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Site of Mirokuji Temple

  • Oita
Topic(s):
Historic Sites/Castle Ruins Shrines/Temples/Churches Public Works & Institutions (Museums, etc.)
Medium/Media of Use:
Web Page
Text Length:
≤250 Words
FY Prepared:
2021
Associated Tourism Board:
usachiku machizukuri kyogikai
Associated Address:
2858, Minamiusa, Usa-shi , Oita

弥勒寺跡

何世紀にもわたって、宇佐神宮境内の一部は弥勒寺という寺院によって占められていましたが、その跡地は呉橋と八坂神社の間に現在も見ることができます。その歴史の大部分において弥勒寺は、神社とお寺の複合体であった宇佐神宮の中の重要なお寺であり、皇室や貴族、そして武士の一族の支援を享受し、傑出した政治的・経済的な権力を持っていました。


弥勒寺は広大な荘園を有し、九州だけでなく全国に影響を及ぼしました。歴史的な記録や地図によると、弥勒寺の境内は、現在の西参道の両側に広がり、お堂、塔、宿坊などの数十の建物で構成されていました。金堂(本堂)には薬と癒しの仏である薬師如来が祀られており、講堂には次の仏として遠い未来にこの世に現れるとされている弥勒菩薩を祀っていました。


宇佐神宮内の最も主要な寺院

弥勒寺の前身は弥勒禅院という古いお寺で、宇佐神宮の最初の御殿が725年に小椋山に建てられたすぐ後の738年に、小椋山と寄藻川の間の平野に移されました。ほどなくして弥勒寺は、神宮寺(神社と密接につながり、通常はその神社の境内または神社の近くにある寺院のこと)の最も初期の例の1つへと発展しました。これにより宇佐神宮は、8世紀頃に九州で形成されていた神道と仏教の融合(神仏習合)を反映した、神社と寺院の複合体になりました。そのような複合施設の中の寺院は、僧侶を神社での儀式などに派遣したり、財務の管理を行ったり、時には複合施設全体の運営を完全に管理したりすることもありました。9世紀後半までに、弥勒寺は宇佐神宮のすべての事柄において重要な役割を果たすようになり、宗教的および事務的な機能の両方を果たしました。


弥勒寺の権力の喪失と終焉

12世紀の平氏と源氏による権力闘争の間、宇佐神宮の宮司は平氏側につくことを選びました。この闘争の中、弥勒寺は宇佐神宮とともに1184年に焼き払われ、そして一年後、1185年に平氏が敗北しました。その後、この複合体は再建されましたが、弥勒寺の権力は衰え始めました。弥勒寺は所有する土地を徐々に失い、境内の建物の数は減少し、19世紀半ば頃になると、もはや修復されなくなっていました。1868年に明治政府は神仏分離令を発令し、1871年までにすべての仏教の建造物などが宇佐神宮から取り除かれました。かつての弥勒寺の境内には現在、宇佐神宮の事務所、宝物館、美しい庭園があり、弥勒寺の過去の栄光を思い出させるものとしては礎石だけが残っています。しかし、弥勒寺の最も貴重な仏像は保存されており、現在、弥勒大仏像は近くの極楽寺に安置され、薬師如来像は川の向こう側の大善寺にあります。


彌勒寺遺址


在過去長達數世紀的時間裡,宇佐神宮域內曾經坐落了一座名為「彌勒寺」的大佛寺。如今,遊客依然能在吳橋和八坂神社之間一窺寺院遺跡。在其大部分歷史中,這座佛寺都是宇佐神宮的重要組成部分,得到來自皇室、貴族和武士家族的支持,因此在政治和經濟上的權勢十分強大。

彌勒寺曾經佔有大片土地,影響力蔓及九州乃至全國。史料及地圖顯示,這座寺院擁有數十處建築,佛堂、佛塔、僧侶的生活空間等場所曾分佈在如今的西參道兩旁。寺院金堂(大雄寶殿)供奉著藥師如來,講堂供奉彌勒佛,在佛教經義裡,彌勒佛是下一任佛陀,將在遙遠的未來降生人世。


宇佐神宮的主佛寺

彌勒寺的前身是一座名叫「彌勒禪院」的古寺。西元725年,小椋山上建起了宇佐神宮的第一座社殿。738年彌勒禪寺就隨之搬到了小椋山和寄藻川之間的平原。不久,彌勒寺就成為了最初成立的神宮寺之一。所謂「神宮寺」,就是與神道教神社關係密切的佛教寺院,多坐落於神社域內或相距不遠處。宇佐神宮也因此成為了一處「神社—佛寺綜合設施」。這類被稱為「神佛習合」的神社,是神道教與佛教融合的產物。這種宗教形態於8世紀左右在九州地區成形,並逐漸傳播至全日本。在此類神社裡,佛寺僧侶會參與神道教的祭典、儀式,掌管財務,有的還會全權掌控整個機構。至9世紀晚期,彌勒寺已經成為宇佐神宮日常運作的核心,擔負起宗教和管理的雙重職能。


彌勒寺的式微與終結

在12世紀平家與源氏的權力鬥爭中,宇佐神宮的宮司(神宮最高負責人)選擇支持平家,因而被捲入衝突之中的宇佐神宮和彌勒寺在1184年慘遭焚毀。時隔一年後的1185年,平家戰敗。儘管這處神社—佛寺綜合設施隨後被重建,但彌勒寺的影響力已不復從前。寺院漸漸失去了它擁有的土地,建築也逐漸縮減,到19世紀中期時,已經沒有人試圖重振這座佛寺往日的輝煌了。1868年,明治政府頒佈分離神道教和佛教的「神佛判然令」,至1871年,宇佐神宮內的所有佛教建築及相關物品均被移除。彌勒寺舊址上建起了如今的社務所、寶物館和美麗的庭園,曾經輝煌的寺廟只剩下殘座。不過,彌勒寺裡最珍貴的佛像都被保存了下來——彌勒佛坐像如今供奉在相距不遠的極樂寺中,藥師佛坐像則珍藏於與極樂寺隔河相望的大善寺內。

弥勒寺遗址


在过去长达数世纪的时间里,宇佐神宫区域内曾经坐落了一座名为“弥勒寺”的大佛寺。如今,来访者依然能在吴桥和八坂神社之间窥见寺院遗迹。在这座佛寺的大部分历史时期中,它都是宇佐神宫的重要组成部分,得到来自皇室、贵族和武士家族的支持,因此在政治和经济上的权势十分强大。

弥勒寺曾经占有大片土地,影响力辐射九州乃至全国。史料及地图显示,这座寺院拥有数十处建筑,佛堂、佛塔、僧侣的生活空间等设施曾分布在如今的西参道两旁。寺院金堂(大雄宝殿)供奉着药师如来,讲堂供奉弥勒佛,在佛教经义里,弥勒佛是下一任佛陀,将在遥远的未来降生人世。


宇佐神宫的主佛寺

弥勒寺的前身是一座名叫“弥勒禅院”的古寺。公元725年,小椋山上建起了宇佐神宫的第一座社殿。738年弥勒禅寺随之搬到了小椋山和寄藻川之间的平原。不久,弥勒寺就成为了最初成立的神宫寺之一。所谓“神宫寺”,就是与神道教神社关系密切的佛教寺院,多坐落于神社内或相距不远处。宇佐神宫也因此成为了一处“神社—佛寺综合设施”。这种被称为“神佛习合”的神社,是神道教与佛教融合的产物。这种宗教形态于8世纪左右在九州地区成形,并逐渐传播至全日本。在此类神社里,佛寺僧侣会参与神道教的祭典、仪式,掌管财务,有的还会全权掌控整个机构。至9世纪晚期,弥勒寺已经成为宇佐神宫日常运营的核心,担负起宗教和管理的双重职能。


弥勒寺的式微与终结

在12世纪平家与源氏的权力斗争中,由于宇佐神宫的宫司(神宫最高负责人)决定支持平家,使得宇佐神宫和弥勒寺被卷入冲突之中,并在1184年惨遭焚毁。时隔一年后的1185年,平家战败。尽管这处神社—佛寺综合设施随后被重新建造,但弥勒寺的力量已不复从前。寺院渐渐失去了它拥有的土地,建筑也被缩减,到19世纪中期时,已经没有人试图重振这座佛寺了。1868年,明治政府颁布分离神道教和佛教的“神佛判然令”,至1871年,宇佐神宫内的所有佛教建筑及相关物品均被移除。弥勒寺旧址上建起了如今的社务所、宝物馆和美丽的庭园,曾经辉煌的寺庙只剩下础石残基。不过,弥勒寺里最珍贵的佛像都被保存了下来——弥勒佛坐像如今供奉在相距不远的极乐寺中,药师如来坐像则珍藏于与极乐寺隔河相望的大善寺内。

미로쿠지(彌勒寺, 미륵사) 절(彌勒寺, 미륵사) 터


수세기 동안 우사 신궁 경내에 서 있던 미로쿠지 절의 흔적은 구레하시 다리와 야사카 신사 사이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신사와 사찰이 융합된 종교 시설이었던 우사 신궁에서 오랫동안 가장 중요한 사찰로 여겨졌던 미로쿠지 절은 황실과 귀족, 그리고 무사 가문의 지원을 받으며 매우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미로쿠지 절은 광대한 쇼엔(荘園, 사찰이 직접 영유하거나 지배하는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영향력은 규슈뿐만 아니라 일본 전국에 미칠 정도였습니다. 역사적 기록과 지도를 살펴보면 미로쿠지 절의 경내는 현재의 서쪽 참배길 양쪽으로 펼쳐지고 사당, 탑, 슈쿠보(宿坊, 승려나 참배자를 위한 숙박시설) 등 수십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당(본당)에는 약과 치유의 부처인 약사여래가, 강당에는 먼 미래에 나타날 다음 세상의 부처인 미륵보살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우사 신궁 내에서 가장 중요한 사찰

미로쿠지 절의 전신은 미로쿠젠인(彌勒禪院, 미륵선원)이라 불리는 사원으로, 725년 우사 신궁 최초의 신전이 오구라산에 지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738년에 오구라산과 요리모강 사이의 평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곧 미로쿠지 절은 신궁사(신사와 밀접하게 연결된 사원으로 보통 그 신사의 경내 또는 신사의 주변부에 위치함)의 가장 초기 예 중 하나로 발전했습니다. 이렇게 우사 신궁은 8세기경까지 신토와 불교가 융합된 신앙 형태(신불습합)를 반영한 종교 시설이 되었습니다. 미로쿠지 절은 우사 신궁에서 열리는 의식 등에 승려를 파견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신불습합의 대표적인 사찰로 발전했고 그에 따른 강력한 권력 또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11세기 무렵 우사 신궁과 함께 규슈 지역 최대의 장원 영주가 된 미로쿠지 절은 독자적으로 소유한 장대한 쇼엔을 바탕으로 조금씩 우사 신궁에서 독립해 나갔지만, 제례(신토의 의식)와 법요(불교의 의식) 등을 통해 우사 신궁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미로쿠지 절의 권력 상실과 종말

12세기에 헤이시(다이라 가문)와 겐지(미나모토 가문)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지자, 우사 신궁의 궁사는 헤이시에 가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로쿠지 절은 우사 신궁과 함께 1184년 불에 타 파괴되었고 1년 뒤인 1185년에는 헤이시가 패배했습니다. 그 후 미로쿠지 절을 포함한 우사 신궁은 다시 재건되었지만, 미로쿠지 절의 권력은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후였습니다. 미로쿠지 절이 소유했던 땅이 점점 사라지고 경내에 있던 건물의 수도 점차 줄어들자,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재건을 시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868년에는 메이지 정부가 신불판연령(神佛判然令)을 내리면서 1871년까지 모든 불교 건축물 등이 우사 신궁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과거 미로쿠지 절의 경내에 해당하던 자리는 현재 우사 신궁의 사무소와 칙사 재관,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이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로쿠지 절의 과거 영광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초석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로쿠지 절의 가장 귀중한 불상은 안전하게 보존되었습니다. 현재 미륵불좌상은 인근의 고쿠라쿠지 절(極樂寺)에, 약사여래좌상은 강 건너편에 있는 다이젠지 절(大善寺)에 각각 안치되어 있습니다.

Site of Mirokuji Temple

For many centuries, part of the Usa Jingu shrine grounds was occupied by a large Buddhist temple called Mirokuji, the remains of which can still be seen between the Kurehashi Bridge and Yasaka Jinja Shrine. Throughout much of its history, the temple was an important part of the Usa Jingu complex and enjoyed the support of the imperial family, nobility, and warrior clans, allowing it to become a prominent political and economic force in its own right.


Mirokuji owned vast amounts of land and exerted influence not only in Kyushu, but throughout the entire country. Historical records and maps show that the temple had dozens of structures, including worship halls, pagodas, and living quarters, spreading along both sides of the present-day Nishi Sando Path. The Kondo (Main Hall) was dedicated to Yakushi Buddha, the deity of medicine and healing, and the Kodo (Lecture Hall) enshrined Miroku, the bodhisattva expected to appear in this world in the distant future as the next Buddha.


Main Buddhist Temple in the Usa Jingu Shrine-Temple Complex

Mirokuji originated from an older temple called Mirokuzen’in, which was moved to the plain between Mt. Ogura and the Yorimo River in 738, not long after the first sanctuary of Usa Jingu was built on the mountain in 725. Mirokuji soon evolved into one of the earliest examples of a jinguji, a Buddhist temple closely connected to a Shinto shrine and usually located on or near the shrine grounds. Usa Jingu thus became a shrine-temple complex, reflecting the syncretic fusion of Shinto and Buddhism (shinbutsu shugo) that took shape in Kyushu around the eighth century and gradually spread throughout Japan. Buddhist temples within such complexes provided monks to participate in ceremonies and rituals at the shrine, managed finances, and sometimes fully controlled the operations of the entire complex. By the late ninth century, Mirokuji came to play a prominent role in all affairs of Usa Jingu, performing both religious and administrative functions.


Loss of Power and Final Years of Mirokuji

During the struggle for power between the Taira and the Minamoto clans in the twelfth century, the head priest of the Usa Jingu complex chose to side with the Taira. In the midst of the conflict, in 1184 both Usa Jingu and Mirokuji were burned down, and the Taira were defeated a year later, in 1185. Even though the complex was subsequently rebuilt, the power of Mirokuji began to wane. The temple gradually lost the lands it owned, the number of buildings dwindled, and by the mid-nineteenth century no more attempts were made to revive it. In 1868, the Meiji government issued an order to separate Shinto and Buddhism, and all Buddhist structures and objects of worship were removed from Usa Jingu by 1871. The former Mirokuji grounds now contain the shrine offices, the Treasure Hall, and beautiful gardens, with only the foundation stones left as a reminder of the temple’s past glory. The most valuable statues of Mirokuji, however, were saved: the large statue of Miroku is now on display at Gokurakuji Temple nearby, and the statue of Yakushi Buddha is housed at Daizenji Temple across the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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