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釜屋間歩と周辺の岩盤加工遺構

  • 島根県
ジャンル:
世界遺産(自然・文化)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ワード数:
250以下
作成年度:
2020年
地域協議会名:
石見銀山多言語解説協議会
位置情報:
島根県大田市大森町

Kamaya Mine Tunnel and Surroundings


The Kamaya tunnel is the source of one of the greatest success stories in the history of Iwami Ginzan. It was dug in 1602 by a prospector named Yasuhara Denbei, who soon discovered an abundant silver vein within. During the following year, Kamaya produced a remarkable 13.5 tons of silver for the shogunate, the central government in Edo (present-day Tokyo), which had assumed direct control of the mine a few years earlier. This contribution was so great that Yasuhara was granted an audience with shogun Tokugawa Ieyasu (1543–1616) and an honorary title, and he was presented with an ornate dofuku jacket and fan. The jacket was donated to Seisuiji Temple, where Yasuhara is said to have prayed before his discovery, and is now designated an Important Cultural Property. A reproduction of the jacket is on display at the Iwami Ginzan World Heritage Center.


Several mining sites from the early 1600s have been discovered in the vicinity of the Kamaya tunnel. In some, miners appear to have dug directly into the hillside rather than use tunnels, because the silver veins in this area were often very close to the surface. Cliffs were also cut into to flatten the ground and make room for buildings. Nearby, pits were dug into the rock to collect rainwater, which was needed to wash the ore so that silver-containing bits could be collected effectively. These remains, along with byproducts of the silver-refining process found here, indicate that both sides of the valley that centers on the Kamaya tunnel were mined heavily from the time of Yasuhara Denbei through to the Meiji era (1868–1912), when the last shafts in the area were dug.


釜屋間步及周邊


在石見銀山的歷史上有過許多一步登天的傳奇,釜屋「間步」(礦坑通道)就是其一。1602年,一位名叫安原傳兵衛的探礦者在此找到了一條儲量豐富的銀礦脈,這就是釜屋間步的由來。當時直轄這處礦山的是位於江戶(東京)的德川幕府(1603-1867),安原傳兵衛在其發現礦脈的第二年便為幕府獻上驚人的13.5噸白銀。他因此得到了將軍德川家康(1543-1616)的親自接見,不但被授予榮譽頭銜,更獲賜一套華麗的道服(和服的外套)和一把扇子。據說安原傳兵衛在開礦前曾前往清水寺祈願一舉成功,事後他便將幕府將軍賜予的道服轉贈給了清水寺。如今,這件道服被指定為國家重要文化財產,原件收藏於京都國立博物館內,石見銀山世界遺產中心則展出了一件它的複製品。

釜屋間步周圍現已發現了多處可追溯至17世紀早期的銀礦開採遺址。這一區域的銀礦脈大多十分貼近地表,所以有幾處並沒有使用地下坑道,礦工們似乎直接在山坡表面就可以挖到礦石。崖壁上有許多人工開鑿的平地,多用於建造房屋。附近的岩石上也有許多人工挖掘的坑窪,這是為了收集雨水以沖洗礦石,以便有效篩選出含銀的碎石。從這些遺跡和在本地發現的白銀冶煉副產品中可以看出,從安原傳兵衛時代一直到明治時代(1868-1912),以釜屋間步為中心的山谷兩側都進行過大規模開採,而該區域最後一些礦道是在明治時代開鑿的。

釜屋间步及周边


在石见银山的历史上有许多一步登天的传奇,釜屋“间步”(矿坑通道)就是其一。1602年,一位名叫安原传兵卫的探矿者在此挖矿,很快就找到了一条储量丰富的银矿脉,这就是釜屋间步。当时直辖这处矿山的是位于江户(今东京)的德川幕府(1603-1867),安原传兵卫在他发现矿脉的第二年就为幕府献上了数量惊人的13.5吨白银。他因此得到了幕府将军德川家康(1543-1616)的亲自接见,不但被授予荣誉头衔,更获赐一套华丽的道服(和服的外套)和一把扇子。安原传兵卫将道服赠给了清水寺,据说是因为他在开矿前曾前往该寺祈祷成功。如今,这件道服被指定为国家重要文化财产,原件收藏于京都国立博物馆内,石见银山世界遗产中心展出了一件它的复制品。

釜屋间步周围现已发现了多处出自17世纪早期的银矿开采遗址。这一区域的银矿脉大多十分贴近地表,所以有几处并没有使用地下坑道,矿工们似乎直接在山坡表面就挖到了矿石。崖壁上有许多人工开凿的平地,多用于建造房屋。附近的岩石上也有许多人工挖掘的坑洼,这是为了收集雨水来冲洗矿石,以便有效筛选出含银的碎石。从这些遗迹和本地发现的白银冶炼副产品中可以看出,从安原传兵卫时代一直到明治时代(1868-1912),以釜屋间步为中心的山谷两侧都进行过大规模开采,而该区域最后一些矿道是在明治时代开凿的。

가마야 갱도와 그 주변


가마야 갱도는 이와미 은광 역사상 최고의 성공 스토리 중 하나가 탄생한 곳입니다. 1602년 야스하라 덴베에라는 이름의 갱부가 이 갱도를 굴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풍부한 은 광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가마야에서는 수년 전 은광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손에 넣은 에도(현재의 도쿄)의 도쿠가와 막부에 13.5톤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은을 헌상했습니다. 이 엄청난 헌상품을 바친 야스하라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를 알현할 수 있는 허가를 얻고 칭호를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도후쿠(귀족이나 고관들이 입는 장식용 상의)와 부채를 하사받았습니다. 이 도후쿠는 야스하라가 은 광맥을 발견하기 전에 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지는 세이스이지 절에 기증되었다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지금은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와미 은광 세계유산센터에는 이 도후쿠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마야 갱도 근처에서는 1600년대 초기의 채굴 흔적이 여러 개 발견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은 광맥은 지표면에서 매우 가까운 장소에 위치한 경우가 많아서 광부들은 장소에 따라 갱도를 사용하지 않고 언덕의 경사면을 직접 파고 들어가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지면을 평평하게 고르고 건물을 지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절벽을 깎은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인근에서는 바위에 구멍을 뚫어 빗물이 모이도록 만든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광석을 씻어내어 은을 포함한 작은 조각들을 효과적으로 모으기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들 유구는 이곳에서 발견된 은 제련 부산물과 함께 야스하라 덴베에가 살던 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마지막 갱도군이 만들어진 메이지 시대(1868~1912)까지 가마야 갱도를 중심으로 한 계곡 양쪽에서 대규모의 채굴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釜屋間歩とその周辺


釜屋間歩は、石見銀山の歴史上、最高のサクセスストーリーの1つが生まれたところです。この坑道は、1602年に安原伝兵衛という名の山師により掘られ、彼はすぐに豊かな銀鉱脈を発見します。翌年、釜屋では、その数年前に同鉱山に対する直接的な支配権を掌握していた江戸(現在の東京)の中央政府である将軍家のために、13.5トンという驚くべき量の銀が生産されます。この大変な献上品により、安原は将軍・徳川家康(1543~1616)への謁見を許可され、称号を与えられた上に、華麗な胴服と扇子が贈られました。胴服は、安原が銀鉱脈を発見する前に祈願を行ったとされる清水寺に寄贈され、現在は重要文化財に指定されています。石見銀山世界遺産センターには、胴服の複製品が展示されています。


釜屋間歩の近くでは、1600年代初頭の採掘跡が複数見つかっています。この地域の銀鉱脈は非常に地表に近い場所にあることが多いため、場所によっては、鉱夫たちは坑道を使わず、丘の斜面を直接掘っていたようです。地面を平らにし、建物を建てるためのスペースを作るため、崖も掘削されています。付近では雨水を集めるために岩に穴が掘られましたが、これは鉱石を洗って、銀を含む小片を効率的に集めるために必要とされたものです。これらの遺構は、ここで見つかった銀精錬の副産物と共に、安原伝兵衛の時代から、同地域で最後の坑道群が掘られた明治時代(1868~1912)まで、釜屋間歩を中心とする谷の両側で大規模な採掘が行われたことを示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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