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圓教寺縁起

  • 兵庫県
ジャンル:
神社・寺院・教会 建造物・施設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ワード数:
251-500
作成年度:
2020年
地域協議会名:
書寫山圓教寺観光振興協議会

Origins of Engyōji Temple

Engyōji’s founding abbot, Shōkū (910–1007), began his spiritual journey at the age of 10, when he started studying the Lotus Sutra. At 36, he became a monk and ventured to Kyushu, where he spent the next 20 years in study. In 966, a mysterious cloud drew Shōkū to Mt. Shosha, where he witnessed a heavenly maiden dancing around a cherry tree and reciting holy poetry about the Bodhisattva Nyoirin Kannon. Inspired by the vision, Shōkū carved the tree into a statue of Nyoirin Kannon that became the principal image of the temple’s Maniden Hall.


Born into the aristocratic Tachibana family, Shōkū gained patronage from the noble Fujiwara family and Retired Emperor Kazan (968–1008). The former sovereign visited Mt. Shosha on two occasions during the late tenth century, and it was he who gave the temple the name “Engyōji.” He also declared it an imperially sponsored temple (chokuganji), an honor that came with special privileges and financial benefits. Engyōji soon accrued an active community of monks, and it continued to thrive even after Shōkū’s death.


In 1177, Engyōji had the special privilege of hosting Retired Emperor Goshirakawa (1127–1192), who at the time still held authority over the region. During his seven-day stay at the temple, Goshirakawa demanded to see the statue of Nyoirin Kannon that had been shut in its tabernacle for the two centuries since it had been carved. It was from Goshirakawa that Maniden Hall received its name, which signifies the jewel (Sanskrit: mani) at the heart of Buddhist teachings. Another imperial visit occurred in 1333, when Emperor Godaigo (1288–1339) stayed in the Daikōdō (Great Lecture Hall) on his way back to the capital after a period of exile on the Oki Islands.


Engyōji went through a period of decline during Japan’s long Warring States period (1467–1568). In 1578, the warlord Toyotomi Hideyoshi (1537–1598; then known as Hashiba Hideyoshi) invaded the mountain and converted the temple grounds into a mountain fortress, where he quartered a massive army of some 20,000 troops. During those two years of occupation, the monks and temple buildings suffered catastrophic damage at the hands of the bored and rowdy soldiers.


Engyōji’s fortunes improved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Tokugawa shogunate in 1603. Honda Tadamasa (1575–1631), the lord of Himeji Castle, began a fundraising campaign in 1620 to restore the temple. Further patronage came from successive warrior families that governed the region, including the Matsudaira and Sakakibara families.


During the Edo period (1603–1867), laypeople began flocking to Mt. Shosha as pilgrimages became more and more popular. Engyōji belongs to the “Thirty-three Pilgrimage Sites of Western Japan” (Saikoku Sanjūsansho), a route that spans 1,000 kilometers and seven prefectures. Those who visit all 33 sites are said to receive the blessing of each of Kannon’s 33 forms. The popularity of this belief continues to draw visitors to Engyōji, sustaining its rich history and traditions that date back over a millennium.


圓教寺的歷史


圓教寺的開山祖師性空上人(910-1007)從10歲開始修習《法華經》,由此開啟求法之路。他在36歲時出家為僧,前往九州修行了20年。966年,相傳性空上人被一朵神秘的雲彩吸引到書寫山上。在那裡,他目睹了天女繞著櫻花樹起舞誦偈,讚頌如意輪觀音。受此啟發,性空上人將櫻花樹雕成一尊如意輪觀音像,這尊雕像從此成為圓教寺摩尼殿內供奉的本尊。

性空上人出身貴族橘家,備受貴族藤原家和退位的花山法皇(968-1008)的庇護。花山法皇在10世紀晚期兩次來到書寫山,賜寺名圓教寺,並將其定為敕願寺。從此,寺廟就開始享有特權和經濟上的利益,迅速發展為活躍的佛教教團,在性空上人圓寂後也持續蓬勃發展。

1174年,圓教寺有幸獲得接待後白河法皇(1127-1192)的特權。法皇雖已退位,但仍實權在握。在為期7天的禮佛活動中,法皇要求瞻仰建寺200年來從未自佛龕中現身的如意輪觀音像,並賜名「摩尼殿」——意為佛法寶珠。1333年,後醍醐天皇(1288-1339)從流放地隱岐島返京途中亦曾在圓教寺的大講堂下榻。

漫長的戰國時代(1467-1568),圓教寺逐步勢微。1578年,武將豐臣秀吉(1537-1598,當時名為羽柴秀吉)佔領書寫山,將此處改建為山城後駐紮了約2萬大軍。在2年的佔領期間,無聊暴躁的駐軍經常恐嚇僧侶,破壞寺院建築。

1603年德川幕府成立後,圓教寺的命運開始撥雲見日。為修復寺院,姬路城城主本多忠政(1575-1631)在1620年發起勸募。此後圓教寺一直受到松平家、榊原家等本地歷代藩主的庇護。

到了江戶時代(1603-1867),隨著聖地巡禮的盛行,平民百姓也對書寫山產生了興趣。圓教寺是「西國三十三所」靈場中的一處,這條跨越5縣2府(和歌山縣、大阪府、兵庫縣、京都府、奈良縣、滋賀縣和岐阜縣)、長達1000公里的朝聖之路,也是日本最古老的觀音巡禮路線。相傳完成全部33處朝拜之後,就能獲得觀音菩薩三十三相的祝福。得益於千餘年的悠久歷史和傳統,至今造訪圓教寺的巡禮者依然絡繹不絕。

圆教寺的历史


圆教寺的开山祖师性空上人(910-1007)从10岁开始学习《法华经》,由此开启了求法之路。36岁时,他出家为僧,前往九州修行了20年。966年,性空上人被一朵神秘的云彩吸引到书写山上。在那里,他目睹了天女绕着樱花树边起舞边诵偈,赞颂如意轮观音。受此启发,性空上人将樱花树雕成一尊如意轮观音像,这尊雕像从此成为圆教寺摩尼殿内供奉的本尊。

性空上人出身贵族橘家族,备受贵族藤原家族和退位的花山法皇(968-1008)的庇护。花山法皇在10世纪晚期两次来到书写山,赐寺名圆教寺,并将其定为敕愿寺。从此,寺庙就开始享有特权和经济收益。圆教寺迅速发展为活跃的佛教社区,在性空上人圆寂后依然持续蓬勃发展。

1174年,圆教寺有幸获得接待后白河法皇(1127-1192)的特权。这位法皇虽已退位,但仍实力不俗。在为期7天的礼佛活动中,法皇提出了想要瞻仰建寺200年内从未从佛龛中取出的如意轮观音像的要求。摩尼殿的名称也是后白河法皇所赐,意为佛法宝珠。1333年,后醍醐天皇(1288-1339)从流放地隐岐岛返京途中亦曾在圆教寺的大讲堂下榻。

在漫长的战国时代(1467-1568),圆教寺开始衰退。1578年,武将丰臣秀吉(1537-1598,当时名为羽柴秀吉)占领书写山,将此处改建为山城后驻扎了约2万大军。在2年的占领期间,无聊暴躁的驻军经常恐吓僧侣,破坏寺院建筑。

1603年德川幕府成立后,圆教寺的命运迎来转机。为修复寺院,姬路城城主本多忠政(1575-1631)在1620年发起募资活动。此后圆教寺一直受到松平家族、榊原家族等本地历代藩主的庇护。

江户时代(1603-1867),随着圣地巡礼的盛行,平民百姓也对书写山产生了兴趣。圆教寺是“西国三十三所”中的一处灵场,这条跨越5县2府(和歌山县、大阪府、兵库县、京都府、奈良县、滋贺县和岐阜县)、长达1000公里的朝圣之路,也是日本最古老的观音巡礼线路。相传完成全部33处的朝拜之后,就能获得观音菩萨三十三相的祝福。得益于千余年的悠久历史和传统,至今造访圆教寺的巡礼者依然络绎不绝。

엔교지 절의 유래


엔교지 절의 개조 쇼쿠 대사(910~1007)는 10세에 처음으로 법화경을 공부했고 그 이후 불도에 몸을 바친 인물입니다. 36세에 승려가 되었고 그 후 20년간은 규슈에서 지냈습니다. 966년, 신비한 구름이 쇼쿠 대사를 쇼샤잔 산으로 이끌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천녀가 벚나무 주위에서 춤을 추며 여의륜관음의 경문을 읊고 있었습니다. 쇼쿠 대사는 경문에 큰 영감을 받아 나무에 여의륜관음상을 조각했고, 그 상은 엔교지 절 마니덴(摩尼殿)의 본존이 되었습니다.


쇼쿠 대사는 귀족인 다치바나 집안에서 태어나 쇼샤잔 산에 입산한 뒤에는 고위 귀족인 후지와라 씨와 가잔 법황(968~1008)의 비호를 받았습니다. 가잔 법황은 10세기 후반에 두 차례 쇼샤잔 산을 방문했고 엔교지라는 절 이름을 내렸습니다. 이는 엔교지 절이 황실의 지원을 받는 조쿠간지(勅願寺)임을 의미하며, 특권과 경제적 이익이 보증되는 명예로운 일이었습니다. 엔교지 절은 힘 있는 절로 성장하여 쇼쿠 대사가 입적한 뒤에도 계속 번영했습니다.


1177년, 엔교지 절은 천황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고시라카와 법황을 영접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일주일 동안 기도를 하던 가운데 고시라카와 법황은 완성 뒤 200년 동안 감실에 모셔져 있는 여의륜관음상을 보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그때 고시라카와 법황이 불교 가르침의 진수인 보옥(마니)의 이름을 따서 ‘마니덴’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나아가 1333년에는 천황이 방문했습니다. 고다이고 천황(1288~1339)은 오키노시마 섬에서 유형 생활을 마치고 수도로 돌아오던 도중에 다이코도(大講堂)에 머물렀습니다.


엔교지 절은 긴 전국 시대(1467~1568)에 쇠퇴기를 맞았습니다. 1578년, 다이묘(넓은 영지를 다스린 대영주)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2년 동안 쇼샤잔 산을 점령하고 경내를 산의 요새로 개조하여 2만 명의 병사를 숙영시켰습니다. 이 점령 동안 승려와 사원 건물은 한가하고 난폭한 병사들의 손에 의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1603년에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 뒤 엔교지 절의 운명은 긍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히메지성의 성주 혼다 다다마사(1575~1631)는 1620년에 엔교지 절을 방문하여 사원을 복원하기 위한 모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엔교지 절은 이 지역의 번주인 마쓰다이라 집안, 사카키바라 집안 등 역대 무가로부터도 비호를 받았습니다.


에도 시대(1603~1867)에 순례가 활발해지자 서민이 쇼샤잔 산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엔교지 절은 7개 현에 걸쳐 1,000킬로미터에 이르는 순례길인 ‘사이코쿠 33 관음 성지’에 속해 있습니다. 33성지를 전부 순례한 사람은 관음보살이 변화한 서른세 가지 모습 모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신앙의 인기는 1,000년이 넘는 풍요로운 역사와 전통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지금도 엔교지 절로 순례하러 오는 사람들을 계속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圓教寺縁起

圓教寺の開祖性空上人(910–1007)は、法華経を学び始めた10歳のときから宗教的な道を歩み始めた。36歳で僧侶になり、九州へと旅立った。そこでその後の20年間を過ごした。966年、不思議な雲が性空上人を書寫山に引き寄せた。書寫山で天女が桜の周りで踊りながら、如意輪観音の聖なる偈文を詠じていた。偈文に触発されて、性空上人は木に如意輪観音像を彫った。その像は圓教寺の摩尼殿の御本尊となった。


貴族の橘氏の家に生まれ、性空上人は高級貴族の藤原氏と花山法皇(968–1008)から庇護を受けた。花山法皇は10世紀後半に2回書寫山を訪れ、圓教寺というお名前を授けられた。そのことは圓教寺が皇室によって援助している勅願寺であると宣言されたことである。これは特別な特権と経済的利益を保証する名誉であった。圓教寺は精力的な宗教団体に成長し、性空上人の入寂後も繁栄し続けた。


1177年、圓教寺はまだ権力を保っていた後白河法皇をお迎えする特別な特権を持っていた。7日間の参籠中、後白河法皇は、完成後200年に渡って櫃に納められていた如意輪観音像をご覧になりたいとお求めになった。そのときに摩尼殿は仏教の教えの神髄である摩尼の名前が付けられたのである。さらに1333年に天皇がご訪問なさった。それは後醍醐天皇(1288–1339)で、隠岐島での流刑の後、都にお戻りになる途中で大講堂に御滞在になった。


圓教寺は、日本の長い戦国時代(1467~1568)に衰退期を迎えた。1578年、大名豊臣秀吉(1537~1598)が書寫山に侵入し、寺院の境内を山の要塞に改造した。 秀吉は2万人の兵士たちを宿営させた。この2年におよぶ占領の間に、僧侶と寺院の建物は暇を持て余す乱暴な兵士たちの手によって壊滅的な被害を受けた。


1603年に徳川幕府が成立した後、圓教寺の運命は上向いた。姫路城の城主本多忠政(1575–1631)は1620年に圓教寺を訪問し、寺院を復元するための募金活動を始めた。 その後、この地域の藩主松平家、榊原家など歴代の武家からも圓教寺は庇護を受けた。


江戸時代(1603年~1867年)に巡礼が盛んになると、庶民は書寫山に集まり始めた。圓教寺は、7県にまたがり1,000 kmにも及ぶ巡礼道である「西国三十三所」に属している。33か所すべてを巡礼した人は、観音菩薩の33のお姿のそれぞれの祝福を受けることができると言われている。この信仰の人気は、1000年を超える豊かな歴史と伝統に支えられて、今なお圓教寺への巡礼者を魅了し続け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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