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六軒茶屋跡

  • 山口県
ジャンル:
史跡・城跡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アプリ・QRコード等
ワード数:
251-500
作成年度:
2023年
地域協議会名:
やまぐち萩往還語り部の会

Rokken-jaya Tea Houses Site


The Rokken-jaya Tea Houses were a place for travelers to rest on journeys between the old provinces of Suo and Nagato in the Choshu domain (modern-day Yamaguchi Prefecture). There were six farmhouses at Rokken-jaya (which means, literally, six tea houses), and they were the only houses for several miles on either side of the steep Itado mountain pass. The residents of these farmhouses accommodated travelers with a place to rest and served them refreshments.


In the early seventeenth century, the rulers of the Choshu domain, the Mori family, developed a highway between their residence at Hagi Castle, on the Sea of Japan coast, to Mitajiri, a port town on the Seto Inland Sea coast. The highway, known as the Hagi Okan, was used for transport and trade and by the lords of Choshu for their journeys to the capital Edo (modern-day Tokyo). From 1635, the lords spent alternate years in the capital as part of the practice of alternate attendance (sankinkotai) enforced by the Tokugawa shogunate. They traveled with their retainers in vast processions along the Hagi Okan to fulfill this obligation.


The Rokken-jaya became a designated rest area (okagotateba) for the lord and his entourage on journeys to and from Edo. There were six of these between Hagi and Mitajiri, and facilities were constructed for the lord and his highest-ranking retainers at each site. At the Rokken-jaya site, there is a partial reconstruction of a building used by the lord. In front of the entrance is a small, roofed structure with space to store two palanquins, or kago. The lord was carried in one of the palanquins by four to six bearers. The second palanquin was a spare.


The lord’s entourage numbered around 1,000 members and included retainers, bodyguards, and servants. They carried many heavy items such as chests packed with clothes and other necessities. Historical records indicate that a large iron plate the size of a futon mattress was among the heaviest items transported. It is thought that this was placed under the lord’s bedding to guard against attacks from beneath the flooring while he slept.

六軒茶屋遺址


六軒茶屋曾是往來於長州藩(今山口縣)內「周防國」和「長門國」(「國」是日本古代行政區劃,有別於「國家」)之間的旅行者的休息場所。六軒茶屋由六間農舍組成,是陡峭的板堂峠(音同關卡的「卡」)兩側數公里內唯一的人家。因此,這處農舍的居民曾經為旅行者提供休息場所以及茶點。

17世紀早期,長州藩藩主毛利家修建了一條道路,將日本海沿岸的居所萩城(萩,音同「秋」)和瀨戶內海沿岸的港口城市三田尻連接起來,稱之為「萩往還之路」。這條路除了被用於運輸和貿易,還是長州藩藩主前往江戶(今東京,當時的政治中心)的必經之路。長州藩藩主因德川幕府的「參勤交代」制度,須每隔一年在萩城和江戶兩地交替居住。為了履行義務,藩主與眾多家臣整列成浩浩蕩蕩的隊伍,沿著萩往還之路行進。

六軒茶屋是藩主及其隨從往返江戶途中的指定休息場所,被稱為「御駕籠建場」。在萩城和三田尻之間有6處這樣的地方,每一處都為藩主及其最高級別的家臣建造了休憩之地。六軒茶屋遺址上就有部分重建的藩主專用建築,入口前方有一座帶屋頂的小棚,可以停放兩頂轎子。藩主乘坐其中一頂,配備4至6名轎夫,另一頂則是備用轎子。

藩主的隨從約有1000人,包括家臣、侍衛和僕人。他們抬著許多沉重的物品,比如裝滿衣服和其他必需品的箱子等。根據歷史文獻記載,在這些重物中,有一塊日式褥子大小的大鐵板。據推測,它應該是一塊為確保藩主就寢安全的防刺板,墊在藩主的被褥下面,以阻擋來自地舖下方突襲。

六轩茶屋遗址


六轩茶屋曾是长州藩(今山口县)内“周防国”和“长门国”(“国”是日本古代行政区划,有别于“国家”)之间的旅途休憩点。六轩茶屋由六间农舍组成,是陡峭的板堂峠(音同关卡的“卡”)两侧数公里内唯一的人家。因此,这处农舍的居民曾经为旅行者提供休息场所以及茶点。

17世纪早期,长州藩藩主毛利家族修建了“萩往还之路”,这条道路连接了位于日本海沿岸的居所萩城(萩,音同“秋”)和濑户内海沿岸的港口城市三田尻。除了被用于运输和贸易,萩往还之路还是长州藩藩主前往江户(今东京,当时的政治中心)的必经之路。因德川幕府的“参勤交代”制度,长州藩藩主不得不每隔一年在萩城和江户两地交替居住。为了履行此义务,藩主与众多家臣组成浩浩荡荡的队伍,沿着萩往还之路而行。

六轩茶屋是藩主及其随从往返江户途中的指定休息场所,被称为“御驾笼建场”。在萩城和三田尻之间有6处这样的地方,每一处都为藩主及其最高级别的家臣建造了休憩设施。六轩茶屋遗址上就有部分重建的藩主专用建筑。入口前方有个带屋顶的小棚,可以停放两顶轿子。藩主乘坐其中一顶,配备4至6名轿夫,另一顶则是备用轿子。

藩主的随从约有1000人,包括家臣、侍卫和仆人。他们抬着许多沉重的物品,比如装满衣服和其他必需品的箱子等。根据历史文献记载,在这些重物中,有一块日式褥子大小的大铁板。据推测,它应该是一块防刺板,垫在藩主被褥下面,阻挡来自地铺下方的突袭,以确保藩主就寝安全。

롯켄자야 옛터


롯켄자야는 조슈 번이 거느렸던 스오노쿠니와 나가토노쿠니(두 지역 모두 지금의 야마구치 현)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의 휴식처였습니다. 과거 롯켄자야(六軒茶屋, 6채의 찻집이라는 뜻)에는 6채의 농가가 있었는데, 급경사 구간인 이타도 고개의 인근 수 킬로미터 이내에 집이 있던 지역은 이곳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곳의 농가 주민들이 여행자들에게 휴식의 장소와 가벼운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17세기 초, 조슈 번을 다스리던 모리 가문에 의해 일본해 연안의 모리 가문이 거주하던 하기 성에서 세토 내해 연안의 항구 도시인 미타지리를 연결하는 가도가 정비되었습니다. 하기오칸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이 가도는 수송과 거래에 사용되었으며, 조슈 번의 번주가 에도(지금의 도쿄)로 이동할 때 이용했던 도로였습니다. 1635년 이후, 조슈 번의 번주는 도쿠가와 막부에서 명한 산킨코타이 제도(각 번의 영주를 정기적으로 에도에 머물게 하는 제도)를 위해 격년으로 에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번주는 이 같은 의무를 이행하고자 가신들을 거느리고 거대한 행렬을 이루며 하기오칸의 여정길에 올랐습니다.


롯켄자야는 번주와 그의 종자들이 에도와 하기를 오갈 때 이용했던 지정 휴게소(‘가마 역참’)였습니다. 하기와 미타지리 사이에는 6개의 가마 역참이 있었는데, 각각 번주와 고위급 가신들을 위한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롯켄자야 옛터에는 번주가 이용했던 곳을 일부 재건한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번주는 4~6명의 가마꾼이 메는 가마를 탔으며, 예비 가마까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건물 입구 정면에는 이 두 가마를 보관하기 위해 지붕을 올린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번주의 종자는 가신, 호위 무사, 하인까지 1,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옷가지나 그 밖의 일반용품을 담은 수납함 등 무거운 짐을 다수 운반했습니다. 역사 문헌에 따르면 운반한 무거운 짐에는 바닥에 까는 이불 크기의 거대한 철판도 있었습니다. 이 철판은 번주가 사용하는 이불 밑에 깔아두어 취침 중에 마루바닥 아래에서 번주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六軒茶屋跡


六軒茶屋は長州藩が治める周防国と長門国(いずれも現在の山口県)の間を旅する旅人の休憩の場でした。昔、六軒茶屋(6軒の茶屋という意味)には6軒の農家があり、急こう配の板堂峠の前後数キロの間で家があったのはここだけでした。そこで、この農家の住民が旅人に休憩の場を提供し、軽食を出していました。


17世紀の初めに、長州藩を統治していた毛利家により、日本海沿岸にある毛利家の居城、萩城から瀬戸内海沿岸の港町である三田尻までつながる街道が整備されました。萩往還として知られるこの街道は、輸送や取引に使用され、また長州藩主が江戸(現在の東京)へ向かう際にも利用されました。1635年以降、長州藩主は、徳川幕府より課された参勤交代制度(各藩の領主を定期的に江戸に滞在させる制度)のために、隔年で江戸に出向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藩主は、この義務を果たすため、家臣を伴い、大行列を成して、萩往還を旅しました。


六軒茶屋は、藩主とその従者が江戸との間を往復するときに利用する、指定の休憩場所(「駕籠建場」)でした。萩と三田尻の間には6つの駕籠建場があり、それぞれ藩主とその最高位の家臣のための施設が建てられていました。現在、六軒茶屋跡には、藩主が利用していた建物を一部再建したものが残っています。藩主は、4人から6人の担ぎ手が担ぐ駕籠に乗っており、予備の駕籠も用意されていました。建物の入り口正面には、これら2つの駕を置くための小さな屋根付きの場所が設けられています。


藩主の従者は、家臣、護衛、使用人など、約1,000人から成り、衣類やその他日用品が詰められた収納箱など、数多くの重い荷物を運びました。歴史的文献によると、その重い荷物の中には、敷布団ほどの大きさのある巨大な鉄板もありました。これは、藩主が使う布団の下に敷いておき、就寝中に床の下で藩主を暗殺しようとする試みを防ぐためのものであったと考えら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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