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北海道の『心臓』と呼ばれたまち・小樽

  • 北海道
ジャンル:
史跡・城跡 集落・街 食・食文化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ワード数:
501-750
作成年度:
2023年
地域協議会名:
小樽市日本遺産推進協議会

The Story of Otaru


Otaru’s people are central to the story of the city and its transformation from a fishing village to a major shipping hub and now a national leader in heritage preservation. Starting with the fishermen who moved to this northern outpost to make their fortunes from herring in the nineteenth century, Otaru has been driven by a pioneer spirit. 


The proletarian writer Kobayashi Takiji (1903–1933) spent his youth in Otaru and set his novels and short stories in the city. He described it as “the heart of Hokkaido.” Kobayashi saw Otaru as the center of Hokkaido’s power, a port from which resources from the island’s vast interior were shipped throughout Japan and to the world, and a destination for the steady flow of settlers seeking to begin new lives. 


Waves of prosperity

In 1865, Otaru was a fishing village of around 300 households. Fishermen moved to Otaru from southern Hokkaido, drawn by the large shoals of herring that spawned in the waters off the coast each spring. Processed into fertilizer for cotton and indigo, much of the catch was then transported by wooden merchant ships along the Sea of Japan coast to ports and wholesale markets in southwestern Honshu.


As fishing methods improved, the annual herring catch increased. In 1897, it was close to 100,000 tons. Sometimes the whole community helped to land the fish on the beaches. Local accounts from the mid-twentieth century recall days when the herring catch was so large that schools would close for the day, so that the teachers and parents of school children could help transport the herring. 


Fishing families amassed wealth and built grand mansions in Otaru, furnished with the latest goods from Osaka, Kyoto, and Tokyo. They frequented luxury restaurants and fine art stores in the city. 


A growing port city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the Meiji government (1868–1912) resolved to develop and settle the resource-rich northern island of Hokkaido, and Otaru became a hub of the new frontier. In 1882, Hokkaido’s first railway opened to transport coal from inland mines to the port at Otaru, and the coal helped fuel the government’s industrialization drive.


Between 1869 and 1926, some 2.27 million people from other parts of Japan moved to Hokkaido to make their fortunes, and many landed at the port of Otaru. Some settled there, and by 1920 Otaru had grown from a fishing village to a thriving city of over 100,000. 


A booming economy

A new trade route to southern Sakhalin opened after the Russo-Japanese War (1904–1905), further elevating Otaru’s economic importance. Subsequently, branches of trading companies and banks moved to the city, hotels opened to accommodate international traders, and Otaru became Hokkaido’s financial center. 


Japan’s top architects made the banking district around Ironai Street a showcase for modern architecture. In the 1930s, the street was lined with an impressive mix of Renaissance Revival, Art Deco, and early Modernist buildings. The local government invited Japan’s leading civil engineers to design modern infrastructure for the city, including breakwaters, waterworks, canals, and public parks that are still in use today.


Turning tides

In the 1960s, the main source of the nation’s energy shifted from coal to oil, and Otaru lost its status as a major coal shipping port. In the same decade, a plan was proposed to reclaim the canal that had fallen into disuse, demolish warehouses, and build new roads. A grassroots citizens’ movement arose to protect the canal, which was seen as a symbol of the city’s former glory. 


After years of debate, the city authorities modified the plan. Part of the canal was reclaimed in the 1980s, and a promenade was constructed along the remaining section of the canal to encourage people to return to the area. New businesses opened in the former warehouses, stores, and banks, and a burgeoning tourism industry developed to sustain the community and preserve the city’s heritage. The citizen-led movement influenced other cities across the country to consider how to balance development and preservation.

小樽的故事


小樽從一個小漁村成長為重要港口,乃至今日的日本文化遺產保護領軍者,當地居民扮演了重要角色。如果要將小樽故事譜寫成一部舞台劇,站在舞台最中央的一定是小樽居民。19世紀,漁民來到這個北部前哨地區,靠捕撈鯡魚求發財致富,從那時起,開拓精神就一直推動著小樽持續發展。

無產階級文學作家林多喜二(1903-1933)在小樽度過了青年時代,他所創作的許多長篇和短篇小說都以這裡為背景。林多喜二認為小樽是北海道的力量中心,稱這座城市為「北海道的心臟」。在他眼中,小樽不僅將島內廣闊內陸地區的物資輸送到全日本乃至全世界各地,同時也吸引了一批又一批移民到此追求新生活。


繁榮的浪潮

直到1865年,小樽還是一座僅有約300戶居民的小漁村。每年春天,鯡魚群會湧到小樽近岸海域產卵,北海道南部的漁民因此移居此地捕魚。大部分漁獲被加工成種植棉花和藍草(可製造靛藍染料)所需的肥料,然後木造商船沿日本海的海岸線,將它們送到本州西南部各地的港口和批發市場。

隨著捕撈技術的改進,鯡魚捕獲量也不斷增長。到1897年,當地鯡魚年產量已達約9萬公噸,有時甚至需要當地居民全員出動到海灘上幫忙卸載漁獲。20世紀中葉當地曾有紀錄,當時的漁獲量大到學校都要為此停課一天,好讓教師和學生家長能有時間幫忙運送鯡魚。

小樽的漁民們因此累積了豐厚財富,他們建起豪宅,配上來自大阪、京都和東京最流行的家居用品,平日裡還會經常光顧城市裡的高級餐廳和藝品店。


不斷發展的港口城市

明治政府(1868-1912)在19世紀晚期決定開發北海道,鼓勵大家移居這座資源豐富的北部島嶼,小樽很快成為了這一新開拓地區的樞紐。1882年,北海道第一條鐵路開通運行,火車將島內開採的煤炭送到小樽港。當時,煤炭是政府工業化的核心能源。

從1869年至1926年,大約有227萬人從日本各地遷入北海道尋求致富之道,其中許多人在小樽港登陸,有的便就地定居下來。到了1920年,小樽已經由漁村蛻變為一座人口逾10萬的繁華城市。


蓬勃的經濟

日俄戰爭(1904-1905)後,隨著連接薩哈林島(庫頁島)南部的全新貿易路線開通,小樽的經濟地位進一步提升。貿易公司和銀行紛紛來到這裡開設分支機搆,為了接待海外貿易商,新飯店也陸續開張,小樽逐步發展成了北海道的金融中心。

日本頂級建築師們將「色內大通」街道一帶的金融街變成了現代建築的伸展台。1930年代,街道兩旁的文藝復興建築、裝飾藝術建築和早期現代風格建築交相輝映,令人印象深刻。當地政府也邀請了全國頂尖的土木工程師,前來打造城市的現代化基礎設施,當時建造的防波堤、供水系統、運河和公園等設施直到今天仍在使用。


時代的變遷

1960年代,日本主要能源需求從煤炭轉向石油,身為煤炭運輸主要港口的小樽失去了昔日地位。也正是在這十年內,填埋運河、拆除倉庫、新建道路的計畫被提上議事日程。然而,由於運河一直被視為小樽昔日輝煌的象徵,民間掀起了一場守護運河的草根運動。

經過多年討論,市政當局修改了原有計畫。1980年代,部分運河被填平,同時在保留下來的河段建起一條沿河步道,吸引人們重回這一地區。舊倉庫、商鋪和老銀行建築內開起了新店舖,迅速興盛的旅遊業支撐起了城市永續發展,也保護了城市遺產。這場由市民引領的運動影響了全國各大城市,也引發了一場如何在發展與保護之間尋求平衡的討論。

小樽的故事


小樽故事的主人公无疑就是小樽市民。小樽从一个小渔村成长为重要港口,乃至发展成为如今日本的文化遗产保护领军者,小樽市民功不可没。19世纪,渔民来到这个北部开拓前哨地区,靠捕捞鲱鱼求发家致富,从那时起,开拓精神就一直推动着小樽不断发展。

无产阶级作家小林多喜二(1903-1933)在小樽度过了青年时代,他的许多长篇和短篇小说都以这里为舞台。小林多喜二称这座城市为“北海道的心脏”,在他看来,小樽是北海道的活力源泉,它将北海道岛内广袤平原地带的资源输送到全国乃至全世界,同时又吸引了一批又一批追求新生活的移民奔赴而来。


繁荣的浪潮

1865年的小樽还是一个仅有300户左右人家的渔村。每年春天,鲱鱼群会涌到小樽近岸海域产卵,北海道南部的渔民追逐而来,在此地定居下来。大部分渔获都被加工成种植棉花和蓝草(可制造靛蓝染料)所需的肥料,再由木制商船沿着日本海的海岸线送到本州岛西南部的各处港口和批发市场。

随着捕捞技术的改进,鲱鱼捕获量不断增长。到1897年,当地鲱鱼年产量已达9万吨左右,有时甚至需要本地居民全员出动到海滩上帮忙卸载渔获。20世纪中期的本地记录显示,当时的渔获量大到学校都要为此停课一天,好让教师和学生家长能有时间帮忙运送鲱鱼。

小樽的渔民们因此积攒下丰厚的财富。他们建起豪宅,配置来自大阪、京都和东京最时兴的居家设备,平日里还经常出入城内的高档餐厅和艺术品商店。


不断发展的港口城市

19世纪晚期,明治政府(1868-1912)决定开发北海道,并鼓励人们移居这座资源丰富的北部岛屿,小樽很快成为了这一新开拓地区的枢纽。1882年,北海道第一条铁路开通运行,火车将岛内开采的煤炭送到小樽港。当时,煤炭是政府工业化的核心能源。

从1869年至1926年,大约227万人口从日本各地来到北海道寻求发家致富之道,其中许多人都在小樽港登陆,有的就地定居下来。到了1920年,小樽已经由渔村发展成为了一座人口逾10万的繁华城市。


蓬勃的经济

日俄战争(1904-1905)后,连接萨哈林岛(库页岛)南部的全新贸易路线开通,小樽的经济地位进一步提升。贸易公司和银行相继来到这座城市开设分支机构,为接待海外贸易商,新的酒店纷纷开张,小樽成为了北海道的金融中心。

银行林立的“色内大通”街道一带,在日本顶级建筑师们手中化身为现代建筑的展示场。20世纪30年代,街道两旁的文艺复兴风格的建筑、装饰艺术风格的建筑和早期现代风格的建筑交相辉映,形成了一道亮丽的风景。当地政府邀请了全国顶尖的土木工程师,前来打造城市的现代化基础设施。当时建造的防波堤、供水系统、运河和公园等设施直到今天仍在使用。


时代的变迁

20世纪60年代,日本的国家主要能源需求从煤炭转向石油,身为煤炭运输主要港口的小樽失去了往日地位。也正是在这10年里,有关填埋小樽运河、拆除仓库、新建道路的计划被提上议事日程。然而,小樽运河象征着这座城市昔日的辉煌,一场守护运河的草根市民运动就此兴起。

经过长达数年的讨论,市政当局修改了原有计划。20世纪80年代,运河的一部分被填平,同时在保留下来的河段建起一条沿河步道,吸引人们重回这一地区。新的商业设施落户旧仓库、商铺和银行建筑内,迅速兴盛起来的旅游业支撑起了本地区的存续发展和城市遗产的保护。这场由市民引领的运动影响到全国各地的城市,引发了一场该如何在经济发展与文化遗产保护之间寻求平衡的思考。

오타루에 얽힌 스토리


 영화 ‘러브 레터(Love Letter)’의 무대이자 서울특별시 강서구와도 자매결연을 맺은 오타루에 얽힌 스토리의 중심은 이 도시의 시민들입니다. 오타루가 어촌에서 주요 무역 거점으로 변모했을 때 중심이 되었던 오타루 시민들은 현재 일본에서 사적 보호의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19세기에 청어로 부를 쌓기 위해 북쪽의 변방 지역으로 이주해 온 어부들을 비롯해 오타루는 개척자 정신에 의해 발전해 왔습니다.


 프롤레타리아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1903년~1933년)는 4살 때부터 오타루에서 지내며 이곳에서 소설과 단편의 토대를 만들었고 오타루를 ‘홋카이도의 심장’이라고 평했습니다. 고바야시는 광활한 홋카이도의 내륙에 있는 자원이 오타루에서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출하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이주자들이 끊임없이 오타루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이 도시를 홋카이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번영의 물결

 1865년 당시, 오타루는 300세대 정도로 이루어진 작은 어촌이었습니다. 매년 봄에는 오타루 앞바다 해역에 산란하는 청어 떼에 이끌려 홋카이도 남부에서 어부들이 오타루로 이주해 왔습니다. 잡은 물고기는 대부분 목화밭과 쪽밭에서 사용하는 비료로 가공되어 목조 상선을 통해 혼슈 남서부의 도매시장으로 수송되었습니다.


 어업 방법이 개선되면서 청어의 연간 어획량이 증가하여 1897년에는 10만 톤에 육박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지역 사회 전체의 협력을 받아 물고기를 어획했습니다. 20세기 중반의 현지 기록에 따르면 청어의 어획량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학교를 휴교하고 교사와 학생의 부모도 청어를 운반하는 일을 도왔던 시절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부 집안은 부를 축적해 오사카, 교토, 도쿄에서 들여온 최신식 집기를 갖춘 저택을 오타루에 지었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의 고급 레스토랑과 미술품 가게에도 자주 방문했습니다.


성장을 이룩한 항구 도시

 19세기 말에 이르러 메이지 정부(1868년~1912년)가 자원이 풍부한 북쪽 섬인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사람을 정착시키기로 하면서 오타루는 새로운 세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882년에는 내륙의 광산에서 오타루 항구로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홋카이도 최초의 철도가 개통되었고 석탄 덕분에 정부가 추진하는 공업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1869년부터 1926년에 걸쳐 약 227만 명이 일확천금을 목표로 일본 각지에서 홋카이도로 이주해 왔으며, 이들 대부분이 오타루에 상륙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대로 오타루에 정착했고 어촌이었던 오타루는 1920년까지 인구 1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습니다.


급성장하는 경제

 러일 전쟁(1904년~1905년) 후, 가라후토(현재의 사할린) 남부까지 가는 새로운 통상로가 열리며 오타루는 경제적으로 점점 중요한 도시가 되어 갔습니다. 그 후 무역 회사와 은행의 지점이 이 도시로 이전해 오고, 해외에서 오는 무역상의 숙박 시설로서 호텔이 문을 열면서 오타루는 홋카이도의 금융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일본 일류 건축가들의 작업을 통해 이로나이 거리 주변의 은행 지구는 근대 건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르네상스 리바이벌 양식, 아르데코, 근세 초기가 훌륭하게 어우러진 건축물들이 이 거리에 늘어서 있었습니다. 지방자치단체는 일본 국내 최고 수준의 토목 기사를 초청하여 방파제, 정수장, 운하, 공공 공원 등 근대 인프라 설계를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공공시설들은 현재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

 1960년대에 이르러 국가의 에너지 주류가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가면서 오타루는 석탄 선적항으로서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이 무렵에는 사용하지 않게 된 오타루 운하를 매립하고 창고를 철거하여 새로운 도로를 만드는 계획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도시의 옛 영광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오타루 운하를 지키기 위해 시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노력으로 수년에 걸친 논의 끝에 시 당국이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1980년대에 오타루 운하의 일부를 매립했지만, 다시 사람들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오타루 운하의 남은 부분을 따라 산책로를 건설했습니다. 지역 사회를 유지하고 이 도시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과거 창고, 상점, 은행이었던 곳에서 새로운 사업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급성장하고 있는 관광 산업이 더욱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시민 주도의 운동이 일본 각지에 영향을 미치며 도시 발전과 사적 보호의 균형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小樽にまつわるストーリー


 映画「Love Letter」の舞台であり、ソウル特別市江西区とも姉妹都市提携を結ぶ小樽のストーリーの中心は、この町の市民です。小樽が漁村から主要な貿易拠点へと変遷した際に中心となった小樽市民は、現在では史跡保護における日本のリーダーになっています。19世紀にニシンで財を成すために北の辺境地に移住してきた漁師をはじめとして、小樽は開拓者精神により突き動かされてきました。


 プロレタリア作家の小林多喜二(1903年–1933年)は4歳から小樽で過ごし、ここで小説や短編の土台を作って小樽を「北海道の心臓」と評しました。小林は、広大な北海道の内陸にある資源が小樽から日本のみならず世界中に出荷されること、そして新たな人生を始めようとする移住者が小樽に絶え間なく入ってくることから、この町を北海道の原動力と考えていました。


繫栄の波

 1865年当時、小樽は300世帯ほどの小さな漁村でした。毎年春になると、小樽沖の海域に放卵するニシンの大群に惹かれて、北海道南部から漁師が小樽に移住してきました。獲った魚のほとんどは、綿畑や藍畑で使用する肥料に加工され、木造商船で本州南西部の卸売市場に輸送されていました。


 漁業の手法が改善されたことによりニシンの年間漁獲量は増えていき、1897年には、10万トンに迫るほどになりました。時には地域社会全体の協力を得て魚の水揚げを行っていました。20世紀半ばの地元の記録によると、ニシンの漁獲量が非常に多かったので学校を休みにし、先生や生徒の親もニシンを運ぶのを手伝っていた時代もありました。


 漁師の家は財を成し、大阪、京都、東京から取り寄せた最新の調度品を備えた豪邸を小樽に建てました。彼らはこの街の高級レストランや美術品店にも足繫く通いました。


成長を遂げた港町

 19世紀の終わりになると、明治政府(1868年–1912年)が資源の豊富な北の島である北海道を開拓し、人を定住させることを決め、小樽は新天地の中心となりました。1882年には、内陸の鉱山から小樽港に石炭を輸送するために北海道初の鉄道が開通し、石炭のおかげで政府による工業化が加速しました。


 1869年から1926年にかけておよそ227万人が一攫千金を目指し、日本各地から北海道に移住してきましたが、その多くが小樽港に上陸しました。一部の人たちはそのまま小樽に定住し、漁村であった小樽は1920年までに人口10万人を超える大都市へと成長しました。


急成長する経済

 日露戦争(1904年–1905年)後、樺太(現在のサハリン)の南部までの新たな通商路が開通し、小樽は経済的にますます重要な都市になっていきました。その後、貿易会社や銀行の支店がこの町に移転し、海外からやって来る貿易商の宿泊施設としてホテルが開業し、小樽は北海道の金融の中心となりました。


 日本の一流建築家の手により、色内通周辺の銀行地区は近代建築の象徴となりました。1930年代にはルネッサンス・リバイバル様式、アールデコ、近世初期が見事に融合した建築物がこの通りに立ち並んでいました。地元自治体は国内トップレベルの土木技師を招き、防波堤、浄水場、運河、公共公園などの近代インフラ設計を要請しました。これらの公共施設は現在も使用されています。


時代の変化

 1960年代になると、国のエネルギーの主流が石炭から石油へと移り代わり、小樽は石炭の積み出し港としての地位を失いました。その頃には使われなくなった小樽運河を埋め立て、倉庫を取り壊し、新しい道路を作る計画が持ち上がりました。この町のかつての栄光のシンボルと考えられていた小樽運河を守るため、市民運動が起こりました。


 そのかいあって、数年に及ぶ話し合いの末、市当局が計画を修正しました。1980年代に小樽運河の一部を埋め立てましたが、また人々がここに戻ってきてくれるよう、小樽運河の残った部分に沿って遊歩道を建設しました。地域社会を維持するために、そしてこの町の遺産を守るために、かつて倉庫や商店や銀行だったところで新たな事業が開業されました。そして急成長している観光産業がさらなる発展をとげました。この市民主導の動きが日本各地に影響を及ぼし、都市の発展と史跡保護のバランスについて考えるきっかけ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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