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長崎歴史文化博物館 (受け継がれた伝承、異宗一件(浦上崩れ))

  • 長崎県
ジャンル:
史跡・城跡 建造物・施設
媒体利用区分:
看板 パンフレット
ワード数:
501-750
作成年度:
2019年
地域協議会名:
「長崎と天草地方の潜伏キリシタン関連遺産」保存活用実行委員会

The Transmission of Christian Lore

Under the guidance of their leaders, the Christians of Urakami, Sotome, and the Gotō Islands followed the Calendar of Bastian, a 1634 Church calendar adapted for Japan’s lunar calendar, turning out to celebrate holy days, observing fasting days, and performing rituals such as baptisms and funerals. A number of catechismal tracts were passed down, such as the Short Treatise on Perfect Contrition, dating from 1603, which taught Christians how to repent for their sins when the act of confession was not available, and Concerning 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published before 1829), which recounted the stories of the Bible.

In addition, in the Sotome region, four prophecies that originated with Bastian, the Japanese evangelist known for his church calendar, were passed down by word of mouth. The prophecies went as follows: (1) “Those I see as my children will, after seven generations, have their souls saved from distress.” (2) “The Confessors will come in huge black ships and every week you will be able to go to confession.” (3) “A time will come when you will be able to walk around and sing Christian hymns in a loud voice.” (4) “If you meet nonbelievers on the road, the nonbelievers will give way to you.” Curiously enough, these prophecies did indeed come true after the seventh generation, or roughly 230 years after Bastian’s martyrdom in 1659.



“Foreign Religion Incidents” (the Urakami Crackdowns)


The forms the faith of the Hidden Christians took varied region by region, but they all shared a determination to remain underground. At the same time, the shogunal authorities were prepared to tolerate the Hidden Christians without punishment provided they did not express their faith openly. It was in the context of this delicate balancing act—coexisting in society with the Japanese religions of Shinto and Buddhism—that the traditions of the Hidden Christians were handed down.

Many Hidden Christians lived in the Urakami region, and from the late eighteenth century, they were the focus of frequent disciplinary actions because they were betrayed by informants. These Christians, however, were never punished as Christians per se, but more generally as followers of a foreign heresy.

For example, in 1790, the village headman Takatani Eizaemon indicted 19 villagers from Yamazato in Urakami at the Nagasaki magistrate’s office on suspicion of being Christians. However, to prevent the situation from escalating, they were not officially recognized as Christians. (This episode is known as the First Urakami Crackdown.) Although the details are not entirely clear, it seems that the Second Urakami Crackdown of 1839 followed a similar pattern of rounding up suspects and then releasing them.

However, in the Third Urakami Crackdown of 1856, reports from informants resulted in the arrest of a series of the leaders of the Urakami Hidden Christians, including Kataoka Shunmin and his son, both physicians, at Shironokoshi, and the chōkata Kichizō. Subjected to harsh interrogation, a number of them died in prison. Ultimately, though, the whole incident was treated as an incident of foreign heresy.

During the Third Urakami Crackdown, the 113th Nagasaki Magistrate Okabe Suruga no kami Nagatsune, who interrogated the chōkata Kichizō, produced a detailed record of how the Hidden Christians of the time practiced their faith. Numerous statuettes hidden in people’s houses in Urakami, such as the white porcelain image of Maria Kannon and the metal figurine of Inashio (Ignatius of Loyola, Founder of the Society of Jesus), were confiscated.


PICTURE 1

Our Lady of the Snows (from Sotome)

Early 17th century

(Twenty-Six Martyrs Museum)


PICTURE 2

Statuette of Maria Kannon

Ca. 17th century

(Sōtō Sect [Zen] Tenpukuji Temple)


The Urakami Christians are believed to have taken this statue to Tenpukuji Temple in Kashiyama in the Fukabori domain for safekeeping during the Third Urakami Crackdown in 1856. Tenpukuji had a policy of tacit tolerance toward Christianity.


基督教信仰傳承


浦上、外海、五島列島的吉利支丹在領導者的率領下,遵循巴斯蒂安曆(於1634年配合日本舊曆編成的教會曆)一同慶祝節日、按日斷食,以及實施洗禮及送葬等儀式。不少有關宗教教義的書籍仍保存至今,例如編纂於1603年,教導信徒在無法向傳教士告解時如何獲得上帝恩赦的《こんちりさんのりやく》(Konchirisan no ryaku),以及講述聖經故事的《天地始之事》(成書於1829年前)等。

不僅如此,在外海地區,流傳著以傳授教會曆而知名的日本傳教士——巴斯蒂安所留下的四則預言。分別是①七個世代後,吾子之靈魂將獲得救贖,不再受苦;②「聽罪司祭」將搭乘巨大黑船前來,令信徒每週都可告解;③未來無論身在何處,人人皆可高唱吉利支丹讚美詩;④若在外遇見異教徒,對方會為你讓路。耐人尋味的是,歷經七個世代,這則預言於1659年巴斯蒂安殉教後約230年後得以成真。


異宗一件(浦上大規模舉報事件)

潛伏吉利支丹的信仰型態因地區而異,唯有致力隱藏信徒身分這點完全一致。與此同時,幕府方面並不處罰未表明信仰的潛伏吉利支丹,而是採取幾乎默認的態度。正是基於這種微妙的平衡,潛伏吉利支丹方與神道教及佛教等日本既有宗教共存,久而久之,其傳統才得以延續並傳承下來。

浦上曾居住著眾多潛伏吉利支丹,18世紀末以來,不少人被密告而屢遭取締。不過他們的罪狀並非以吉利支丹的身份,而是憑更籠統的「異教徒」之名義遭懲處。

比如1790年,庄屋(相當於現今的村長)高谷永左衛門向長崎奉行所告發浦上村山里的19名村民有吉利支丹之嫌。不過為了避免事態升級,他們並未被正式認定為吉利支丹。此事件稱為「浦上第一次大規模舉報事件」。1839年,浦上發生第二次大規模舉報事件,雖詳情不明,但舉報與釋放的過程似乎與第一次無異。

然而到了1856年,浦上發生第三次大規模舉報事件。城之越的醫師片岡舜民父子,以及身為帳方的吉藏等浦上的潛伏吉利支丹領袖們被密告後,陸續遭到逮捕和嚴刑拷問,不少人因此死於牢中。儘管如此,此事最終卻只被輕描淡寫地歸為所謂的「異宗一件」。

當浦上發生第三次大規模舉報事件之際,負責調查帳方吉藏的「第113代長崎奉行・駿河守」——岡部長常,留下了當時潛伏吉利支丹信仰生活的詳細記錄。浦上家家戶戶藏匿的白瓷瑪利亞觀音及金屬製「依納爵」(耶穌會創始人依納爵·羅耀拉)等雕像均在此時被沒收。


(圖1)

《雪之聖瑪利亞》(來自外海)

17世紀初期

(日本二十六聖人紀念館)


(圖2)

《瑪利亞觀音》

17世紀左右

(禪宗曹洞宗天福寺)


相傳1856年,第三次大規模舉報事件發生之時,浦上的吉利支丹將此雕像移至深堀領樫山的天福寺以保安全。而對於吉利支丹的信仰,天福寺則採取默認態度。

基督教信仰传承


在领导者的率领下,浦上、外海、五岛列岛的吉利支丹遵循着巴斯蒂安历(于1634年配合日本旧历编成的教会历),一同庆祝节日、按日断食,以及进行洗礼及送葬等仪式。《こんちりさんのりやく》(Konchirisan no ryaku)编纂于1603年,用于教导信徒在无法向传教士告解时如何获得上帝恩赦,此外还有讲述圣经故事的《天地始之事》(成书于1829年前)等不少有关宗教教义的书籍仍保存至今。

外海地区还流传着以传授教会历而知名的日本传教士——巴斯蒂安所留下的四则预言。分别是①七个世代后,吾子之灵魂将获得救赎,不再受苦;②“听罪司祭”将搭乘巨大黑船前来,令信徒每周都可告解;③无论未来身在何方,人人皆可高唱吉利支丹赞美诗;④若在外与异教徒相遇,对方会为你让路。耐人寻味的是,历经七个世代,这则预言于1659年巴斯蒂安殉教后约230年后得以成真。


异宗一件(浦上大规模检举事件)

潜伏吉利支丹的信仰形态因地区而异,唯有致力隐藏信徒身份这点完全一致。与此同时,幕府方面并不处罚未表明信仰的潜伏吉利支丹,而是几乎采取默许的态度。正是基于这种微妙的平衡,潜伏吉利支丹方可与神道教及佛教等日本既有宗教共存,久而久之,其传统才得以延续并传承下来。

浦上曾居住着众多潜伏吉利支丹,18世纪末以来,不少人被密告而屡遭取缔。不过他们的罪状并非以吉利支丹的身份,而是凭更笼统的“异教徒”之名义遭惩处。

比如1790年,庄屋(相当于现今的村长)高谷永左卫门向长崎奉行所告发浦上村山里的19名村民有吉利支丹之嫌。但为了避免事态升级,他们并未被正式认定为吉利支丹。此事件被称为“浦上第一次大规模检举事件”。1839年,浦上发生第二次大规模检举事件,虽详情不明,但检举与释放的过程似乎与第一次无异。

然而进入1856年,浦上再次发生第三次大规模检举事件。城之越的医师片冈舜民父子,以及身为帐方的吉藏等浦上的潜伏吉利支丹领袖们被密告后,相继遭到逮捕和严刑拷问,不少人为此死于牢中。尽管如此,此事最终却只被轻描淡写地归为所谓的“异宗一件”。

当浦上发生第三次大规模检举事件之际,负责调查帐方吉藏的“第113代长崎奉行・骏河守”——冈部长常,保留了当时潜伏吉利支丹信仰生活的详细记录。浦上家家户户藏匿的白瓷玛利亚观音及金属制“依纳爵”(耶稣会创始人依纳爵•罗耀拉)等雕像均在此时被没收。


(图1)

《雪之圣玛利亚》(来自外海)

17世纪初

(日本二十六圣人纪念馆)


(图2)

《玛利亚观音》

17世纪左右

(禅宗曹洞宗 天福寺)


相传,1856年第三次大规模检举事件发生之际,浦上的吉利支丹将此雕像移至深堀领樫山的天福寺以保安全。而对于吉利支丹的信仰,天福寺则采取默许态度。

그리스도교 신앙의 계승


우라카미와 소토메, 고토 열도에 거주하던 기리시탄은 지도자의 지도 아래 바스찬의 교회력(일본의 음력에 맞춰 1634년에 편찬된 교회력)에 따라 축일을 함께 기념하고, 단식일을 지키며 세례나 장례 등의 의례를 수행해 왔습니다. 1603년, 선교사에게 고해성사를 할 수 없을 때 신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정리한 『곤치리산노리야쿠』나 성서의 이야기를 전하는 『천지시지사(天地始之事)』(1829년 출판) 등 여러 교리서가 계승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소토메 지구에서는 교회력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 전도사 바스찬이 남긴 4개의 예언이 전승되었습니다. 바스찬의 예언이란, ① 7세대 이후 나의 자식과도 같은 이들의 영혼은 괴로움에서 구원받을 것이며, ② 콘페소르(고해 신부)가 서양의 커다란 배를 타고 찾아와 매주 콘피상(참회)을 할 수 있을 것이며, ③ 어느 곳에서든 큰 소리로 기리시탄의 노래를 부르며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시대가 찾아오고, ④ 거리에서 젠티우(이교도)와 만나면 상대방이 먼저 길을 양보해 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스찬의 예언은 매우 놀랍게도 1659년에 그가 순교한 날로부터 정확히 7세대가 지난 약 230년후에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교(異敎) 사건(우라카미쿠즈레)


지역마다 잠복 기리시탄의 신앙 형태는 달랐지만, 잠복 기리시탄이라는 것이 발각되지 않도록 비밀리에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는 같았습니다. 이와 함께 막부에서는 잠복 기리시탄이 자신의 신앙을 표명하지 않는 한, 처벌을 가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신도(神道)나 불교 등 일본의 기존 종교나 지역 사회와 공생하는 절묘한 균형감을 유지하며 잠복 기리시탄의 전통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우라카미에는 수많은 잠복 기리시탄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18세기 말이 지나면서 밀고로 인해 여러 차례 단속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잠복 기리시탄은 기리시탄으로서가 아니라 더욱 넓은 의미에서 이교도로서 처벌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790년에는 마을의 촌장이었던 다카타니 에이자에몬이 우라카미무라의 야마자토 주민 중 19명이 기리시탄으로 의심된다며 나가사키 부교쇼에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막부는 심각한 사태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 주민을 공식적으로 기리시탄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우라카미 이치반쿠즈레라고 불립니다.)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1839년에 발생한 우라카미 니반쿠즈레에서도 이와 같은 검거와 석방이 반복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1856년에 발생한 우라카미 산반쿠즈레에서는 밀고로 인해 시로노코시 지역의 의사였던 가타오카 슌민과 그의 아들, 조카타(최고책임자)였던 기치조 등 우라카미 잠복 기리시탄의 지도자들이 잇달아 포박되었습니다. 가혹한 심문이 가해졌고, 이들 대부분이 감옥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우라카미 산반쿠즈레도 ‘이교(異敎) 사건’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우라카미 산반쿠즈레가 발생했을 때, 조카타였던 기치조를 취조한 제113대 나가사키 부교 오카베 스루가노카미 나가쓰네는 당시 잠복 기리시탄의 신앙 생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우라카미의 자택에 숨겨두었던 마리아 백자 관음상과 금속으로 만든 ‘이냐시오’상(예수회의 창설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 등도 다수 몰수당했습니다.


그림 1

《눈의 산타 마리아》(소토메에서 전래) 

17세기 초엽 

(일본 26성인 기념관)


그림 2

 《마리아 관음》

17세기경 

(선종 조동종(曹洞宗) 덴푸쿠지 절)


1856년 우라카미 산반쿠즈레가 발생한 당시, 우라카미의 기리시탄이 마리아 관음상을 후카보리령 가시야마에 위치한 덴푸쿠지 절에 피난시켰다고 전해진다. 덴푸쿠지 절은 기리시탄 신앙을 묵인한 곳이었다.

キリスト教信仰の継承


浦上や外海、五島列島のキリシタンは、指導者のもとでバスチャンの日繰り(日本の旧暦に合わせて1634年に編纂された教会暦)に従って祝日をともに祝い、断食の日を守り、洗礼や葬送などの儀礼を行いました。1603年にまとめられた宣教師への告解ができないときどのように神の赦しを得るかを伝える『こんちりさんのりやく』や、聖書の物語を伝える『天地始之事』(1829年以前に出版)等の数々の教理書が継承されました。

それらに加え、外海地区では日繰りを伝えたことで知られる日本人伝道士バスチャンが残した4つの予言が伝承されました。その予言とは、①7代後、わが子とみなすものたちの霊魂は苦しみから救われる、②コンヘソーロ(聴罪司祭)が大きな黒船にのってやって来て、毎週コンヒサン(告白)ができるようになる、③どこでも大声でキリシタンの歌を歌って歩ける時代が来る、④道でゼンチョ(教外者)に出会うと、先方が道を譲るようになる、というものでした。興味深いことに、この予言は1659年のバスチャンの殉教からちょうど7代、約230年後に現実のものとなりました。



異宗一件(浦上崩れ)


潜伏キリシタンの信仰形態は地域によって異なりますが、潜伏キリシタンであることが発覚しないよう秘匿する決意は共通していました。同時に、幕府側は潜伏キリシタン自身が信仰を表明しない限り処罰を行わないという黙認の姿勢をとっていました。神道や仏教などの日本の既存の宗教や地域社会と共生するというこの微妙な均衡を背景に、潜伏キリシタンの伝統は受け継がれていきました。

浦上には多くの潜伏キリシタンが住んでおり、18世紀末以降彼らは密告によってたびたび取り締まりの対象となりました。しかし、潜伏キリシタンはキリシタンとしてではなく、より大まかな枠組みにおける異宗の信徒として処罰されました。                  

例えば、1790年、庄屋高谷永左衛門が浦上村山里の村民19名を、キリシタンの疑いがあるとして長崎奉行所に訴えました。しかし、幕府は深刻な事態につながるのを防ぐため、これらの住民を公式にキリシタンであることを認めませんでした。(この事件は浦上一番崩れと呼ばれています。)詳細は不明であるものの、1839年に起こった浦上二番崩れでも同様の検挙と釈放がなされたようです。

ただし、1856年の浦上三番崩れでは、密告によって、城の越の医師であった片岡舜民父子や帳方であった吉蔵などの浦上の潜伏キリシタンの指導者たちが次々に捕縛されました。厳しい尋問によって、彼らの多くが牢で亡くなりました。しかし、最終的には、この件も「異宗一件」として処理されました。

この浦上三番崩れの際に、帳方の吉蔵を取り調べた第113代長崎奉行 岡部駿河守長常は、当時の潜伏キリシタンの信仰生活の詳細な記録を残しました。浦上の家々に秘蔵されていた白磁のマリア観音や金属製の「イナッショウ」(イエズス会創設者イグナチオ・デ・ロヨラ)等の像も多数没収されました。


図1

《雪のサンタマリア》(外海伝来) 

17世紀初期 

(日本二十六聖人記念館)


図2

 《マリア観音》

17世紀頃 

(禅宗曹洞宗 天福寺)


1856年の浦上三番崩れの際、浦上のキリシタンがこの像を深堀領樫山の天福寺に避難させたと伝えられている。天福時はキリシタン信仰を黙認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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