標題 工業化前的大牟田歷史

  • 福岡
類別:
史蹟、城蹟
媒體用途種類:
網頁
字數:
251-500
編寫年度:
2024
地區協議會名稱:
Omutashi

History of Ōmuta before Industrialization


Ōmuta’s importance as the location of Miike Coal Mine and the source of the coal that fueled Japanese industrialization in the 1800s and 1900s has overshadowed much of its previous history. During the Kofun period (ca. 250–552), people built burial mounds on the mountains in Ōmuta that overlook the Ariake Sea. The most prominent of these are the Hagino-o, Kugurizuka, and Kurosaki Kanzeonzuka mounds.


The first mention of Ōmuta is in the Nihon shoki (720), the second-oldest chronicle of Japanese history. According to the text, legendary Emperor Keikō (trad. 13 BC–130 AD) visited Ōmuta and gave the area a new name, Miki no Kuni, meaning “Land of the Sacred Tree.”


By the early Heian period (794–1185), the Miike clan had emerged as local rulers in the Ōmuta area. They are credited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Buddhist temple Fukōji in 820. Their influence was so strong that the Ōmuta area came to be called “Miike.” Towards the end of the Heian period, Ōmuta was known throughout the country for swords made by Miike Tenta Mitsuyo (dates unknown).


The first discovery of coal in the area was recorded in 1469. A local farmer named Denjizaemon and his wife had climbed Mt. Tōka to gather wood and plants. After building their dinner fire, they were astonished when the black stones beneath the fire also started to burn. Yakeishiyama (“burning stones”) Park was built to memorialize this discovery, and it is one of the few places in Ōmuta where coal can still be seen on the Earth’s surface.


In 1621, the Ōmuta area became Miike domain under Tachibana Tanetsugu (1604–1630). Tanetsugu and his descendants lived in the town of Miike, at the foot of the mountains located south of present-day Shin-Ōmuta Station. In the 1630s, a long drought severely affected harvests in the area, so the Tachibana family built an irrigation pond and the Hayagane Meganebashi Bridge aqueduct to ensure a stable water supply. A predecessor to the Daija Festival is believed to have begun around the same time to appease the water deity and prevent epidemics. The Zendeko Dance and Hyūtan Mawashi Festival held at a nearby mountain shrine are also thought to have begun during the Edo period (1603–1867) to show gratitude for the harvest and pray for rain.


In 1806, the Tachibana family was transferred to present-day Fukushima Prefecture, and the domain was placed under the direct jurisdiction of the Tokugawa shogunate. The shogunate later transferred the northern part of Miike domain to Yanagawa domain. What remained of Miike domain was given back to the Tachibana family in 1851 and governed by Tachibana Taneyuki (1836–1905) until the domain system was abolished in 1871. Coal mining increased under Taneyuki, who laid the foundation for the industrialization of Miike Coal Mine in the Meiji era (1868–1912).

工業化以前の大牟田の歴史


三池炭鉱の所在地であり、1800年代から1900年代にかけて日本の工業化を支えた石炭の供給地としての大牟田の重要性は、それ以前の歴史の多くを覆い隠してしまっている。古墳時代(約250~552頃)、人々は有明海を見下ろす大牟田の山々に古墳を築いていた。中でも有名なのは、萩ノ尾古墳、潜塚古墳、黒崎観世音塚古墳である


大牟田について最初に言及されたのは、日本史上2番目に古い文献である『日本書紀』(720年)である。 それによると、伝説上の景行天皇(紀元前13年~130年)が大牟田を訪れ、この地域を「神木の地」を意味する「御木国」と名付けたという。


平安時代初期(794年~1185年)には、三池氏が大牟田地方の支配者として台頭した。彼らは820年に普光寺を建立したとされている。彼らの影響力は非常に大きく、大牟田地域は「三池」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平安時代末期には、大牟田の三池典太光世(生没年不詳)が作った刀は全国的に有名になった。


この地域で石炭が最初に発見されたのは1469年のことだった。地元の農民、伝治左衛門とその妻が、薪を集めるために稲荷山に登った。夕食の火を起こした後、その下の黒い石も燃え始めたのを見て彼らは驚いた。この発見を記念して建てられた焼石山公園は、大牟田で今でも石炭が地表に見られる数少ない場所のひとつである。


1621年、大牟田地域は立花種次(1604~1630)を藩主とする三池藩領となった。種次とその子孫は、山麓にある現在の新大牟田駅より南に位置する三池の町に住んでいた。1630年代、長い干ばつがこの地域の収穫に深刻な影響を与えたため、立花家は灌漑用のため池と早鐘眼鏡橋を建設し、安定した水の供給を確保した。水神を鎮め疫病を防ぐために、大蛇山祭りの前身となる祭りが同じ頃に始まったと考えられている。また、近くの山神社で行われる銭太鼓踊りとひゅうたん廻しの祭りは、江戸時代(1603年~1867年)に五穀豊穣に感謝し、雨乞いをするために始まったと考えられている。


1806年、立花家は現在の福島県に転封となり、三池藩は徳川幕府領となった。その後三池藩の北部は柳河藩に転封となった。残りの三池藩領地は1851年に立花家に返還され、1871年の廃藩置県まで立花種恭(1836~1905)が治めた。種恭は石炭の採掘を強化し、明治期(1868~1912)の三池炭鉱の工業化の基礎を築いた。

工业化前的大牟田历史


大牟田作为三池煤矿所在地,在19世纪至20世纪为日本工业化提供煤炭资源,其重要地位几乎掩盖了这片土地更为久远的历史。早在古坟时代(约250—552),先民们已在俯瞰有明海的大牟田群山上修建了众多古坟,其中最负盛名的当属萩之尾古坟、潜冢古坟和黑崎观世音冢古坟。


大牟田最早见诸文字记载是在日本第二古老的史书《日本书纪》(720)中。据记载,传说中的景行天皇(公元前13年-公元130年)曾造访大牟田,并将此地命名为“御木国”,意为“神木之地”。


到平安时代初期(794-1185),三池氏族崛起为大牟田地区的地方统治者。据记载他们在820年建立了佛教寺院普光寺。三池氏族的影响力如此之大,以至于大牟田地区被称为“三池”。到了平安时代末期,大牟田地区又因三池三池典太光世(生卒年不详)所铸造的刀剑而闻名全国。


这片土地上首次发现煤炭要追溯到1469年。一位名叫伝治左卫门的当地农民和他的妻子到稻荷山采集木材和植物。当他们生火做饭时,惊讶地发现火下的黑色石头也燃烧起来。为纪念这一发现,修建了烧石山公园,这里是大牟田少数几个仍能在地表看到煤炭的地方之一。


1621年,大牟田地区归入立花种次(1604—1630)治下,成为三池藩。立花种次及其后裔居住在三池町,位于现今新大牟田站南部山麓。17世纪30年代,该地区遭遇长期干旱,严重影响了收成,因此立花家族修建了灌溉蓄水池和早钟眼镜桥引水渠,以确保稳定的水源供应。据信,为安抚水神、防止疫病,后来发展成大蛇山祭的庆典也始于这一时期。此外,邻近山神社举行的钱太鼓舞和葫芦转舞,据推测也始于江户时代(1603-1867),目的是为了祈求风调雨顺、五谷丰登。


1806年,立花家族被调往现今的福岛县,之后三池藩被置于德川幕府的直接管辖之下。德川幕府后来将三池藩北部划归柳川藩。其余的三池藩领地在1851年归还给立花家族,由立花种恭(1836-1905)统治,直到1871年废藩置县。立花种恭统治期间,大力推进煤炭开采,为明治时代(1868-1912)三池煤矿的工业化奠定了基础。

산업화 이전 오무타의 역사


오무타(大牟田)는 미이케탄광이 있는 곳이자 1800~1900년대 일본 산업화를 뒷받침했던 석탄의 공급지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이전 역사의 대부분을 압도합니다. 고훈 시대(약 250~552년)에 사람들은 아리아케해가 내려다보이는 오무타의 산에 고분(고훈)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고분은 하기노오, 구구리즈카, 구로사키 간논즈카 고분입니다.


오무타는 두 번째로 오래된 일본사 문헌인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에서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전설 속의 천황인 게이코 천황( 기원전 13년~기원후 130년)이 오무타를 방문하여 지명을 미키노쿠니(‘신목의 땅’)로 바꿨다고 합니다.


헤이안 시대(794~1185) 초 즈음, 미이케(三池) 가문이 오무타 지역의 통치자로 대두했는데, 미이케 가문은 820년에 불교 사찰 후코지(普光寺)를 건립한 공적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가문의 세력이 얼마나 막강하였는지, 오무타 지역은 ‘미이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 오무타는 미이케 덴타 미쓰요(연대 미상)가 제작한 검으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무타에서 처음으로 석탄이 발견된 시기는 1469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덴지자에몬이라는 농부와 그의 아내는 땔감과 식재료를 구하러 도카야마 산에 올랐습니다. 저녁 밥을 지으려 불을 피운 부부는 불 아래에 있는 검은 돌도 불에 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발견을 기념하고자 야케이시야마(불타는 돌의 산) 공원이 세워졌으며, 이곳은 지금도 지표면에서 석탄이 발견되는 오무타의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1621년, 오무타는 다치바나 다네쓰구(1604~1630)가 통치하는 미이케 번(藩, 옛 일본의 행정 단위)이 되었습니다. 다네쓰구와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 신오무타역 남쪽에 위치한 산자락에 있는 미이케 마을에 살았습니다. 1630년대에는 오랜 가뭄 때문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다치바나 가문은 안정적인 용수 공급을 위해 저수지를 만들고 ‘하야가네 메가네바시’ 수로교를 만들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물의 신을 진정시키고 역병을 막기 위한 축제(다이자 축제의 전신)가 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근처 산에 있는 신사에서 열린 젠데코 춤과 휴탄 마와시 축제도 수확에 감사를 표시하고 비를 기원하기 위해 에도 시대(1603~1867)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806년 다치바나 가문은 오늘날 후쿠시마현이 된 지역으로 이전했고, 미이케 번은 도쿠가와 막부의 직접 관할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미이케번 북부 지역을 야나가와번으로 이전시켰습니다. 미이케번으로 남았던 지역은 1851년 다시 다치바나 가문으로 반환되었는데, 번 체계가 폐지된 1871년까지 다치바나 다네유키(1836~1905)가 통치했습니다. 다네유키는 메이지 시대(1868~1912)에 미이케탄광 공업화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석탄 채굴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工業化前的大牟田歷史


大牟田以為三池煤礦所在地,且在19世紀到20世紀成為驅動日本工業化的煤炭來源提供者之角色,其重要性使得之前的歷史失去光彩。在古墳時代(約西元250到552年間),人們在大牟田可俯瞰有明海的山頭建造了墳墓。其中最著名的是萩之尾古墳、潛塚古墳和黑崎觀世音塚古墳。


大牟田在日本歷史第二古老的編年史《日本書紀》(西元720年)中首次被記載。根據文中記載,傳說中的景行天皇(西元前13-西元130年)走訪了大牟田,並為該地賜一新地名「御木國」,意即「神木之地」。


直至平安時代初期(西元794-1185年),三池氏族已然成為大牟田地區的一方霸主。傳説他們在西元820年間建造了佛教的普光寺。由於他們的影響力非常深厚,大牟田地區因此被稱為「三池」。平安時代末期,大牟田因三池典太光世(生卒年不詳)所製造的刀而名聞全國。


這地區首次發現煤礦的紀載是在西元1469年。有位當地名為傳次左衛門的農民和他的妻子爬上十日山採集木材和植物。當炊煮晚餐的柴火升起後,他們驚愕地發現火下的黑色石頭竟開始燃燒起來。燒石山(意指「燃燒的石頭」)公園即是為了紀念這發現所建造的,該地點也是大牟田少數在地表仍然可以見到煤炭的地方之一。


1621年,大牟田地區劃入隸屬立花種次(西元1604-1630年)所統治的三池藩。種次和他的後代居住在現在新大牟田站以南山麓的三池町。1630年代,長期乾旱嚴重影響了當地的農作,因此立花家族建造了灌溉池塘和早鐘眼鏡橋水道來確保穩定的供水。據信,大蛇祭的前身約始於同期,用來安撫水神並預防瘟疫。人們相信,在附近山神社所舉辦的錢太鼓舞和瓢簞迴轉祭也始於江戶時代(西元1603-1867年),以藉此表達對豐收的感謝並祈雨。


1806年,立花家族遷至現今的福島縣,該領地則歸德川幕府直接管轄。後來幕府將三池領地北部劃入柳川藩。三池領地的其餘部分則於1851年歸還給立花家族,並由立花種恭(西元1836-1905年)統治,直到1871年藩屬制度廢除為止。在為明治時代(西元1868-1912年)三池煤礦的工業化奠定基礎的種恭領導下,煤炭開採持續增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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