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The Beginning of Yakusugi Logging

  • Kagoshima
Topic(s):
Nature/Ecology Villages/Towns $SETTINGS_DB.genreMap.get($item)
Medium/Media of Use:
Pamphlet
Text Length:
501-750
FY Prepared:
2020
Associated Tourism Board:
The Yakushima Environmental and Cultural Foundation
Associated Address:
Yakushima-cho Kumage-gun , Kagoshima

屋久杉伐採のはじまり

屋久杉は神木や神の化身として崇められ、製材のために伐採されること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このことは17世紀に屋久島の仏僧であり朱子学者でもある、泊如竹(1570-1655)が木材資源の経済的可能性を見抜き、島民を経済的苦境から救いだすために伐採を提案したことで変わりました。


江戸時代以前(1500年代)

十二世紀から十九世紀にかけて屋久島を含む九州南部を支配していた島津家は、1586年に屋久杉を他藩に売ることを禁止しました。1587年、武将豊臣秀吉(1536–1598)の命により、屋久杉の調査が行われました。


江戸時代(1603–1867)

島津氏の下に統治を行っていた薩摩藩は、その臣民に通常は米で納められる年貢を課していました。屋久島の土地は稲作に適していなかったため、島民は平木と呼ばれる屋久杉の屋根板で支払っていました。毎年約580万枚の屋根板の納入を要求する年貢は、島民の重荷となっていました。しかし、島民は杉は神々の領域に属するものだと信じており、山奥の杉を伐採することをためらったため、如竹は彼らの疑念を和らげようとしたのです。如竹は地元のお寺で法華宗派の修行を受け、その後、京都、大阪、江戸(現在の東京)、琉球王国(現在の沖縄)などで修行を積んできました。旅慣れて知識も豊富だった彼は、日本の他の地域で杉が高く評価されていることを知っていました。1640年に、彼は島津藩主に屋久杉の伐採を提案し、山々を巡礼して神々に祈りました。彼は戻り次第、村人たちに、彼が神々から木を伐採する許可を得たことを告げました。

さらなる安心感を得るために、村人たちは山の神々に伐採の許可を求める儀式を行いました。倒したい木に斧を立てかけ、夜の間に斧が倒れた場合は承認が拒否されたと解釈していました。彼らは、伐採の前にその木の根元に米や塩、焼酎を置き、神に許可を求めました。木が倒された後には、村人たちは切り株の上に枝を置いて木の魂を慰め、感謝の印として杉の苗木を植えました。

年貢を納めた後に残った平木は、米や麦、大麦、その他の必需品と交換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島津氏も大阪や京都でこの屋根板を売っており、それが島津家にかなりの収入をもたらしていました。如竹は島民の生活向上に貢献したことで現在も尊敬されており、彼の生誕地である安房にある墓は、長年にわたり村人によって大切に維持されてきました。


明治時代1868–1912)とその後

明治時代初頭、屋久島の森林はほぼ全てが国有化され、島民は木を伐採することを禁じられました。1899年から1920年までの間、彼らは共有林の返還を訴え続け、いくつかの訴訟を起こしましたが失敗に終わりました。薪を集めることも、炭を作ることもできず、村人たちは調理や暖房のための燃料を得ることにも苦労していました。1921年、農商務省はついに屋久島憲法として知られる政策の下、屋久島住民に国有林の一部を使用することを許可しました。


小杉谷集落

1920年代初頭に島民が森林を利用する権利を取り戻した結果、木材の伐採が再び盛んになりました。木材を安房集落の奥にある内陸の山々から運ぶためのトロッコ軌道が1923年に建設され、伐採者のためのベースキャンプとなる小杉谷が1924年に安房川上流に設置されました。移住してきた家族に対応するため、小中学校が建てられました。戦後の建設ブームの中、伐採活動が最盛期であった1960年には、133世帯540人もの人口がこのキャンプに住んでいました。やがてこの地域の屋久杉はほぼすべて伐採され、保護を求める声が高まり、1970年にこのベースキャンプは閉鎖されました。小杉谷は屋久島に設立され、後に木材や炭の産業が衰退していく中で放棄された二つの集落のうちの一つです。


屋久杉採伐的開端


過去很長一段時間裡,屋久杉被尊為神木和神的化身,很少被當成木材砍伐。直到17世紀,情況發生了改變,當時島上的僧人(同時也是朱子學者)泊如竹(1570-1655)預見了木材資源的經濟潛力,提出通過伐木讓島民擺脫經濟困境。


江戶時代之前(16世紀)

12世紀至19世紀,包括屋久島在內的九州南部都在島津家族控制之下。1586年,島津家族禁止屋久杉木材外銷至其他地區。1587年,統一日本的武將豐臣秀吉(1536-1598)下令對屋久杉進行調查。


江戶時代(1603-1867)

島津家族治下的薩摩藩臣民通常每年以白米支付稅款。由於屋久島的土地不適合種植水稻,島上居民使用被稱為「平木」的屋久杉木製作「屋根板」(鋪設在屋頂代替瓦片的木板)來交稅。他們每年需要交納總計約580萬片屋根板,這對島民來說是沉重的負擔。並且當時島上的居民認為深山中的屋久杉是神木,不敢輕易砍伐,泊如竹只能設法消除他們的顧慮。

泊如竹曾在當地一座法華宗寺廟修行,後來又在京都、大阪、江戶(今東京)和琉球國(今沖繩)學習。他遊歷廣泛、知識淵博,知道杉木在日本其他地方很有價值。1640年,他先是向島津藩領主提議砍伐屋久杉,然後上山朝聖,向神靈祈禱,回來後告訴村民,他已經從山神那裡得到了砍伐杉樹的許可。

為保萬無一失,每次砍伐前村民們會進行各種小儀式徵求山神的意見。他們把斧頭靠在待砍的樹上,一夜過後,如果斧頭倒地,那就表示未得到山神的認可;他們還把米、鹽和燒酒放在樹下請求山神同意;當大樹被砍倒後,他們又會把樹枝放在樹樁上,撫慰樹靈,並種上一株幼杉以示感激。

繳稅後,剩下的平木可以兌換大米、小麥、大麥及其他生活必需品。島津家族還在大阪和京都出售屋根板,為家族帶來了可觀的收入。島上居民不忘泊如竹為改善島民生活而做出的貢獻,至今仍對他萬分尊敬。他的墳墓就在其出生地——安房,數百年來一直得到村民精心維護。


明治時代(1868-1912)及以後

明治時代初期,屋久島的森林幾乎全部收歸國有,政府禁止島上居民前去砍伐。屋久島民持續不斷地呼籲歸還他們公共林地,並在1899年至1920年間提起了數次法律訴訟,但均以失敗告終。既不能撿柴,又無法燒炭,村民們連做飯和取暖的燃料都難以獲得。直到1921年,日本農商務省最終根據《屋久島憲法》的相關規定,允許屋久島居民使用部分國有林。


小杉谷村

自1920年代島民得以重入森林後,伐木業再次興起。1923年,島上修建了一條貨運鐵路用以將木材從安房村後的內陸山區運出。1924年又在安房川上游建立了伐木者的據點——小杉谷,並且為了讓移居在此的新住戶能安居,還興建了小學和國中。1960年正值戰後建設熱潮,也是伐木業鼎盛之時,當時此地居民多達133戶共540人。隨著該地區的屋久杉幾乎被砍伐殆盡,保護屋久杉的呼聲興起,小杉谷據點最終於1970年關閉。屋久島上現存兩處由於採伐和木炭工業衰落而被廢棄的定居地,小杉谷便是其中之一。

屋久杉采伐的开端


曾经很长一段时间里,屋久杉被尊为神木和神的化身,很少被当成木材砍伐。直到17世纪,情况发生了改变。当时岛上的僧人(同时也是朱子学者)泊如竹(1570-1655)预见了木材资源的经济潜力,提出通过伐木让岛民摆脱经济困境。


江户时代之前(16世纪)

12世纪至19世纪,包括屋久岛在内的九州南部都在岛津家族控制之下。1586年,岛津家族禁止屋久杉木材外销其他地区。1587年,统一日本的武将丰臣秀吉(1536-1598)下令对屋久杉进行调查。


江户时代(1603-1867)

岛津家族治下的萨摩藩臣民通常每年以大米支付税款。由于屋久岛的土地不适合种植水稻,岛上居民用被称为“平木”的屋久杉木制作“屋根板”(铺设在屋顶代替瓦片的木板)来交税。他们每年需要交纳总计约580万片屋根板,这对岛民来说是一个沉重的负担。并且当时岛上的居民认为深山中的屋久杉是神木,不敢轻易砍伐,泊如竹只能设法消除他们的顾虑。

泊如竹曾在当地一座法华宗寺庙修行,后来又在京都、大阪、江户(今东京)和琉球国(今冲绳)学习。他游历广泛、知识渊博,知道杉木在日本其他地方很有价值。1640年,他先是向岛津藩领主提议砍伐屋久杉,然后上山朝圣,向神灵祈祷,回来后告诉村民,他已经从神那里得到了砍伐杉树的许可。

为了万无一失,每次砍伐前村民们会进行各种小仪式征求山神的意见。他们把斧头靠在待砍的树上,一夜过后,如果斧头倒地,那就表示未得到神的认可;他们还把米、盐和烧酒放在树下请求神灵同意;当大树被砍倒后,他们又会把树枝放在树桩上,抚慰树灵,并种上一株幼杉以示感激。

缴税后,剩下的平木可以兑换大米、小麦、大麦及其他生活必需品。岛津家族还在大阪和京都出售屋根板,为家族带来了可观的收入。岛上居民不忘泊如竹为改善岛民生活而做出的贡献,至今仍对他崇敬万般。他的坟墓就在其出生地——安房,数百年来一直得到村民精心维护。


明治时代(1868-1912)及以后

明治时代初期,屋久岛的森林几乎全部收归国有,政府禁止岛上居民前去砍伐。屋久岛民持续不断地吁请归还他们公共林地,并在1899年至1920年间提起了几次法律诉讼,但均以失败告终。既不能捡柴,又无法烧炭,村民们连做饭和取暖的燃料都难以获得。直到1921年,日本农商务省最终根据《屋久岛宪法》的相关规定,允许屋久岛居民使用部分国有林木。


小杉谷村

20世纪20年代初,岛民得以重入森林,伐木业再次兴起。1923年,岛上修建了一条货运铁路用以将木材从安房村后的内陆山区运出。1924年又在安房川上游建立了伐木者的大本营——小杉谷,并且为让迁入户安居,还新建了小学和初中。1960年正值战后建设热潮,也是伐木业鼎盛之时,当时此地居民多达133户540人。随着该地区的屋久杉几乎被砍伐殆尽,保护屋久杉的呼声兴起,大本营最终于1970年关闭。屋久岛上有两处由于采伐和木炭工业衰落而被废弃的定居点,小杉谷便是其中之一。

야쿠스기 삼나무 벌채의 시작


야쿠스기 삼나무는 신성한 나무나 신의 화신으로 숭상받아 목재로 쓰기 위해 벌채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는 17세기에 야쿠시마 섬의 불교 승려이자 주자학자이기도 했던 도마리 조치쿠(1570~1655)가 목재 자원의 경제적 가능성을 알아보고 섬 주민들을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벌채를 제안하면서 바뀌었습니다.


에도 시대 이전(1500년대)

12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야쿠시마 섬을 포함해 규슈 남부를 지배했던 시마즈 집안은 1586년에 야쿠스기 삼나무를 다른 번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의 명에 따라 야쿠스기 삼나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에도 시대(1603~1867)

시마즈 씨가 통치했던 사쓰마번은 신민에게 연공을 부과했는데, 야쿠시마 섬의 토지는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쌀로 납부할 수 없어서 섬 주민들은 ‘히라기’라고 하는, 야쿠스기 삼나무로 만든 지붕 널을 바쳤습니다. 매년 약 580만 장의 지붕 널을 내야 했기 때문에 섬 주민들에게 무거운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섬 주민들은 삼나무가 신들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고 깊은 산속의 삼나무 벌채를 주저했기 때문에 조치쿠는 섬 주민들의 의심을 가라앉히려 했습니다. 조치쿠는 지역의 절에서 법화종 수행을 한 뒤, 교토, 오사카, 에도(현재의 도쿄), 류큐 왕국(현재의 오키나와) 등지에서 거듭 수행했습니다. 여행에 익숙하고 지식도 풍부한 조치쿠는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삼나무가 높게 평가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1640년에 조치쿠는 시마즈 번주에게 야쿠스기 삼나무 벌채를 제안하고 산들을 순례하며 신들에게 기도했습니다. 조치쿠는 돌아오자마자 마을 사람들에게 그가 신들로부터 나무를 벌채해도 된다는 허락을 얻었음을 알렸습니다.

더 안심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산신들에게 벌채 허락을 구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베려는 나무에 도끼를 기대어 세워놓고 밤 사이에 도끼가 넘어져 있으면 허락을 받지 못했다고 해석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벌채하기 전에 그 나무의 뿌리에 쌀과 소금, 소주를 놓고 신에게 허락을 구했습니다. 나무를 벤 다음에는 그루터기 위에 가지를 놓아두어 나무의 영혼을 위로하고, 감사의 표시로 삼나무 묘목을 심었습니다.

연공으로 바친 뒤에 남은 히라기는 쌀과 밀, 보리, 그리고 다른 필수품과 교환할 수 있었습니다. 시마즈 씨도 오사카와 교토에서 히라기를 팔았는데, 이것이 시마즈 집안에 상당한 수입이 되었습니다. 조치쿠는 섬 주민들의 생활 향상에 공헌하여 현재도 존경받고 있으며, 그가 태어난 안보에 있는 묘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마을 사람들이 소중히 유지해왔습니다.


메이지 시대(1868~1912)와 그 후

메이지 시대 초엽에 야쿠시마 섬의 삼림은 거의 대부분이 국유화되어 섬 주민들의 나무 벌채가 금지되었습니다. 1899년부터 1920년까지 섬 주민들은 공유림의 반환을 호소하며 몇몇 소송을 했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땔나무를 모으거나 숯을 만들 수도 없어서 마을 사람들은 조리와 난방에 필요한 연료를 얻기도 힘들었습니다. 1921년, 일본 농상무성은 마침내 야쿠시마 헌법으로 알려진 정책하에 야쿠시마 섬 주민에게 국유림 일부의 사용을 허가했습니다.


고스기다니 마을

1920년대 초엽에 섬 주민들이 삼림을 이용할 권리를 되찾은 결과, 목재 벌채가 다시 활발해졌습니다. 목재를 안보 마을 깊은 곳에 있는 내륙의 산들에서 운반하기 위한 삼림 궤도가 1923년에 건설되어, 벌목꾼들의 베이스캠프가 되는 고스기다니 마을이 1924년에 안보가와 강 상류에 만들어졌습니다. 이주해온 가족을 위해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지어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이 부흥함에 따라 많은 건설 자재가 필요해졌기 때문에 벌채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60년에는 133세대 540명이 이 마을에 살았습니다. 이윽고 이 지역의 야쿠스기 삼나무가 거의 다 벌채되자 나무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고스기다니 마을은 1970년에 폐쇄되었습니다. 고스기다니는 야쿠시마 섬에 설립되어 나중에 목재와 숯 산업이 쇠퇴해가자 방치된 두 마을 가운데 하나입니다.

The Beginning of Yakusugi Logging

Yakusugi cedars were revered as sacred trees and the embodiments of deities, and were rarely cut for lumber. This changed in the seventeenth century when Tomari Jochiku (1570–1655), a Neo-Confucian scholar and a Buddhist monk of Yakushima, saw the economic potential of timber resources and proposed logging to help lift the islanders out of their economic woes.


Pre-Edo Period (1500s)

The Shimazu family, who controlled southern Kyushu, including Yakushima, between the twelfth and nineteenth centuries, banned the selling of yakusugi wood to other domains in 1586. A survey of yakusugi was conducted in 1587 by order of the warlord Toyotomi Hideyoshi (1536–1598).


Edo Period (1603–1867)

The ruling Satsuma domain under the Shimazu imposed an annual tax on its subjects, usually paid in rice. Since Yakushima’s land was unsuited for rice production, islanders paid with yakusugi roof shingles, called hiragi. The tribute tax was a heavy burden on the islanders, requiring delivery of about 5.8 million shingles every year. The islanders, however, hesitated to cut down cedars deep in the mountains, believing that they belonged to the domain of the gods, and so Jochiku sought to allay their reservations.

Jochiku received training in the Hokke school of Buddhism at a local temple, and later in Kyoto, Osaka, Edo (modern-day Tokyo), and the Ryukyu Kingdom (modern-day Okinawa). Well-traveled and knowledgeable, he was aware that cedar was valued in other parts of Japan. In 1640 he proposed the felling of yakusugi cedar to the Shimazu lord, and made a pilgrimage into the mountains to pray to the gods. Upon his return he told the villagers that he had received permission from the gods to cut down the trees.

For additional reassurance, the villagers performed rituals to seek permission to log the trees from the mountain deities. They leaned an axe against the tree they wished to fell, and if the axe toppled overnight, they interpreted it as a denial of approval. They placed rice, salt, and shochu liquor at the base of the tree and asked the deities for permission before cutting it down. After the tree was felled, the villagers placed branches on the stump to comfort the tree’s spirit and planted cedar seedlings as a token of their gratitude.

The hiragi shingles remaining after payment of the tribute tax could be exchanged for rice, wheat, barley, and other necessities. The Shimazu also sold the shingles in Osaka and Kyoto, which brought considerable revenue to the family. Jochiku is respected to this day for helping improve the lives of the islanders, and his grave, located in his birthplace of Anbo, has been carefully maintained by villagers over the years.


Meiji Era (1868–1912) and Later

At the beginning of the Meiji era, Yakushima’s forests came almost entirely under state ownership, and the islanders were forbidden from cutting down trees. They continually appealed for the return of their communal forests and filed several legal actions unsuccessfully between 1899 and 1920. Unable to collect firewood or make charcoal, villagers struggled to have fuel for cooking and heating. In 1921, the Agriculture and Commerce Ministry at last allowed Yakushima residents to use part of the state-owned forest under a policy known as the Yakushima Constitution.


Kosugidani Village

Timber cutting rose again in the early 1920s as a result of islanders regaining access to the forests. A trolley railroad was constructed to transport timber from the mountains in the interior beyond the village of Anbo in 1923, and a base camp for loggers, Kosugidani, was established on the upper Anbo River in 1924. Elementary and junior high schools were built to accommodate the families that moved in. As many as 133 households with a population of 540 lived in the camp at the peak of logging activities in 1960, during the postwar construction boom. Eventually almost all the yakusugi in the area were cleared, prompting calls for conservation, and the base camp closed in 1970. Kosugidani was one of two settlements that were established in Yakushima and later abandoned amid the decline of the timber and charcoal indu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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