標題 大久保長安墓

  • 島根
類別:
史蹟、城蹟
媒體用途種類:
網頁
字數:
250以下
編寫年度:
2019
地區協議會名稱:
iwamiginzantagengokyogikai

Monument to Okubo Nagayasu

When the warlord Tokugawa Ieyasu (1543–1616), now known as the founder of the Tokugawa shogunate that ruled Japan from 1603 to 1867, gained control over Iwami Ginzan in 1600, he appointed Okubo Nagayasu (1545–1613), one of his most trusted allies, to supervise the mine. Okubo was known as a skilled administrator and expert on mining matters. He developed several productive mine shafts, including the Okubo shaft that now bears his name, and is credited with laying the foundations for the mine’s greatest period of prosperity. Okubo impressed Ieyasu, who later promoted him to supervisor of many of the realm’s most plentiful sources of precious metals, including the gold mines of Sado Island (off the coast of present-day Niigata Prefecture) and Izu (Shizuoka Prefecture).


Upon his death at the age of 69, Okubo had already had several impressive tombs—monuments rather than actual repositories for remains—constructed for himself. But then something unexpected happened: Okubo was posthumously charged with embezzlement and treason. His seven sons and many other followers were forced to kill themselves, and his entire estate was seized. The accusations may have been politically motivated, but no matter: thereafter, monuments to him were either removed or ignored. Only in 1794 did the people of Iwami Ginzan feel comfortable enough to erect the new tombstone, which stands today.


大久保長安墓所

1603年から1867年まで、日本を統治した徳川幕府の創始者として今では知られている武将の徳川家康(1543年~1616年)が、1600年に石見銀山の支配権を獲得した際、彼は銀山の監督に最も信頼できる部下の一人を任命しました。鉱業の熟練した管理者であり専門家として知られるこの大久保長安(1545年~1613年)の功績は、君主の期待以上のものでした。彼は、今では本人の名前を冠する大久保間歩など、銀の産出が豊富な坑道を複数開拓し、銀山最大の繁栄期の基礎を築いたことで高く評価されています。家康は長安の功績に感銘を受け、後に佐渡島(現在の新潟県沖)や伊豆(静岡県)の金鉱山など、幕府で最も貴金属が豊富な鉱山の多くで、監督者に昇進させました。


長安は69歳でこの世を去りましたが、その際には実際の遺骸の埋葬地というよりも記念碑というほどの立派な墓が、すでに複数建てられていました。しかし予期せぬことが起こります。長安の死後、彼は横領と謀反の嫌疑をかけられました。長安の7人の息子と部下は自害を余儀なくされ、財産すべてが押収されました。この告発は政治的な動機であった可能性がありますが、いずれにせよもはや大久保長安は、人が彼と関係があることを望む人物ではなくなり、彼の記念碑は取り壊され、あるいは見向きもされなくなりました。1794年になってようやく、石見銀山の人々は新しい墓石を立てることに賛成し、この墓石は現在も残っています。


大久保长安墓所


1600年,德川幕府(1603-1867)创立者德川家康(1543-1616)刚刚取得石见银山的控制权,便立刻指派最信任的部下之一大久保长安(1545-1613)接掌矿山地区。大久保长安擅长管理,尤其精通矿山事务。在他的主持下,石见银山开辟了多条银矿资源丰富的“间步”(矿坑通道),其中一条就是冠以其名的“大久保间步”。大久保长安为石见银山进入鼎盛时代奠定了基础,德川家康对其功绩十分满意,令他掌管日本多个储量最丰富的贵金属矿,包括佐渡岛(今新潟县近海地区)和伊豆(今静冈县)的金矿。

大久保长安享年69岁,生前他已为自己修建了好几处豪华的墓地,这些墓地与其说是为了安葬骨骸,更像纪念碑。然而事与愿违,或许出于政治目的,大久保长安在死后被追诉贪污与谋反,他的7个儿子和许多部下因此被迫自杀,所有产业皆被收缴,他的纪念碑或被拆毁,或被荒置。直到1794年,石见银山的人们才重新为他修建墓碑,并留存至今。

오쿠보 나가야스의 묘소


1603년부터 1867년까지 일본을 통치한 도쿠가와 막부의 초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는 1600년에 이와미 은광의 지배권을 획득한 후 오쿠보 나가야스(1545~1613)를 은광의 감독자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광산 업무에 숙련된 관리자이자 전문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나가야스는 이에야스의 신뢰에 부응하여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내보였습니다. 이에야스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은 나가야스는 후에 사도섬(현재의 니가타현 앞바다)과 이즈(시즈오카현)의 금광 등 귀금속 자원이 풍부한 수많은 광산에서 감독자로 등용되었습니다.

나가야스는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이미 묘비라기보다는 기념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훌륭한 무덤이 여러 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일본에서는 생전에 무덤을 세우면 덕을 쌓을 수 있다고 여김). 그러나 나가야스의 사후에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가야스가 횡령과 반역 혐의를 받게 되면서 그의 일곱 아들과 부하들이 자살을 강요당하고 재산 역시 전부 압류되었던 것입니다. 이 고발은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사실이야 어찌됐든 오쿠보 나가야스는 그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은폐하고 싶은 존재가 되었고 그의 기념비 역시 파괴되거나 무시당하는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이와미 은광 사람들은 1794년이 되어서야 새로운 묘비를 세우는 것에 찬성했는데, 이 묘비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나가야스는 은이 풍부하게 산출되는 갱도를 여러 개 개척해 은광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나가야스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그가 개발한 갱도 중 하나에 그의 성을 붙여 오쿠보 갱도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大久保長安墓


1600年,德川幕府(1603-1867)創立者德川家康(1543-1616)剛剛取得石見銀山的控制權,便立刻指派心腹大久保長安(1545-1613)掌管礦山地區。大久保長安精於管理,尤擅礦山事務。在他的任內,石見銀山開闢了多條銀礦資源豐富的「間步」(礦坑通道),其中一條就是以他的姓氏命名的「大久保間步」。大久保長安為石見銀山蒸蒸日上的採礦事業奠定了基礎,德川家康對他的功績十分滿意,於是令其掌管日本多個儲量最豐富的貴金屬礦,包括佐渡島(今新潟縣近海地區)和伊豆(今靜岡縣)的金礦。

大久保長安享年69歲。生前他為自己修建了數處豪華的墓地,與其說是為了安葬骨骸,這些「墓地」更具有紀念碑的意義。然而事與願違,或許出於政治目的,大久保長安在死後被追訴貪污和謀反,他的7個兒子和許多部下因此被迫自殺,所有產業皆被收繳,他的紀念碑或被拆毀,或被荒置。直到1794年,石見銀山的人們才重新為他修建了墓碑,並留存至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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