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The Shimabara Rebellion and the Ban on Portuguese Ships

  • Nagasaki
Topic(s):
Historic Sites/Castle Ruins Public Works & Institutions (Museums, etc.)
Medium/Media of Use:
Interpretive Sign Pamphlet
Text Length:
251-500
FY Prepared:
2019
Associated Tourism Board:
「nagasakitoamakusachihonosempukukirishitankanrenisan」hozonkatsuyojikkoiinkai

島原・天草一揆とポルトガル船の来航禁止


1637年、島原藩主 松倉重政およびその息子勝家の苛政と飢饉をきっかけとして、島原・天草一揆が勃発しました。この一揆を率いたのは、かつてのキリシタン大名の旧家臣で禁教後に農民となっていたキリシタンの庄屋たちでした                          

島原の原城に立てこもった一揆軍は2万人以上でした。それに対して幕府軍の兵は12万人で、オランダ船にも支援されていました。4ヶ月間の戦いの末、一揆勢はほぼ全員が殺され鎮圧されました。今回の蜂起を当初からキリシタンが主導したと判断した幕府は、その後キリシタンに対する弾圧をさらに強化しました。1639年、新たな宣教師が国内に潜入するのを防ぐため、幕府は全ポルトガル船の日本への入港を禁止し、ヨーロッパ人の中ではオランダ人のみと交易を行うことを決めました。1641年には平戸から長崎の出島にオランダ商館を移動させました。以降、この日本の対外貿易政策は、禁教政策とともに19世紀後半までの2世紀以上にわたって継続することになります。


人別帳の作成

寺方門徒帳は、転宗を強いて寺の檀家とさせた住民を記帳したものです。最初の寺方門徒帳は、1616年に長崎で作られたとされています。現存する最も古い戸籍帳簿は1634年のものです。その後、絵踏みを済ませた人には印を押すという宗教的な要素が戸籍帳簿に導入され、宗門改(キリシタンでないことを確認する制度)や寺請制度(キリスト教徒に改宗を強制するために制定された制度)が定着していきました。


潜伏キリシタンの摘発

このような厳しい禁教下でも、多くの宣教師が日本潜入を試みました。しかし、宣教師たちは最終的に全員捕えられ、ほとんどが殉教しましたが、中には棄教するものもいました。1644年、最後の宣教師小西マンショが殉教し、日本のキリシタンは彼らを教え導く宣教師が不在の状態で取り残されました。

1657年、ほとんどのキリシタンが処刑されるか改宗させられていた中、大村藩内でキリシタンの存在が発覚しました。第17代長崎奉行 黒川与兵衛正直は、608名を検挙し、そのうち411名を斬首しました。 

図1                                                

《聖体秘蹟図指物》

(天草四郎陣中旗)1637年

(天草市立天草キリシタン館)


図2

《踏絵》一部

フィリップ・フランツ・バルタザール・フォン・シーボルト『日本』より 19世紀

長崎歴史文化博物館蔵

島原-天草起義及對葡萄牙船隻的禁航


1637年,由於島原藩主松倉重政及其子勝家實施暴政,加之饑荒肆虐,導致「島原-天草起義」爆發。率領這一起義的是吉利支丹「庄屋(相當於現今的村長)」們,他們曾是吉利支丹大名的家臣,於禁教後成為農民。

當時約有超過兩萬名起義軍揭竿而起,固守在島原的原城內。幕府軍則有12萬人,身後更有荷蘭船隻的支援。戰爭持續了四個月,起義軍慘遭鎮壓,幾乎全軍覆沒。幕府從一開始便將起義禍源歸咎於吉利支丹起義軍,日後對吉利支丹的打壓更是不遺餘力。

1639年,為避免更多傳教士偷渡入國,幕府全面禁止葡萄牙船入港日本,並宣布只與荷蘭進行貿易,將其他歐洲人拒之門外。1641年,荷蘭商館受命從平戶遷至長崎出島。其後日本這一對外貿易政策連同禁教措施,持續了兩個多世紀,直至19世紀後半才告終。


導入「人別帳(戶籍)」

「寺方門徒帳」是一份名單,記錄了被強制改宗,成為寺院「檀家(施主)」的居民。據推測,史上第一本寺方門徒帳誕生於1616年的長崎。現存最古老的戶籍帳簿可追溯至1634年。其後更導入了在戶籍帳簿上為完成踏繪儀式者蓋章認證這一頗具宗教意味的制度,使「宗門改(宗教調查)」及「寺請制度(民眾必須成為檀家,歸屬寺院,進而證明自己非吉利支丹的制度)」就此紮根。


舉報潛伏吉利支丹

即使當時日本已實施嚴格的禁教政策,仍有許多傳教士嘗試潛入日本。然而這些傳教士最後悉數被捕,無一倖免,除部分選擇棄教外,幾乎全員殉教。1644年,最後一位傳教士小西曼西奧殉教,日本的吉利支丹從此在失去傳教士的指引下,獨自前行。

1657年,在吉利支丹幾乎均遭處死或被迫改宗之時,大村藩內卻發現了吉利支丹的存在。「第17代長崎奉行・與兵衛」——黑川正直舉發608人,將其中411名斬首。


(圖1)

《聖體秘蹟圖指物》

(天草四郎陣中旗)1637年

(天草市立天草吉利支丹館)


(図2)

《踏繪》局部

出自菲利普·法蘭茲·馮·西博德《日本》 19世紀

長崎歷史文化博物館藏

岛原-天草起义及对葡萄牙船只的禁航


由于岛原藩主松仓重政及其子胜家实施苛政,加之饥荒肆虐,导致“岛原-天草起义”于1637年爆发。率领这一起义的是吉利支丹“庄屋”(相当于现今的村长)们,他们曾经是吉利支丹大名的家臣,于禁教后归农。

当时约有超过两万名起义军揭竿而起,固守在岛原的原城内。幕府军则有12万人,身后更有荷兰船只的支援。战争持续了四个月,起义军惨遭镇压,几乎全军覆没。幕府从一开始便将起义祸源归咎于吉利支丹起义军,日后对吉利支丹的打压更是不遗余力。

1639年,为避免更多传教士偷渡入国,幕府全面禁止葡萄牙船入港日本,并宣布只与荷兰进行贸易,将其他欧洲人拒之门外。1641年,荷兰商馆受命从平户迁至长崎出岛。日本这一对外贸易政策连同禁教措施,持续了两个多世纪,直至19世纪后半叶才告终。


导入“人别帐”(户籍)

“寺方门徒帐”是一份记录了被强制改宗,成为寺院“檀家”(施主)的居民名单。据推测,史上第一本寺方门徒帐诞生于1616年的长崎。现存最古老的户籍帐簿可追溯至1634年。其后更导入了“在户籍帐簿上为完成踏绘仪式者盖章认证”这一颇具宗教意味的制度,使“宗门改”(宗教调查)及“寺请制度”(民众必须成为檀家,归属寺院,进而证明自己非吉利支丹的制度)就此扎根。


检举潜伏吉利支丹

尽管当时日本已实施严格的禁教政策,但仍有许多传教士尝试潜入日本。然而这些传教士最后悉数被捕,无一幸免,除部分选择弃教外,几乎全员殉教。1644年,最后一名传教士小西曼西奥殉教,日本的吉利支丹从此在失去传教士的指引下,独自摸索前行。

1657年,在吉利支丹几乎均遭处决或被迫改宗之时,大村藩内却发现了吉利支丹的存在。“第17代长崎奉行・与兵卫”——黑川正直举发608人,并将其中411名斩首。


(图1)

《圣体秘迹图指物》

(天草四郎阵中旗)1637年

(天草市立天草吉利支丹馆)


(図2)

《踏绘》局部

出自菲利普·法兰兹·冯·西博德《日本》 19世纪

长崎历史文化博物馆藏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과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 금지


1637년, 시마바라 번의 번주 마쓰쿠라 시게마사와 그의 아들 가쓰이에의 폭정과 기근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봉기를 이끈 사람들은 과거 기리시탄 다이묘(영주)의 옛 가신이자 그리스도교 금교 후에 농민으로 생활하던 기리시탄의 촌장들이었습니다.                          

시마바라의 하라 성에서는 2만 명 이상의 봉기군들이 농성했습니다. 그에 반해 막부 군의 병사는 12만 명으로 네덜란드 선박의 지원도 받았습니다. 4개월 간의 전투 끝에 봉기군 대부분이 사살되면서 진압되었습니다. 이 봉기를 처음부터 기리시탄이 주도했다고 판단한 막부는 이후 기리시탄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했습니다. 1639년, 새로운 선교사가 일본 국내에 잠입하지 못하도록 막부는 모든 포르투갈 선박의 일본 입항을 금지하고 유럽인 중에서는 네덜란드인과의 무역만을 허가했습니다. 1641년에는 히라도에서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네덜란드 상관을 이전시켰습니다. 이후, 일본의 대외 무역 정책은 금교 정책과 함께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2세기에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호적 대장의 작성

데라카타몬토초(寺方門徒帳)는 개종을 강요당해 절의 신도가 된 주민을 기록한 장부입니다. 1616년에 나가사키에서 처음으로 데라카타몬토초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 대장은 1634년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후 에부미(신앙심을 증명하기 위해 성화상 등을 밟게 했던 방법)를 따른 사람에게는 표식을 부여하는 종교적인 요소가 호적 대장에 적용됨에 따라, 슈몬아라타메(기리시탄이 아님을 확인하는 제도)와 데라우케 제도(그리스도교 신자에게 개종을 강제할 목적으로 제정된 제도)가 정착되었습니다.


잠복 기리시탄의 적발

이처럼 엄격한 금교기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잠입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모든 선교사들이 체포되면서 대부분 순교했으나, 그중에는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644년에 마지막 선교사인 고니시 만쇼가 순교하면서 일본은 기리시탄을 지도할 선교사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657년, 기리시탄의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개종을 강요당하는 가운데, 오무라 번에서 기리시탄들이 발각되었습니다. 제17대 나가사키 부교 구로카와 요헤이 마사나오는 608명의 기리시탄을 검거하고 그중 411명을 참수했습니다. 

그림 1                                                

《성체성사의 그림》

(아마쿠사 시로 진중기(陣中旗)) 1637년

(아마쿠사 시립 아마쿠사 기리시탄관)


그림 2

《후미에》 일부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 『일본』 발췌, 19세기

나가사키 역사 문화 박물관 소장

The Shimabara Rebellion and the Ban on Portuguese Ships

In 1637, a combination of famine and the despotic policies of Matsukura Shigemasa and his son Katsuie, lords of the Shimabara Peninsula, prompted the outbreak of the Shimabara Rebellion. It was led by Christian village heads, former vassals of Christian daimyo, who had become farmers after the ban on Christianity.

The rebel army consisted of something over 20,000 men, who barricaded themselves in Shimabara’s Hara Castle. The shogunate had a force 120,000 strong, supported by Dutch ships. After four months of fighting, the rebel forces were defeated and most of them massacred. The shogunate, which had chosen to see the uprising as a Christian revolt from the start, subsequently cracked down on the Christians with even greater severity.

In 1639, in an effort to prevent more missionaries slipping into the country, the shogunate banned all Portuguese ships from entering Japan and made a policy decision to trade exclusively with the Dutch, shutting out other Europeans. In 1641, they compelled the Dutch to move their trading post from Hirado to Dejima in Nagasaki. This policy on external trade, together with the prohibition on religion, was to last for over two centuries, finally ending in the second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


Introducing Family Registries

A terakatamontochō is a written record of local residents forced to convert and become temple parishioners. The first of these records is thought to have been compiled in Nagasaki in 1616. The oldest extant family registry dates from 1634. Subsequently, family registries with a religious element were introduced, in which the names of people who had completed the ebumi trampling ceremony were stamped, establishing an anti-Christian form of religious census along with the temple-affiliation certification system.


Exposing Hidden Christians

Despite the strict ban on Christianity, numerous missionaries tried to enter Japan. Ultimately, they were all captured; most were martyred, though some actually renounced their faith. The last missionary to Japan, Konishi Mansho, was martyred in 1644, and the Catholics of Japan were then left with no missionaries to guide them.

In 1657, at a time when most Christians had been either executed or forced to convert, some followers of the faith were found in the Ōmura domain. The seventeenth Nagasaki magistrate, Kurokawa Yohei Masanao, rounded up 608 people and beheaded 411 of them.



PICTURE 1

Detail from Picture of the Sacrament of the Eucharist

(battle flag of Amakusa Shirō), 1637

(Amakusa Christian Museum)



PICTURE 2

Detail from “Trampling on a Christian Image”

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 Nippon: 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 und dessen Neben- und Schutzländern: Jezo mit den südlichen Kurilen, Krafto, Koorai und den Liukiu-Inseln, 19th century

Nagasaki Museum of History and Cultur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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