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World Peace Pagoda

  • Yamaguchi
  • Fukuoka
Topic(s):
Historic Sites/Castle Ruins Annual Events
Medium/Media of Use:
Web Page
Text Length:
251-500
FY Prepared:
2023
Associated Tourism Board:
kammon imbaundo ukeire kyogikai

世界平和パゴダ


世界平和パゴダは、ミャンマー仏教会に認められた日本で唯一のミャンマー式寺院だ。世界平和と、門司港から出兵して戦死した兵士を慰霊する目的で建てられた。関門海峡を見下ろす和布刈公園にある。高さ27メートルの仏塔が特徴で、入口の上には色鮮やかなクジャクのステンドグラスがはめ込まれている。国の登録有形文化財にもなっている。


1958年に建てられたこのパゴダは、第二次世界大戦(1939-1945年)中にミャンマー(当時はビルマ)に派遣された元軍人、市原瑞麿(1917年生まれ)が構想したと言われている。戦争の死と計り知れない苦しみを目の当たりにした市原は、戦争の犠牲者を悼み、世界平和を促進するために、日本にテーラワーダ仏教の仏塔を建てたいと考えた。


1957年、ミャンマーから来日した僧侶らが、市原の構想を知り、プロジェクトを支援するために日本に残ることを志願した。


第二次世界大戦戦没者の慰霊碑

第二次世界大戦中、約200万人の日本兵が門司港から戦地に派遣され、約20万人がビルマ戦線(1942-1945)に参加した。ビルマでの日本軍の死傷者は数十万人にのぼり、少なくとも18万人の日本国民がビルマで死亡し、祖国に帰れなかったことが後に判明した。幸運にも帰国できた人々にとって、門司は喪失、生存、そして戦争による究極の悲劇の象徴として深い意味を持つようになった。


ビルマの民間人にもまた、ひどい犠牲者が出た。正確には分からないが、日本軍の犠牲者数を遥かにに凌ぐものであったことは明らかである。戦争が終結したとき、大勢が犠牲者になったことが両国に重くのしかかった。このパゴダは両国の敵対関係が終わってからわずか13年後に作られた。これは両国の親善を確立するための小さな一歩であった。


1958年9月、パゴダはミャンマーの建築家の指揮のもと、地元の大工たちによって建てられた。総工費は4,000万円で、ビルマ仏教会と門司をはじめとする日本側の寄付金で折半された。


パゴダには、少なくとも3人のミャンマー僧侶が常駐している。運営資金は、元兵士や戦死者の遺族からの寄付と、ささやかな入場料で賄われている。残念ながら、現在パゴダはかつてのような支援を受けておらず、門司市民の善意と慈善活動によって維持されている。


内部のミャンマー風デザインに注目

パゴダは典型的なミャンマー風デザインとなっている。祭壇中央の仏像は、釈迦如来をミャンマーの仏教で表現したものだ。その左側には、戦死した兵士の50の位牌が置かれている。ミャンマーの浜辺から持ってきた素朴な石は、愛する人の遺骨と再会できなかった多くの家族の悲しみを想起させる。毎年秋には慰霊祭が行われる。

世界和平塔


世界和平塔矗立在門司北部的古城山高處,俯瞰著關門海峽。塔高27公尺、直徑13公尺,它是日本唯一被緬甸佛教教會官方認可的緬甸風格的寺廟。

世界和平塔建於1958年,據說是由曾在第二次世界大戰(1939-1945)期間被派往緬甸(1948年以前英國殖民地時期稱為Burma,1989年改名為Myanmar)的退伍軍人市原瑞麿(1917-?;麿,音同「抹」)倡議建造的。親眼目睹了戰爭造成的難以言喻的死亡和苦難後,他希望在日本建造一座上座部佛教(南傳佛教)的佛塔,用來悼念戰爭中的死者並以此倡導世界和平。

緬甸最傑出的佛教僧侶之一馬雜湊尊者(Mahāsi Sayādaw, 1904-1982)在1957年來到日本,與他同行的年輕弟子便是日後著名的烏開明達尊者(U Kemminda, 1922-2011)。當得知市原瑞麿的願望之後,烏開明達便自願留在日本支援佛塔的建設。


悼念二戰死難者

在第二次世界大戰期間,大概有200萬日本士兵經由門司港被派往太平洋戰場,其中,約有20萬人參加了緬甸戰役(1942-1945)。出征時,這些士兵中很少有人認為自己還能生還。日軍在緬甸的傷亡人數多達數十萬,至少有18萬日本人喪生在那裡,再也沒能返回故土。對於那些僥倖最後回家的生還者來說,門司成為了失去、生還以及戰爭悲劇的象徵,意義深遠。

雖然難以統計確切數字,但緬甸國民同樣遭受了慘重傷亡,而且死亡人數顯然遠遠超過了日軍。巨大的戰爭創傷給兩國戴上了沉重的枷鎖,在戰爭結束13年後這座佛塔的落成,標誌了雙方在建立友好關係上終於往前邁出了一小步。

1958年9月,在緬甸建築師的指導下,當地木匠建成了這座佛塔。總造價達4000萬日圓,由緬甸佛教教會和門司當地的捐款分攤。

現在,至少有3名來自緬甸的上座部佛僧在佛塔常駐,佛塔的營運資金來自微薄的門票收入以及退伍士兵和死難者家屬的捐款。只是很可惜,現在佛塔已不再像以前那樣得到外界廣泛支持,目前主要依靠門司居民的愛心和慈善活動來維持。


佛塔內部

這座佛塔是典型的緬甸式設計,祭壇中央為上座部佛祖釋迦牟尼像,左側矗立著50座陣亡將士的牌位。來自緬甸某海灘的一塊普通岩石莊嚴地提醒人們,許多悲痛欲絕的家庭永遠無法與親人重逢。每年秋季,這裡都會舉行悼念儀式。


開館時間:6:00~18:00

閉館日:全年無休

門票:200日圓

世界和平塔


世界和平塔矗立在门司北部的古城山高处,俯瞰着关门海峡。塔高27米、直径13米,它是日本唯一被缅甸佛教教会官方认可的缅甸风格的寺庙。

世界和平塔建于1958年,据说是由曾在第二次世界大战(1939-1945)期间被派往缅甸(1948年以前英国殖民地时期称为Burma,1989年改名为Myanmar)的退伍军人市原瑞麿(1917-?;麿,音同“抹”)倡议建造的。由于亲眼目睹战争造成了难以言喻的死亡和苦难,他希望在日本建造一座上座部佛教(南传佛教)的佛塔,以悼念战争中的死难者并倡导世界和平。

1957年,缅甸最杰出的佛教僧侣之一马哈希尊者(Mahāsi Sayādaw, 1904-1982)来到日本,而与他同行的年轻弟子就是日后著名的乌开明达尊者(U Kemminda, 1922-2011)。当乌开明达得知市原瑞麿的愿望之后,便自愿留在日本支持佛塔的建设。


悼念二战死难者

第二次世界大战期间,约有200万日本士兵经由门司港被派往太平洋战场,约有20万人参加了缅甸战役(1942-1945)。当这些士兵出征时,很少有人认为自己还能生还。日军在缅甸的伤亡人数多达数十万,其中至少有18万日本人在那里丧生,再也没能返回故土。对于那些回家的幸存者来说,门司成为了失去、生还以及战争悲剧的象征,具有深远的意义。

缅甸国民同样遭受了惨重伤亡,虽然难以统计确切数字,但死亡人数显然远远超过了日本占领军。如此巨大的战争创伤给两国戴上了沉重的枷锁,在战争结束13年后,这座佛塔的落成标志了双方在建立友好关系上迈出了一小步。

1958年9月,在缅甸建筑师的指导下,当地木匠建成了这座佛塔,总造价达4000万日元,由缅甸佛教教会和门司当地的捐款分摊。

现在,至少有3名来自缅甸的上座部佛僧常驻于佛塔中。佛塔的运营资金来自微薄的门票收入以及退伍士兵和死难者家属的捐款。遗憾的是,佛塔已不再像以前那样得到广泛支持,目前主要依靠门司居民的善意和慈善活动来维持。


佛塔内部

佛塔采用典型的缅甸式设计,祭坛中央是上座部佛祖释迦牟尼像,左侧矗立着50座阵亡将士的牌位。来自缅甸某海滩的一块普通岩石庄重地提醒人们,许多悲痛欲绝的家庭永远无法与亲人重逢。每年秋季,这里都会举行悼念仪式。


开馆时间:6:00~18:00

闭馆日:全年无休

门票:200日元

세계 평화 파고다


 세계 평화 파고다는 미얀마 불교회가 인정한 일본 유일의 미얀마식 사원입니다. 세계 평화와 모지 항구에서 출병하여 전사한 병사들을 위령하는 목적으로 지어졌습니다. 간몬 해협을 내려다보는 메카리 공원에 있습니다. 높이 27m의 불탑이 특징이며, 입구 위에는 선명한 빛깔의 공작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일본 등록 유형문화재이기도 합니다.


 1958년에 지어진 이 파고다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중에 미얀마(당시는 버마)에 파견된 전직 군인 이치하라 미즈마로(1917년생)가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의 죽음과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목격한 이치하라는 전쟁 희생자를 애도하고 세계 평화를 촉진하기 위해 일본에 상좌부 불교의 불탑을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57년, 미얀마에서 일본을 방문한 승려들이 이치하라의 구상을 알고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 남기를 자원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몰자의 위령비

 제2차 세계대전 중 약 200만 명의 일본군이 모지 항구에서 전쟁터로 파견되었으며 약 20만 명이 버마 전선(1942~1945)에 참가했습니다. 버마에서 나온 일본군 사상자는 수십만 명에 이르며, 적어도 18만 명의 일본 국민이 버마에서 사망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 후에 밝혀졌습니다. 운 좋게도 귀국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모지는 상실, 생존,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궁극적인 비극의 상징으로서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버마의 민간인들에서도 역시 끔찍한 인명 피해가 나왔습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일본군 희생자 수를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전쟁이 종결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희생된 것이 양국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이 파고다는 양국의 적대 관계가 끝난 뒤 불과 13년 후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양국의 친선을 확립하기 위한 작은 한 걸음이었습니다.


 1958년 9월, 파고다는 미얀마 건축가의 지휘 아래 현지 목수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총공사비는 4,000만 엔으로 버마 불교회와 모지를 비롯한 일본 측의 기부금으로 나뉘었습니다.


 파고다에는 적어도 3명의 미얀마 승려가 상주하고 있습니다. 운영 자금은 전직 군인과 전사자의 유족으로부터 받은 기부와 적은 입장료로 충당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파고다는 과거와 같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모지 시민의 선의와 자선 활동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내부의 미얀마식 디자인에 주목

 파고다는 전형적인 미얀마식 디자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단 중앙의 불상은 석가여래를 미얀마의 불교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 왼쪽에는 전사한 병사의 위패 50개가 놓여 있습니다. 미얀마의 해변에서 가져온 소박한 돌은 사랑하는 사람의 유골과 재회하지 못한 많은 가족의 슬픔을 상기시킵니다. 매년 가을에는 위령제가 열립니다.

World Peace Pagoda


The World Peace Pagoda overlooks the Kanmon Strait from high on Mt. Kojō, in northern Moji. The 45-meter-tall structure is the only official Myanmar temple in Japan.


Built in 1958, the pagoda is said to have been envisioned by Ichihara Mizumaro (b. 1917), a former soldier who had been deployed to Myanmar (then Burma) during World War II (1939–1945). Having seen the untold death and suffering of the war firsthand, Ichihara wanted to construct a Theravada Buddhist pagoda in Japan to honor the casualties of the war and promote world peace.


The Venerable Mahasi Sayadaw (1904–1982), one of Myanmar’s preeminent Buddhist monks, arrived in Japan in 1957. He brought with him a young devotee who was later known as the Venerable U Khe Min Da (1922–2011). On learning about Ichihara’s vision, the young monk volunteered to remain in Japan to support the project.


Memorial to the Fallen of World War II

During World War II, around two million Japanese soldiers were deployed to the Pacific theater through Moji Port, and some 200,000 took part in the Burma Campaign (1942–1945). When those soldiers shipped out, they must have known they might never come back. Japanese casualties in Burma numbered in the 100,000s, and at least 180,000 Japanese citizens died there and were never returned to their homeland. For those fortunate enough to come home, Moji assumed profound significance as a symbol of loss, survival, and the tragedy of war.


The Burmese civilian population also suffered terrible casualties. Although exact numbers are difficult to determine, it is clear they far eclipsed the losses of the occupying Japanese. When the war finally came to a close, the trauma of such great violence weighed heavily on the two nations. The creation of this pagoda, just 13 years after hostilities had ended, was a small step toward establishing mutual goodwill.


In September 1958, the pagoda was built by local carpenters under the direction of a Myanmar architect. The construction costs totaled 40 million yen, which was split between the Buddha Sāsana Council of Burma and donations from the local Moji community.


At least three Theravada monks from Myanmar reside at the pagoda at any one time. Operational funds are covered by a modest entrance fee and by donations from former soldiers and families of the victims of war. Unfortunately, the pagoda does not receive the support it once did, and it is kept up mostly through the goodwill and charity of Moji residents.


The Pagoda Interior

The pagoda follows a typical Burmese design. The Buddha statue at the center of the altar is a Theravada representation of Gautama Siddhārtha (Japanese: Shaka Nyorai), the historical Buddha. To its left stand 50 mortuary tablets (ihai) for fallen soldiers. A simple rock from a beach in Myanmar is a solemn reminder that many grieving families were never reunited with the remains of their loved ones. A memorial service is held each year in 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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