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菊池武光の墓

  • 熊本県
ジャンル:
史跡・城跡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ワード数:
251-500
作成年度:
2023年
地域協議会名:
菊池市

Tomb of Kikuchi Takemitsu


Kikuchi Takemitsu (1319–1373) was the fifteenth head of the Kikuchi clan, its greatest war hero, and an influential reformer under whom the clan evolved from a local samurai group into the most powerful political force in Kyushu.

Troubled beginnings

When Takemitsu was 14 years old, his father, Taketoki (1292–1333), the twelfth leader of the clan and a sworn ally of Emperor Godaigo (1288–1339), was killed while leading a failed assault in Hakata (present-day Fukuoka) on forces loyal to the Kamakura shogunate, the warrior-led government that ruled Japan at the time. The Kamakura shogunate was toppled only months later, triggering a period of instability during which the imperial court and proponents of warrior rule vied for control of the country.

As a result of this power struggle, the imperial court split into two in 1336. The Kikuchi remained loyal to Godaigo, whose Southern Court was opposed by the warrior-backed Northern Court, but were defeated in several battles against the Northern forces. Two of Takemitsu’s older brothers headed the Kikuchi clan after their father, but one died young and the other was forced to resign his position. By 1344, when Takemitsu’s turn came to lead the clan, the Kikuchi were severely weakened and surrounded by enemies.

Takemitsu’s rise

Takemitsu endeavored to bring the Kikuchi into a new era. To strengthen the Kikuchi base of power, he carried out administrative reforms in the clan’s heartland around the castle town of Waifu (now central Kikuchi). His policies included creating the Kikuchi Gozan (Five Temples) system by placing five Zen temples in Waifu under special protection. In return, these temples served the Kikuchi by performing various administrative, supervisory, and religious duties.

On the political front, Takemitsu joined forces with Prince Kanenaga (also known as Kaneyoshi; 1329–1383), the son of Emperor Godaigo, who had been sent to Kyushu to build an alliance between the Southern Court and local warrior groups. The backing of royalty allowed Takemitsu to expand his clan’s territory and influence, and some 15 years after being named lord of the Kikuchi, he had assembled a powerful coalition from across Kyushu.

Conquest and collapse

In 1359, some 40,000 warriors led by Takemitsu and Prince Kanenaga defeated a force of around 60,000 Northern Court loyalists at the Battle of Chikugo River, near the present-day city of Kurume. This decisive victory allowed the Kikuchi-led alliance to take control of Kyushu and made Takemitsu perhaps the most powerful man on the island.

In the years following their victory, the Kikuchi set out to fortify their positions; however, a request from the Southern Court that the victorious Kyushu leaders visit the emperor in Yoshino (near Nara) ended in disaster. A fleet commanded by Takemitsu set sail from Kyushu but was intercepted and routed by a Northern force. The Northern side then dispatched a new general, the renowned strategist Imagawa Ryoshun (1326–1420), to deal with the threat in Kyushu.

In 1372, Ryoshun drove the Kikuchi-led forces from the Hakata region, and Takemitsu had no choice but to regroup further south. In 1373, as the Kikuchi were fortifying their positions around the Chikugo River, the site of their earlier triumph, Takemitsu suddenly died under unknown circumstances.

Left without its greatest general, the Southern force led by Prince Kanenaga was pushed ever deeper into Kyushu. Kanenaga’s death in 1383 ended the Southern resistance for good, and the Kikuchi were again confined to their ancestral lands around Waifu.

Takemitsu’s tomb

Kikuchi Takemitsu was buried at Shokanji, a temple he had founded after becoming head of the clan. According to legend, the giant camphor tree towering over the tomb was planted during Takemitsu’s funeral. The current headstone was erected in 1779 by wealthy Waifu residents and stands on a distinctive base in the shape of a Chinese mythological creature with the features of a turtle and a snake. This style was popularized among high-ranking samurai in Japan in the 1700s.

菊池武光之墓


菊池武光(1319-1373)為菊池家第15代家主,他是該家族戰功最顯赫的領袖,也是深具影響力的改革者。在他的統帥下,菊池家從地方家族武士團體發展成全九州最強大的政治勢力。


動蕩不安的開端

菊池武光的父親菊池武時(1292-1333)為家族第12代家主,也是後醍醐天皇(1288-1339)的忠實盟友。在菊池武光14歲時,菊池武時出兵襲擊鐮倉幕府(1185-1333)駐紮在博多(今福岡)的前哨組織時失敗被殺。短暫幾個月後,統治全國的武士政權鐮倉幕府被推翻,繼而引發了後醍醐天皇派與武士政權擁護派之間的權力爭鬥,日本從此陷入了一段動盪不安的時期。

1336年,這場鬥爭使日本一分為二。菊池家效忠後醍醐天皇建立的南朝,但在與武士派的北朝軍隊爭戰中屢屢戰敗。菊池武光的兩位兄長相繼接任家主之位,但其中一人英年早逝,另一人被迫辭去家主之位。1344年菊池武光成為家主時,菊池家已孱弱無力,腹背受敵。


菊池武光的崛起

菊池武光奮力引領家族邁入新時代。為了強化家族權力,菊池武光以家族所在的隈府(今菊池市中心)為中心進行改革,其中一項是創建「菊池五山」制度,就是將隈府的5座禪寺列入家族保護之下,作為回饋,這5座禪寺為其履行各種行政、監督與宗教職責。

在政治方面,適逢後醍醐天皇之子懷良親王(1329-1383)前來九州游説當地武士軍團建立聯盟,菊池武光遂與其締結同盟。有了南朝的支持,菊池家的領地與影響力不斷擴大。在就任家主之位後的第15年,菊池武光建立了由九州各地家族軍團組成的強大聯軍。


征服與鎩羽

1359年,在如今的久留米市近郊的築後川之戰中,菊池武光與懷良親王率領約4萬名武士一舉擊敗北朝6萬大軍。取得此決定性勝利後,以菊池家為中心的聯盟征服了整個九州地區,菊池武光也成為九州最具權勢之人。

戰勝後數年間,菊池家計劃開始鞏固自身地位。當時,南朝要求獲勝的九州各家族領袖前往鄰近奈良的吉野覲見天皇,卻不想因此遭遇飛來橫禍。菊池武光率領的艦隊自九州啟航後,遭到北朝軍隊攔截並被擊潰。之後北朝又調派了一位新將軍來應對九州的威脅勢力,他就是著名戰略家今川了俊(1326-1420)。

1372年,菊池武光統領的聯軍被今川了俊趕出博多地區,菊池武光別無選擇,只能退至南方集結。1373年,菊池軍隊在當年取得大勝的築後川周圍加固陣地時,菊池武光突然去世,死因不明。

失去了最強大的將軍後,由懷良親王率領的南朝軍隊節節敗退,一路撤至九州內陸。1383年,懷良親王逝世,菊池家完全放棄抵抗,再次退居祖傳領地「隈府」一帶。


菊池武光墓

菊池武光被安葬於其成為家主後建造的正觀寺內。根據傳說,陵墓上高聳的巨大樟樹為葬禮時所植。現存的墓碑由隈府富有的居民於1779年捐修,碑下的底座是中國神話中的馱碑獸贔屭(音同「碧細」)。贔屭是龍生九子之一,螭首龜身,因此這種底座又叫「龜趺」,在中國只有位居高官者才允許在墓碑上使用。傳入日本後,龜趺在18世紀的日本高級武士之間非常流行,一些大名(大領主)之墓也採用這種式樣的墓碑。

菊池武光之墓


菊池武光(1319-1373)是菊池家族的第15代家主,也是该家族战功最卓著的领袖,同时还是一位影响深远的改革者。在他的带领下,菊池家族从一个地方家族军团发展成为全九州最强大的政治力量。


风雨飘摇的开局

菊池武光的父亲、第12代家主菊池武时(1292-1333)是后醍醐天皇(1288-1339)的盟友。菊池武光14岁时,其父在出兵袭击镰仓幕府(1185-1333)驻扎在博多(今福冈)的前哨机构时战败身亡。短短几个月后,统治全国的武士政权镰仓幕府被推翻,继而触发了后醍醐天皇派和武士政权拥护派之间争夺国家控制权的纷争,日本历史从此陷入了一段动荡时期。

这场权力争斗导致1336年天下一分为二。菊池家族坚持效忠后醍醐天皇建立的南朝,但在与武士派的北朝军队的战斗中屡屡败北。菊池武光的两个哥哥相继担任家主,然而一个英年早逝,一个被迫卸任。待到1344年菊池武光成为家主时,菊池家族已经腹背受敌,孱弱不堪。


菊池武光的崛起

菊池武光竭尽全力将菊池家族带入新时代。为巩固家族势力,他以家族所在的隈府(今菊池市中心)为中心开展行政改革。其中一项是创建“菊池五山”制度,就是将隈府的5座禅寺纳入家族保护之下,作为回报,这些寺院为菊池家族履行行政、监督和宗教职责。

政治方面,菊池武光与前来游说九州武士家族结盟的后醍醐天皇之子怀良亲王(1329-1383)缔结了同盟。有了南朝支持,菊池一族的领土和影响力大增。在就任家主15年后,菊池武光建立起了由九州各地家族军团共同组成的强大联军。


征服与溃败

1359年,在现在的久留米市近郊发生的筑后川之战中,菊池武光和怀良亲王率领约4万人击败了北朝约6万大军。取得这一决定性的胜利后,以菊池家族为中心的同盟征服了九州全境,菊池武光也成为九州地区最有权势的人。

胜利后数年间,菊池家族正待巩固阵地。彼时,南朝朝廷要求获胜的九州各家领袖前往奈良附近的吉野觐见天皇,不料因此招来横祸。菊池武光指挥的舰队从九州启航后遭遇北朝军队拦截,不敌溃退。随后,北朝又派遣了一位新将军来对付九州的威胁,他就是著名战略家今川了俊(1326-1420)。

1372年,菊池武光率领的联军被今川了俊逐出博多周边,只能退至南方重新集结。1373年,菊池军正在当年取得大胜的筑后川周边加固阵地,菊池武光突然去世,死因不明。

失去最强大的将军后,由怀良亲王率领的南朝军节节败退,一路撤到了九州腹地。1383年,怀良亲王去世,菊池家族彻底放弃抵抗,再次退居祖传领地“隈府”一带。


菊池武光之墓

菊池武光被葬于他就任家主后建造的正观寺里。墓地上方有一株巨樟为其遮护,相传是葬礼时所植。现存墓碑于1779年由隈府富户捐修,下方有中国神话中的驮碑兽赑屃(音同“碧细”)底座。赑屃是龙生九子之一,螭首龟身。这种底座又名“龟趺”,在中国只有高官墓碑才可使用。传入日本后,龟趺在18世纪的日本高级武士中非常流行,一些大名(大领主)之墓也采用这种形制的墓碑。

기쿠치 다케미쓰의 묘


 기쿠치 다케미쓰(1319-1373)는 기쿠치 가문의 15대 영주이며, 일족 가운데 전쟁에서 가장 공을 많이 세웠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기쿠치 가문 일족이 지방의 무사단에서 시작하여 규슈의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발전한 계기가 된 영향력이 있는 개혁자입니다.


고난의 시작

 다케미쓰가 14세일 때 고다이고 천황(1288-1339)의 전우였던 아버지, 12대 영주 다케토키(1292-1333)가 하카타(현재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서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의 지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전사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불과 몇 개월 후에 무너졌고, 조정과 무사들이 지배 세력의 지지자가 국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싸우는 불안정한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 투쟁의 결과, 1336년에 조정은 2개로 분열되었습니다. 기쿠치 가문은 고다이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고다이고 천황이 이끄는 남조는 무사들이 지지하는 북조에 대항하였으나, 북조군과의 몇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다케미쓰의 두 형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쿠치 가문을 이끌었지만 한 명은 요절하였고, 다른 한 명은 사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1344년에 다케미쓰가 일족을 이끄는 차례가 됐을 때는 기쿠치 가문의 세력이 약해졌고, 적들에게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다케미쓰의 대두

 다케미쓰는 기쿠치 가문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려고 했습니다. 일족의 중심지였던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인 와이후(현재 기쿠치시 중심부)를 중심으로 행정 개혁을 시행하여 기쿠치 세력의 기반을 공고히 했습니다. 다케미쓰가 펼친 정책 중 하나로 와이후에 있는 선종 사원 5곳을 특별 보호 하에 두는 기쿠치고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보답으로 해당 사원은 다양한 행정, 감독, 종교적 임무를 수행해 기쿠치 가문을 섬겼습니다.

 정치면에서 다케미쓰는 고다이고 천황의 황태자였던 가네나가 친왕(懐良, ‘가네요시’ 라고도 함, 1329-1383)과 손을 잡았습니다. 가네나가 친왕은 남조 및 현지 무사단과의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 규슈에 파견된 상태였습니다. 조정의 지원으로 다케미쓰는 일족의 영토와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기쿠치 가문의 영주가 된, 약 15년 후에는 규슈 각지의 무사단으로 강력한 연합군을 결성했습니다.


정복과 붕괴

 1359년, 다케미쓰와 가네나가 친왕이 이끌던 무사 약 4만 명이 현재 구루메시 근교의 지쿠고 강 전투에서 북조군 약 6만 명을 무찔렀습니다. 이 결정적인 승리로 기쿠치 동맹은 규슈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다케미쓰는 규슈에서 당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몇 년간 기쿠치 가문은 진지를 강화하려고 했지만, 남조 측에서 승리한 규슈의 무사들에게 (나라와 가까운) 요시노의 천황을 방문하라는 요청이 있었고, 이는 재앙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다케미쓰가 지휘하는 함대는 규슈에서 출항했지만, 북조군에게 공격을 당해 패주했습니다. 또한 북조는 규슈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뛰어난 참모로 유명한 새로운 장군 이마가와 료슌(1326-1420)을 파견했습니다.

 료슌은 1372년에 기쿠치군을 하카타 주변에서 추방했고, 다케미쓰는 더욱 남쪽에서 군을 재편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373년, 기쿠치 세력이 이전에 승리를 거둔 지쿠고 강 주변에서 진지를 강화하고 있을 때, 다케미쓰는 갑작스럽게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최강의 장군을 잃은 가네나가 친왕이 이끄는 남조군은 적의 공격으로 규슈의 후미진 곳까지 몰렸습니다. 1383년에 가네나가가 사망하자 이러한 저항은 끝을 맞이했고, 기쿠치 가문의 세력은 다시 선조의 땅인 와이후 주변에 틀어박히게 되었습니다.


다케미쓰의 묘

 기쿠치 다케미쓰는 영주가 된 후 창건한 쇼칸지 절에 모셔졌습니다. 묘 위에 우뚝 솟은 거대한 녹나무는 다케미쓰의 장례식 때 심어졌다고 전해집니다. 현재 묘비는 1779년에 와이후의 유지가 세운 것으로, 거북이와 뱀을 조합한 중국의 신화 속 생물의 형태를 한 독특한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는 1700년대 일본 상급 무사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양식입니다.

菊池武光の墓


 菊池武光(1319-1373)は、菊池氏の15代当主であり、一族最大の戦功者としても知られます。同一族が地方の武士団から九州で最も強力な政治勢力へと発展するきっかけとなった、影響力のある改革者です。


苦難の始まり

 武光が14歳のとき、後醍醐天皇(1288-1339)の盟友であった父・12代当主武時(1292-1333)が博多(現在の福岡県福岡市)で当時の日本を支配していた武家政権である鎌倉幕府の出先機関を襲撃して失敗し、戦死しました。鎌倉幕府はわずか数ヵ月後に倒され、朝廷と武家支配の支持者が国の支配権をめぐって争う不安定な時代が始まったのです。

 この権力闘争の結果、1336年に朝廷は2つに分裂。菊池氏は後醍醐天皇に忠誠を誓い、後醍醐天皇が率いる南朝は武士が支持する北朝に対抗しましたが、北朝軍との数度の戦いで敗れました。武光の2人の兄が父の後を継いで菊池氏を率いましたが、1人は若くして亡くなり、もう1人は辞職を余儀なくされました。1344年に武光が一族を率いる番になったときには、菊池氏は弱体化し、敵に囲まれている状態にありました。


武光の台頭

 武光は菊池氏を新しい時代へと導こうとしました。一族の中心地であった城下町の隈府(現在の菊池市中心部)を中心に行政改革を行い、菊池勢力の基盤を固めました。彼の政策のひとつに、隈府の5つの禅寺を特別の保護下に置く菊池五山制度の制定があります。その見返りとして、これらの寺院は様々な行政、監督、宗教的任務を遂行して菊池氏に仕えました。

 政治面では、武光は後醍醐天皇の皇子である懐良(かねなが)親王(「かねよし」とも;1329-1383)と手を組みました。懐良親王は、南朝と地元の武士団との同盟を築くために九州に派遣されていました。朝廷の支援により、武光は一族の領土と影響力を拡大し、菊池氏の当主となってから約15年後には、九州各地の武士団からなる強力な連合軍を結成しました。


征服と崩壊

 1359年、武光と懐良親王に率いられた約4万の武士が、現在の久留米市近郊で起こった筑後川の戦いで約6万の北朝軍を破りました。この決定的な勝利により、菊池同盟は九州全域を支配することになり、武光はおそらく九州で最も権力を持つ人物となりました。

 勝利後の数年間、菊池氏は陣地を固めようとしましたが、南朝方から勝利した九州の武士に(奈良に近い)吉野の天皇を訪問させるよう要請があり、これが災いを招くこととなります。武光が指揮する艦隊は九州から出航しましたが、北朝軍に迎撃され敗走。また、北朝は九州の脅威に対処するため、名参謀として名高い新たな将軍・今川了俊(1326-1420)を派遣しました。

 了俊は1372年に菊池軍を博多周辺から追放し、武光はさらに南で軍を再編成する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1373年、菊池勢が以前勝利を収めた筑後川周辺で陣地を固めていたとき、武光は突然、原因不明の死を遂げました。

 最強の将軍を失った懐良親王率いる南朝軍は、九州の奥深くまで攻め込まれました。1383年に懐良が死去するとその抵抗は終わりを告げ、菊池氏は再び祖先の土地である隈府周辺に閉じこもることになりました。


武光の墓

 菊池武光は、当主となった後に創建した正観寺に葬られました。墓の上にそびえ立つ巨大なクスノキは、武光の葬儀の際に植えられたと言い伝えられています。現在の墓石は、1779年に隈府の裕福な市民によって建てられたもので、亀と蛇を組み合わせた中国の神話上の生き物の形をした、特徴的な台座の上に立っています。この様式は、1700年代に日本の上級武士の間で広まった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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