家重要文化財產。

十妙院(圆教寺塔头)


十妙院是大名(大领主)赤松满祐(1381-1441)为纪念16岁早逝的女儿而建造的“塔头”(附属寺院)。十妙院供奉的本尊是大慈大悲千手观音菩萨像。雕像相对较大,可能是赤松满祐女儿的等身像。寺院中央房间的三扇拉门上,绘有狩野派画派开创者之孙狩野永纳(1631-1697)的水墨画,保存状态完好。

这座塔头寺院的客殿建于1691年,包括客殿和“库里”(厨房)两个完全独立的空间。从寺门起伏的屋檐和设计精巧的“书院造”房间来看,这里应该是接待贵宾专用设施。

赤松满祐幼女之死折射出日本中世纪(12-16世纪)历史上的一段动荡时代。15世纪上半叶,该地区在独裁将军足利义教(1394-1441)的统治之下。因为担心谋反,足利义教打算暗杀赤松满祐等数名亲信。赤松满祐的女儿正好寄居在将军府内,得知阴谋后去信示警父亲。但此举被足利义教知晓,遂将其杀害。幸亏女儿的拼死相救,赤松满祐才得以先发制人,于1441年夏天在京都举行的庆祝宴会上派人暗杀了暴君足利义教。

十妙院是国家指定重要文化财产。

주묘인


주묘인(十妙院)은 일본 중세의 다이묘(넓은 영지를 다스린 대영주) 아카마쓰 미쓰스케(1381~1441)가 16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딸을 기리기 위해 지은 탑두(사원 부지 내에 지어진 작은 사원)입니다. 주묘인의 본존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무한한 공덕과 자비를 베푼다는 천수관음상입니다. 이 상은 비교적 커서 미쓰스케의 딸의 등신대로 만들어졌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관음상은 양쪽에 사천왕의 하나인 비사문천과 내세에 어린아이들을 수호하는 갑옷 차림의 지장보살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건물 중앙의 방에 있는 세 맹장지에는 일본화의 유파로서 유명한 가노파 창시자의 손자인 가노 에이노(1631~1697)가 그린 수묵화가 아름다운 상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갸쿠덴(客殿)(손님을 맞는 전각)은 1691년에 지어졌습니다. 그 구조는 갸쿠덴과 부엌으로서 사용된 건물인 ‘구리’를 조합한 것이지만 각각의 영역은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바깥문의 물결 모양의 처마와 쇼인즈쿠리(무로마치 시대(1336~1573) 이후에 발전한 무사 주택의 형식. 다다미가 깔려 지금의 일본식 방의 원형이 되었다) 양식으로 만든 방의 절묘한 디자인은 이들이 지위가 높은 빈객을 위해 의도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쓰스케의 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일본의 중세가 격동의 시대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5세기 전반, 이 지역은 독재적인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1397~1441)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배신을 두려워했던 요시노리는 자신과 가까웠던 무사들과 당시 여러 번을 지배하고 있었던 아카마쓰 미쓰스케를 비롯한 측근을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미쓰스케의 딸은 쇼군의 성에서 지내고 있었을 때 음모를 알고 미쓰스케에게 경계하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요시노리는 미쓰스케의 딸의 행동을 알고 그녀를 암살하라고 명했습니다. 미쓰스케의 딸의 비극적인 희생 덕분에 선제 공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1441년 여름에 교토에서 열린 노(能)(가면을 쓰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상연되는 극)를 상연하는 자리에서 폭군 요시노리를 암살했습니다.

Jūmyō’in (Subtemple of Engyōji)

Jūmyō’in was commissioned by the warlord Akamatsu Mitsusuke (1381–1441) to honor his daughter, who died at the youthful age of sixteen. Its principal icon is a statue of the thousand-armed manifestation of Kannon, the bodhisattva of compassion. The statue is relatively large, and it is thought to have been made the same size as Mitsusuke’s daughter. The sliding doors of the subtemple’s three central rooms are decorated with beautifully preserved monochrome ink paintings by Kanō Einō (1631–1697), grandson of the founder of the renowned Kanō school.

The subtemple’s guest hall was built in 1691. Its construction combines the guest quarters with the kuri, a building that functioned as the subtemple’s kitchen, but the two areas were kept strictly separate. The undulating eaves on the outer gate and the exquisite design of the room, in the shoin-zukuri style, indicate that it was intended for guests of honor.

The story of the death of Mitsusuke’s daughter evinces a turbulent period in medieval Japanese history. In the first half of the fifteenth century, this area was controlled by the autocratic shogun Ashikaga Yoshinori (1397–1441). Fearing treachery, Yoshinori planned to assassinate several of his closest advisors, including Akamatsu Mitsusuke. Mitsusuke’s daughter learned of the plot while in residence at the shogun’s palace, and she sent her father a letter of warning. When Yoshinori discovered what the girl had done, he ordered her death. Thanks to his daughter’s tragic sacrifice, Mitsusuke was able to take pre-emptive action. He assassinated the tyrant Yoshinori at a reception in Kyoto in the summer of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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