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가타 가문과 도조

  • 기후
장르:
사적·성터 건조물·시설
매체 이용 구분:
간판
단어 수:
251-500
작성 연도:
2021
지역 협의회명:
Takayama City

The Nagata Family and Their Storehouses

The Nagata family were merchants and sake brewers in Takayama during the Edo period (1603–1867). At the time, only members of the samurai class were allowed to use family names, and the Nagata family was known instead by the tradename “Ōsaka-ya.” In 1854, the Tokugawa shogunate allowed the family to use the name “Nagata” in recognition of their large donation to the construction of the Shinagawa Battery (now Odaiba) in Tokyo Bay.

After the fall of the shogunate in 1868, the new Meiji government abolished the domain system and reorganized Japan into prefectures and municipalities. The Nagata family entered the world of politics in 1889, when Nagata Kichiuemon Masatoshi (1848–1901) became the first mayor of the new town of Takayama. Five years later, he was elected to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in the Imperial Diet. Masatoshi led the family’s involvement in banking, silk production, logging, and many other local industries. Masatoshi’s son, Nagata Kichiuemon Naotsugu (1873–1918), followed in his footsteps, becoming mayor of Takayama in 1904 and winning a seat in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in 1917. The family became so wealthy that in 1932, they were recorded as having paid the most taxes of any family in Takayama.

The wealth of the Nagata family is further evidenced by the arrangement of their six storehouses. Disastrous fires were common in Japan until the mid-twentieth century, and in 1875 a major fire swept through Takayama, destroying over 1,300 homes. The Nagata family’s first storehouse was built six months later to protect their possessions from future fires. In 1914, five more thick-walled storehouses were built around the family home. Together, the storehouses created a firewall around the entire house.

The largest of the Nagata family’s storehouses was used as a sake brewery. The other storehouses were used to store rice, business documents, clothing, and furniture. The small building next to the brewery was used to store kōji rice (rice inoculated with Aspergillus oryzae that is used for sake brewing). In 1953, the buildings and storehouses of the Nagata estate were repurposed to create the museum that would later become the Takayama Museum of History and Art.


永田家とその土蔵


永田家は、江戸時代(1603-1867)に高山の商人であり、日本酒を造る酒造業者であった。当時は武士以外の階級は苗字を公的な場で用い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商人階級の永田家は「大阪屋」という屋号(店や家に付けられた通称)で呼ばれていた。1854年、東京湾の品川砲台(現在のお台場)建設のために多額の寄付をしたことが認められ、徳川幕府から「永田」姓を名乗ることを許された。

明治時代(1868-1912)に入ると、永田家は政界に進出した。1889年、永田吉右衛門正俊(1848-1901)が初代高山町長に任した。その5年後には国会議員に当選した。正俊のおかげで、永田家は銀行業、絹織物業、木材業をはじめとする多くの地場産業に関わるようになった。正俊の息子の永田吉右衛門尚次(1873-1918)はその跡を継いで1904年に高山市長に就任し、1917年には国会議員に当選した。一族は非常に裕福となり、1932年には高山のどの家よりも多くの税金を納めたという記録が残っている。

永田家の裕福さは、所有していた6つの土蔵からも分かる。1875年には高山で大火が発生し、1300軒以上の家が焼失した。永田家の最初の土蔵は、その半年後に建てられた。1914年には、家の周りにさらに5つの厚壁の土蔵が建てられた。これらの土蔵は、万一の火災の際に家全体を守る防火壁となった。

永田家の土蔵のうち、一番大きなものは酒蔵として使われていた。この酒蔵は高山で最も大きな土蔵の一つだ。他の土蔵には、米、商売関連の書類、衣類、家具が保管されていた。酒蔵の隣にある小さな建物は麹米(酒造りのために麹菌を接種した米)を保管するために使用されていた。1953年には、永田家の建物や土蔵を再利用して博物館が作られ、後に高山まちの博物館となった。

永田家和永田倉庫


江戶時代(1603–1867),永田家在高山行商釀酒,創立了「大坂屋」。1854年因捐建東京灣品川炮臺(今台場),獲准使用「永田」為姓。

明治初年,永田家已是高山最大的地主。永田吉右門正俊(1848-1901)和兒子尚次(1873-1918)兩代都曾出任高山市長和國會眾議員。前者還積極推動家族涉足銀行、絲織、伐木業以及許多當地產業。子承父業後,家族生意越發得以擴展。據記載,1932年永田家繳稅為全城之冠。

1875年高山大火後,永田家為保護家產修建了第一座倉庫,1914年又圍繞家宅再建了5座,並構築起堅實的防火牆。

6座倉庫中規模最大的一座曾是酒窖,也是高山最大的倉庫之一。1953年,永田家的宅邸和倉庫被改建為博物館,也就是今天的飛驒高山歷史美術博物館。

永田家族和永田仓库


江户时代(1603-1867),永田家族在高山行商酿酒,创建了“大坂屋”。1854年因捐建东京湾品川炮台(今台场),获准使用“永田”为姓。

明治初年,永田家族已是高山最大的地主。永田吉右门正俊(1848-1901)和儿子尚次(1873-1918)都曾出任高山市长和国会众议员,前者还积极推动家族向银行、丝织、采伐业以及众多当地产业发展。子承父业后,家族生意涉及领域愈发广泛。据记载,1932年永田家族缴税为全城之冠。

1875年高山大火后,永田家族为保护家产修建了第一座仓库,1914年又围绕家宅增建了5座,并构筑起坚实的防火墙。

6座仓库中规模最大的一座曾是酒窖,也是高山最大的仓库之一。1953年,永田家族的宅邸和仓库被改建为博物馆,也就是今天的飞驒高山历史美术博物馆。

나가타 가문과 도조


나가타 가문은 에도 시대(1603~1867)에 활약했던 다카야마의 상인으로 일본술을 빚는 주조업자였다. 당시에는 무사 이외의 계급은 성씨를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인 계급이었던 나가타 가문은 ‘오사카야’라는 옥호(가게나 집에 붙이는 칭호)로 불렸다. 그 후 1854년, 도쿄만 시나가와 포대(현재의 오다이바) 건설을 위해 고액의 기부를 한 공이 인정되어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나가타’라는 성씨를 쓸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메이지 시대(1868~1912)에 들어선 이후 나가타 가문은 정계에도 진출했다. 1889년에는 나가타 기치우에몬 마사토시(1848~1901)가 다카야마 마을의 초대 촌장을 지냈다. 그로부터 5년 뒤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마사토시 덕분에 나가타 가문은 은행업, 견직물업, 목재업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 특산자원 사업에 관여하게 되었다. 마사토시의 아들인 나가타 기치우에몬 나오쓰구(1873~1918)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04년에 다카야마 시장으로 취임했고, 1917년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가타 가문은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1932년에는 다카야마의 다른 모든 가문보다 많은 세금을 납부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나가타 가문의 재산 규모는 당시 소유했던 6개의 도조만 봐도 알 수 있다. 1875년에는 다카야마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1,300채 이상의 가옥이 소실되었다. 나가타 가문의 첫 번째 도조는 그 후 반년이 지나고 나서 지어졌다. 1914년에는 저택 주변에 두꺼운 벽으로 된 5개의 도조가 더 지어졌다. 이 도조들은 만일의 화재에 대비해 저택 전체를 지키는 방화벽 역할을 했다.

나가타 가문의 도조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술창고로 사용되었다. 이 술창고는 다카야마에서 가장 큰 도조 중 하나이다. 다른 도조에는 쌀, 사업 관련 서류, 의류, 가구가 보관되어 있었다. 술창고 옆에 있는 작은 건물은 누룩쌀(술을 빚기 위해 누룩곰팡이를 번식시킨 쌀)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1953년에는 나가타 가문의 저택 건물과 도조를 재사용해 박물관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후에 다카야마마치 박물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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