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다이쇼인 절: 전체 개요와 역사

  • 히로시마
장르:
신사·사원·교회
매체 이용 구분:
웹페이지
단어 수:
251-500
작성 연도:
2019
지역 협의회명:
Hatsukaichi City

Daishoin: Introduction and History


This vast Buddhist temple complex is located at the foot of Mt. Misen (535 meters) and belongs to the Omuro branch of esoteric Shingon Buddhism. According to legend, the temple was established in 806 by Kukai (774–835), the founder of Shingon, who in that year is said to have ascended Mt. Misen to perform ascetic rites and various rituals, including the goma fire ritual that remains a central practice of the Shingon school. The fire lit by Kukai is said to have burned on the mountain ever since.


What is now Daishoin first appears in twelfth-century records that mention a grand temple on or near Miyajima. That temple’s main hall is said to have been built on the orders of Emperor Toba (1103–1156), who is known to have visited Miyajima to pray for the peace and well-being of the realm. This event marked the start of Daishoin’s special relationship with the court, which lasted for centuries. One of Emperor Toba’s sons, Kakusho (1129–1169), was the chief abbot of Ninnaji in Kyoto, the head temple of the Omuro branch and a sanctuary with very close ties to the imperial family. Kakusho favored Daishoin as did his father, and the temple eventually became an affiliate of the powerful Ninnaji. Documents detailing the 1181 visit of retired Emperor Takakura (1161–1181) to Miyajima describe Daishoin as the “administrator” of Itsukushima Shrine, hinting at the temple’s authoritative position.


With royal backing, Daishoin continued to flourish and eventually became the primary subsidiary of Ninnaji in the sixteenth century. At the height of its strength, it had 12 branch temples of its own and enjoyed the favor of many powerful individuals. These included the warlord Toyotomi Hideyoshi (1537–1598), who unified all of Japan under his banner but died before he could establish a stable government.


However, Daishoin has suffered hard times as well. In 1868, the new government led by Emperor Meiji (1852–1912) initiated a policy of cultivating the native Shinto faith as a vehicle of modern nationalism. The Meiji government ordered the forced separation of Shinto and Buddhism, ending a tradition of religious syncretism that had endured in Japan for more than a thousand years. Like many temples throughout Japan, the grounds and status of Daishoin were greatly reduced as a result of these changes.


Daishoin suffered another severe setback in 1887 when a fire laid waste to the temple’s precincts and burned all but a few buildings to the ground. The current halls, gates, and other structures were all built months, years, or even decades after the blaze. The summit of Mt. Misen, where the monks of Daishoin watch over Kukai’s eternal flame day and night, has also experienced repeated natural disasters over the years and now hosts a string of newer buildings. The peak can be climbed in an hour and a half by following a hiking trail from the main temple.


大聖院:全体概要と歴史


大聖院は、標高535メートルの弥山の麓に位置する広大な仏教寺院で、真言宗の御室派に属しています。伝説によると寺は806年、真言宗の創始者、空海(774-835)により設立されました。空海は弥山に登り、真言宗の修行の中心となる儀礼である護摩焚き(火を燃やして祈る儀式)をはじめ様々な修行や儀式を行ったとされています。空海が灯した残り火は、その後もずっと山で燃え続けているといわれています。


現在の大聖院は12世紀の記録に初めて見られ、宮島内または近くに壮大な寺院があっ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その寺の本堂は、鳥羽天皇(1103-1156)の命令で建てられたと言われています。鳥羽天皇は当時、宮島を訪れ、領土の平安と安寧を祈願したことで知られています。このような鳥羽天皇の訪問は、大聖院と朝廷の間で何世紀も続く特別な関係の始まりとなりました。鳥羽天皇の息子の一人、覚性(1129-1169)は、御室派の総本山であり皇室と非常に密接な関係を持つ京都の仁和寺の寺主でした。覚性は父と同じように大聖院を好み、やがて寺院は大きな力を持つ仁和寺の末寺(本社から分かれた寺)となりました。引退した高倉上皇(1161-1181)の1181年の宮島訪問を記した文書では、大聖院を厳島神社の「別当寺(神社を管理する寺)」と表現しており、寺の持つ権威をうかがうことができます。


大聖院は皇室の後押しを受け、16世紀に仁和寺の主要末寺となりました。権力の最盛期には12の末寺を持ち、多くの権力者から厚く信仰されました。そこには日本全国を統一した武将豊臣秀吉(1537-1598)が含まれますが、政権が安定する前に亡くなりました。


そんな大聖院には苦難の時期もありました。明治時代(1868-1912)に入った1868年、新政府は近代ナショナリズムの拡大する手段として日本の伝統的な神道を奨励する政策を開始しました。明治政府は神道と仏教の強制分離を命じ、日本で1000年以上にわたり続いてきた神道と仏教の融合(神仏習合)の伝統を終わらせました。このような変化の結果、大聖院は日本各地の多くの寺院と同様、その土地や地位を大きく減らされることになりました。


1887年には、火災により数棟を除くすべての建物が焼失し、さらなる打撃を受けました。現在のお堂、門、その他の構造物はすべて、火災から数カ月、数年、あるいは数十年後に建てられたものです。弥山の頂上では大聖院の僧侶たちが空海の「消えずの火」を日夜見守っていますが、ここもまた、長年にわたって繰り返された自然災害を経験したことから、すべての建造物を新しく再建し、それが今日まで続いています。頂上へは、大聖院からハイキングコースをたどり、1時間半で登ることができます。

大聖院:歷史簡介


這片宏大的佛寺建築群位於彌山(535公尺)山麓,屬日本佛教密宗真言宗御室派。相傳寺院最初是空海(774-835;諡號弘法大師)在西元806年所建,為宮島歷史最悠久的寺院。空海是日本真言宗的開山祖師,據說他從唐朝學法歸來後登上彌山,完成了苦修和其他多項儀式,其中一項被稱為「護摩行」,至今依然是真言宗的核心儀式。又傳說當年空海在山上點燃的聖火一直燃燒到了今天,從未熄滅。如今的大聖院是「日本三大消災開運大師」之一,人們來到這裡參拜,祈求辟邪開運、家人安康、金榜題名。

現在的大聖院最早出現在12世紀的紀錄中,這份紀錄記載了宮島及周邊地區的宏偉寺院。相傳這座寺院的本堂(正殿)是奉鳥羽天皇(1103-1156)之命修建的,鳥羽天皇曾行幸宮島,祈禱國泰民安。這一傳說解釋了大聖院與朝廷之間特殊的關聯,兩者的關聯在此之後延續了數百年。鳥羽天皇的兒子覺性(1129-1169)是京都仁和寺的住持,而仁和寺是御室派的總本山(總部),也是與皇家關係十分密切的宗教聖地。與父親一樣,覺性也很喜歡大聖院,大聖院最終成為了仁和寺的末寺(本山的下屬寺廟)。另有文獻詳細記載了退位後的高倉上皇(1161-1181)在1180年行幸宮島的情形,文中將大聖院描述為嚴島神社的「別當寺」,即管理者,由此可見大聖院的權威與地位之高。

皇家的支持讓大聖院得以持續蓬勃發展,16世紀,成為了仁和寺最重要的末寺。鼎盛時期,大聖院管轄著12座末寺,並且深受眾多權貴的青睞,一代梟雄豐臣秀吉(1537-1598)就是其中一位。這位武將統一了日本,卻沒能來得及在生前建立起一個穩定的政府。

然而,大聖院也經歷過艱難的時期。1868年,明治天皇(1852-1912)統治下的新政府下令拆分神道教與佛教,終結在日本已延續了上千年的「神佛習合」宗教融合傳統,決定將本土的神道信仰作為現代民族主義的載體加以培育。這樣的變革導致大聖院和日本各地的許多寺廟一樣,失去了原有地位及寬闊的土地。

1887年,大聖院遭遇了第二次嚴重打擊。當時,一場大火席捲寺院,除了少數幾處建築,全寺幾乎全都被燒為灰燼。如今的佛堂殿閣、山門及其他建築,都是在那場大火數月、數年甚至數十年之後才慢慢重建起來的。彌山頂峰是大聖院僧眾日夜守護空海不滅聖火的地方,在漫長的歲月裡,也曾多次遭遇自然災害,這才有了今天這些出自不同年代的建築。從本坊(主寺)出發,循著一條山道向上,一個半小時即可抵達山頂。據說日本第一任首相伊藤博文(1841-1909)曾在登上彌山頂峰後如此感嘆:「山頂遠眺,才知『日本三景』之一(宮島景色)的真正價值啊。」

大圣院:基本情况与历史


这片宏大的佛寺建筑群位于弥山(535米)脚下,属日本佛教密宗真言宗御室派。相传寺院最初由空海(774-835;谥号弘法大师)在公元806年建造,是宫岛历史最悠久的寺院。空海是日本真言宗的开山祖师,据说他从唐朝学法归来后,登上弥山完成了苦修和其他多项仪式,其中一项被称为“护摩行”的修行至今依然是真言宗的核心仪式。传说当年空海在山上点燃的圣火一直燃烧到了今天,从未熄灭。如今的大圣院是“日本三大消灾开运大师”之一,人们来到这里参拜,祈求辟邪开运、家人安康、金榜题名。

在一份12世纪的记录中首次提到了现在这座大圣院,这份记录记载了宫岛及附近的雄伟寺院。相传,这座寺院的本堂(正殿)是奉鸟羽天皇(1103-1156)之命修建的,鸟羽天皇曾行幸宫岛,祈祷国泰民安。这则传说解释了大圣院与朝廷之间的特殊关系,自此以后,两者的关联延续了数百年。鸟羽天皇的儿子觉性(1129-1169)是京都仁和寺的住持,而仁和寺是御室派总本山(总部),也是与皇家关系十分密切的宗教圣地。和父亲一样,觉性也很喜欢大圣院,最终,大圣院成为了仁和寺的末寺(本山的下属寺庙)。此外,有文献详细记载了退位后的高仓上皇(1161-1181)在1180年行幸宫岛的情形,文中将大圣院描述为严岛神社的“别当寺”,即管理者,由此可见大圣院的权威与地位之高。

在皇家的支持下,大圣院持续蓬勃发展,终于在16世纪成为了仁和寺最重要的末寺。鼎盛时期,大圣院下辖12个末寺,并且深受众多权贵的青睐,一代枭雄丰臣秀吉(1537-1598)就是其中一位。这位武将统一了日本,却没能来得及在生前建立起一个稳定的政权。

然而,大圣院也曾经历过艰难的时期。1868年,明治天皇(1852-1912)统治下的新政府启动一项政策,决定将本土的神道信仰作为现代民族主义的载体加以培育。明治政府下令强行拆分神道教与佛教,终结在日本已延续了上千年的“神佛习合”宗教融合传统。和日本各地的许多寺庙一样,在重重变革的冲击下,大圣院占地面积大幅缩减,地位也急速下降。

大圣院遭遇的第二次严重打击是在1887年。当时,一场大火席卷寺院,除了少数几处建筑,全寺几乎被夷为平地。在那场大火过去了数月、数年甚至数十年之后,如今的佛堂殿阁、山门及其他建筑才得以陆续重建。弥山顶峰是大圣院僧众日夜守护空海长明之火的地方,在漫长的岁月里,也同样曾遭遇多次自然灾害,这才有了今天这些出自不同年代的建筑。从本坊(主寺)出发,循着一条山道向上,一个半小时即可抵达山顶。据说日本第一任首相伊藤博文(1841-1909)曾在登上弥山顶峰后感叹:“登顶远眺,才知‘日本三景’之一(宫岛景色)的价值所在啊。”

다이쇼인 절: 전체 개요와 역사


다이쇼인 절은 해발 535m의 미센 산 기슭에 위치한 거대한 불교 사원으로, 진언종(불교의 한 종파)의 오무로파에 속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다이쇼인 절은 806년에 진언종의 창시자인 구카이(774~835)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구카이는 미센 산에 올라 진언종 수행의 중심이 되는 의례인 호마법(불을 피우며 기도를 올리는 의식)을 비롯한 다양한 수행과 의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구카이가 산에서 피우고 남았다는 불씨는 꺼지지 않고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지금의 다이쇼인 절은 12세기에 남겨진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미야지마 섬이나 가까운 곳에 웅장한 사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원의 본당은 도바 천황(1103~1156)의 명에 따라 지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도바 천황은 미야지마 섬을 방문하여 영토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도바 천황의 방문은 수 세기에 걸쳐 다이쇼인 절과 조정 사이에서 특별한 관계가 지속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바 천황의 아들 중 한 명인 가쿠쇼(1129~1169)는 오무로파의 총본산이자 황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교토 닌나지 절의 주지였습니다. 가쿠쇼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다이쇼인 절을 좋아했고, 사원은 이윽고 강력한 권력을 지닌 닌나지 절의 말사(본사에서 갈라져 나온 절)가 되었습니다. 은퇴한 다카쿠라 상황(1161~1181)이 1181년에 미야지마 섬을 방문한 사실을 기록한 문서를 보면, 다이쇼인 절을 이쓰쿠시마 신사의 ‘벳토지(신사를 관리하는 절) ’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절이 지닌 권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다이쇼인 절은 황실의 후원에 힘입어 16세기에는 닌나지 절의 주요 말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권력이 최전성기를 자랑하던 시기에는 12개의 말사를 거느리며 수많은 권력자들에게 두터운 신앙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본 전국을 통일했던 무사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또한 그중 한 명이었으나, 정권이 안정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랬던 다이쇼인 절에도 고난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메이지 시대(1868~1912)로 접어든 1868년, 신정부는 근대 민족주의를 확대할 수단으로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신도와 불교를 강제로 분리하는 명을 내렸고, 일본에서 1,000년이 넘게 이어져 내려온 신도와 불교의 융합(신불습합)이라는 전통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일본 각지의 수많은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다이쇼인 절 또한 소유했던 토지와 지위를 많이 잃고 말았습니다.


1887년에는 화재로 인해 몇 채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이 소실되면서 추가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사당과 문, 그리고 나머지 구조물들은 모두 화재로부터 몇 개월, 몇 년 또는 수십 년 후에 지어진 것들입니다. 미센 산 정상에서는 다이쇼인 절의 스님들이 구카이의 ‘기에즈노히(꺼지지 않는 불) ’를 밤낮으로 지키고 있는데, 이곳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된 자연재해를 경험하면서 모든 건조물들을 새롭게 재건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산 정상까지는 다이쇼인 절에서부터 하이킹 코스를 따라 1시간 반이면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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