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The Life of Oda Uraku

  • Aichi
Topic(s):
Historic Sites/Castle Ruins
Medium/Media of Use:
App, QR code, etc. Web Page Pamphlet
Text Length:
251-500
FY Prepared:
2022
Associated Tourism Board:
Nagoya Railroad Co.,Ltd.

「有楽の生涯」


織田有楽の生涯


 織田長益は、1547年に織田信秀(1511-1549)の11男として尾張国(現在の愛知県西部)で生まれました。剃髪してからは「有楽」と名乗りました。有楽の兄である、織田信長(1534-1582)は、後に天下統一を目指した三大武将の最初の一人で、徳川幕府による中央集権的支配へと結実しました。有楽は、2番目に天下統一した豊臣秀吉(1537-1598)、3番目に天下統一した徳川家康(1543-1616)とも親交がありました。

 このような有力な武将との繋がりがあったにも関わらず、有楽は武人としてよりも文化人として知られ、日本史上最も影響力のある茶人、千利休(1522-1591)に師事し茶道を学びました。激動の時代であった16世紀末から17世紀初頭にかけて有楽は頻繁に茶会を開き、諸派の和議を成立させました。後に京都の寺に隠棲した有楽は、そこに彼の代表作である茶室「如庵」を建てました。


青年時代

 有楽の若い頃については、ほとんど知られていません。20歳だった1567年に、兄の信長が制圧したばかりの岐阜で信長と合流しました。1581年、カトリックの宣教師らが岐阜の地を訪れ、数百もの人々に洗礼を授けました。確たる記録は残っていませんが、洗礼を受けた者の中に有楽も含まれ、日本語で「ジョアン」と発音する「João」(「John」のポルトガル語)を洗礼名としてつけたとも言われています。後に有楽は自身の茶室にこの名前を付けることになります。

 1582年に災難に見舞われました。有楽と信長が京都の本能寺を訪れたとき、信長は臣下の一人である明智光秀(1528-1582)に裏切られ、その軍勢に本能寺を包囲されてしまったのです。信長は捕虜になることを選ばず自害しました。信長の長男である織田信忠(1557-1582)は、父と自害するか逃亡するかで迷っていたと伝えられています。有楽の助言に従い信忠はその場にとどまり切腹しましたが、有楽自身は立ち去りました。


茶会を通じた調和の実現

 信長が存命のうち、有楽は織田家の指南役である茶人・千利休に師事していました。数年後、利休が豊臣家に仕えるようになった頃に、有楽は再び利休のもとで学びました。また、ある記録によれば有楽は利休七哲(千利休の弟子の中でも特に優れた7人の弟子)の一人として名を連ねています。

 有楽の茶道への探求心は、当時の政局においても重要な役割を果たしていました。有楽は16世紀後半、広範囲にわたる平和活動の一環として、数々の重要な局面で調停役として茶会に参加しました。1585年には、信長のかつての家臣であった豊臣秀吉と、信長の次男であり後継者の織田信勝(1558-1630)との間での和平交渉をまとめ上げました。その後まもなく、有楽は秀吉や、秀吉の元側近であり助言者でもあった徳川家康との茶会に参加し、1586年には、この二人の間の和平協定を実現させました。


対立する忠誠心

 1598年に秀吉が亡くなると、徳川家康は権力の空白を埋めるために動き出しました。家康は、秀吉の後継者や家臣たちとの間で争いを始め、1600年の関ヶ原の戦いで勝利を収め、将軍の座を手にしました。有楽は、関ヶ原の戦いでは家康側の武将として活躍し、その功績により大きな領地を授けられました。

 秀吉の側室である淀殿(1567-1615)と、その幼い息子である秀頼(1593-1615)を除き、家康は1614年までに秀吉派の残党を制圧しました。淀殿と秀頼は大坂城に立てこもり、支援者を集め始めました。淀殿の叔父である有楽は、幾度となく淀殿に家康との和解を働きかけましたが、敵対関係が続くことに業を煮やした有楽は、1615年初頭に大坂を去りました。同年6月、家康の攻撃により城は陥落し、淀殿と秀頼は自害に追い込まれました。


隠居

 大坂での経験に落胆したためか、同年、有楽は京都に隠棲しました。1617年には、建仁寺と交渉を行い、老朽化した拝殿の一つを再建し、隠居するための住居を建てる許可を得ました。そして1618年には新たに完成した正伝院という名の寺院に移り住みました。その3年後に有楽は75歳で亡くなり、邸宅の敷地内に葬られました。


有楽が遺したもの

 有楽の後継者や弟子たちは、「有楽流」と呼ばれる茶の流派を受け継ぎ、その伝統は現在も継承されています。1972年3月23日には、有楽流の第15代宗家(ある一族、一門において正嫡の家系)である織田長繁(1918-1992)が、有楽苑の建設に立ち会いました。

 有楽が茶の湯(客を招き、抹茶を立てて楽しむこと。茶道の意義に近いが、より「お茶を楽しむ」ことを重視する。またはその会合)で最も重視したのは、心をこめて客をもてなすこと、そして客が快適に過ごすことでした。また、有楽は、茶人たちが大家のやり方を真に理解しないで、創意工夫することなく模倣することに批判的でした。有楽の主体性は、師匠の教えに縛られることなくその教えを反映させた「如庵」のデザインに表れています。

織田有樂生平


織田有樂,本名織田長益,於1547年出生在尾張國(今愛知縣西部;「國」是日本古代行政區劃,並非國家。)相比於本名,其茶名「有樂」或「有樂齋」更為人所知。當時,勢力強大的織田家統治著尾張國,織田有樂是家主織田信秀(1511-1549)的第11個兒子,兄長織田信長(1534-1582)後來成為逐鹿天下、統一日本的三位「天下人」中的第一位,并推動日本最終成為了中央集權化的德川幕府。織田有樂與第二、第三位「天下人」豐臣秀吉(1537-1598)、德川家康(1543-1616)也往來甚密。

儘管與諸多強大的軍事人物的關係密切,織田有樂被後世銘記卻不是因他的戰績,而是他卓越的文化成就。織田有樂曾跟隨日本歷史上最有影響力的茶人千利休(1522-1591)學習茶道,在16世紀晚期至17世紀早期動盪的幾十年中,經常借茶會之機促成各大軍閥的和談。最後,他選擇在京都的一間佛寺內隱居,建造了他的傑作——如庵茶室。


青年時代

織田有樂的青少年時期鮮為人知。1567年,20歲的他與兄長織田信長一起來到後者剛剛征服的岐阜城。1581年,基督教傳教士進入該地區,數百人受洗。儘管沒有明確記錄,但坊間流傳織田有樂也是受洗者之一,他的受洗名叫「João」(葡萄牙語的John),在日語中的發音為「Jo-an」,後來他便以同音的「如庵」命名了自己的茶室。

1582年,織田有樂跟隨兄長織田信長拜訪京都本能寺時,織田信長麾下將領明智光秀(1528-1582)發動叛亂,將寺院團團圍住。織田信長不願淪為階下囚,自殺身亡。傳說他的長子織田信忠(1557-1582)當時處在隨父親自盡還是逃生的兩難境地中,最終聽從織田有樂的建議選擇自盡,然而織田有樂卻脫逃了。


茶會調停人

在織田信長去世前,千利休曾出任織田家的顧問,織田有樂因此得有機緣拜千利休為師。數年後,千利休又受聘於豐臣家,織田有樂有幸再度師從於他。有些文獻將他列為千利休門下的「七哲」之一。

醉心茶學的織田有樂在當時的政局中扮演了重要角色。在16世紀後半葉的幾次關鍵事件中,他均以調停人的身份參加茶會,為和平盡一己之力。1585年,他安排原織田信長麾下大將豐臣秀吉和織田信長次子兼繼承人織田信雄(1558-1630)談判,並促成雙方達成了和平協議。此後不久,他又參加了豐臣秀吉與其曾經的親信德川家康的茶會,並在1586年令這兩大崛起的軍事勢力間達成了和解。


搖擺的忠心

1598年豐臣秀吉去世,德川家康趁機填補權力空白,與豐臣秀吉的繼承人和家臣展開了鬥爭。1600年,德川家康在關原之戰中取得決定性勝利,確立了將軍地位。織田有樂在德川家康麾下參加了關原之戰,勝利後獲得了大片領地。

1614年,德川家康成功征服了豐臣秀吉的同盟勢力,只餘下豐臣秀吉的側室澱殿夫人(1567-1615)及年幼的繼承人豐臣秀賴(1593-1615)一脈。二人以大坂城(今大阪城)為據點,開始招兵買馬。織田有樂是澱殿夫人的舅父,反覆勸說她與德川家康議和,多次遭拒後感到十分沮喪,於1615年初離開大坂。當年6月,德川家康攻入大坂城,澱殿夫人與豐臣秀賴自盡。


退隱

或許由於在大坂遭受的打擊,織田有樂於1615年在京都隱退。1617年,他與建仁寺商議,希望准許他重修寺內一座破落的「塔頭」(附屬寺院)為自己建造隱居之所。1618年,他搬入新完工的居所,將其命名為「正傳院」。3年後,織田有樂辭世,終年75歲,葬於宅邸院內。


織田有樂的傳承

織田有樂的後人和弟子所傳承的茶道流派稱為「有樂流」,至今仍然活躍。1972年3月23日,在有樂苑修建期間,有樂流第15代宗主織田長繁(1918-1992)亦曾到訪。

織田有樂認為,茶道最重要的就是使客人如沐春風,反對那些只會模仿大師,卻不理解茶道真義,也沒有自己的思想與創新的習茶者。如庵的設計是他獨立精神的明證,既反映了其師的教誨,卻又不拘泥其中。

织田有乐生平


织田有乐,本名织田长益,于1547年出生于尾张国(今爱知县西部;“国”是日本古代行政区划,有别于国家。)比起本名来,其茶名“有乐”或“有乐斋”更为人所知。织田有乐是尾张国的统治者、势力强大的织田家族家主织田信秀(1511-1549)的第11个儿子。他的兄长织田信长(1534-1582)后来成为逐鹿天下、统一日本的三位“天下人”中的第一位,并促进日本最终过渡到了中央集权化的德川幕府。织田有乐与第二、第三位“天下人”丰臣秀吉(1537-1598)、德川家康(1543-1616)也往来甚密。

尽管与诸多强大军事人物的关系密切,但织田有乐被后世铭记却不是因其战绩,而是他卓越的文化成就。织田有乐曾跟随日本历史上最有影响力的茶人千利休(1522-1591)学习茶道,在16世纪晚期至17世纪早期动荡的几十年中,经常借茶会之机促成各大军阀的和谈。最终,他选择在京都的一间佛寺内隐居,并在那里建造了他的杰作——如庵茶室。


青年时代

织田有乐的青少年时期鲜为人知。1567年,20岁的他与兄长织田信长一起来到后者刚刚征服的岐阜城。1581年,基督教传教士进入该地区,为数百人施行了洗礼。尽管没有明确记录,但坊间流传织田有乐也是受洗者之一,他的受洗名叫“João”(葡萄牙语的John),在日语中的发音为“Jo-an”。后来他以同音的“如庵”命名了自己的茶室。

1582年,灾祸来袭。织田有乐跟随兄长织田信长拜访京都本能寺时,织田信长麾下将领明智光秀(1528-1582)发动叛乱,将寺院团团围住。织田信长不愿沦为阶下囚,自杀身亡。传说其长子织田信忠(1557-1582)当时处在随父亲自尽还是逃生的两难境地中,最终在织田有乐的建议下选择自尽,然而织田有乐却脱逃了。


茶会调停人

在织田信长去世前,千利休曾出任织田家族的顾问,织田有乐也因此机缘拜千利休为师。几年后,千利休又受聘于丰臣家族,织田有乐再度师从于他。有些文献将其列为千利休门下的“七哲”之一。

醉心茶学的织田有乐在当时的政局中扮演了重要角色。在16世纪后半叶的几次关键事件中,他均以调停人的身份参加茶会,努力促成了和平。1585年,他安排原织田信长麾下大将丰臣秀吉和织田信长次子兼继承人织田信雄(1558-1630)谈判,并促成双方达成了和平协议。此后不久,他又参加了丰臣秀吉与其曾经的亲信德川家康的茶会,并在1586年令这两大崛起的军事势力间达成了和解。


摇摆的忠心

1598年丰臣秀吉去世,德川家康趁机填补权力空白,与丰臣秀吉的继承人和家臣展开了斗争。1600年,德川家康在关原之战中取得决定性胜利,确立了将军地位。织田有乐在德川家康麾下参与了此战,胜利后获得了大片领地。

1614年,德川家康成功征服了丰臣秀吉的同盟势力,只余下后者的侧室淀殿夫人(1567-1615)及年幼的继承人丰臣秀赖(1593-1615)一脉。二人以大坂城(今大阪城)为据点,开始招兵买马。织田有乐是淀殿夫人的舅父,反复劝说她与德川家康议和,多次遭拒后感到十分沮丧,于1615年初离开大坂。当年6月,德川家康攻入大坂城,淀殿夫人与丰臣秀赖自尽。


退隐

或许缘于在大坂遭受的打击,织田有乐于1615年隐退京都。1617年,他与建仁寺商议,希望允许他重修寺内一座破落的“塔头”(附属寺院),为自己建造隐居之所。1618年,他迁入新居,将其命名为“正传院”。3年后,织田有乐辞世,享年75岁,被葬于宅邸院内。


织田有乐的传承

织田有乐的后人和弟子所传承的茶道流派称为“有乐流”,至今仍然活跃。在有乐苑修建期间的1972年3月23日,有乐流第15代宗主织田长繁(1918-1992)亦曾到访。

织田有乐认为,茶道最重要的就是令客人如沐春风。他反对那些只会模仿大师,却不理解茶道真义,也没有自己的思想与创新的习茶者。如庵的设计是他独立精神的明证,既反映了恩师的教诲,却又不拘泥其中。

‘우라쿠의 생애’


오다 우라쿠의 생애


 오다 나가마스(織田長益)는 1547년에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1511-1549)의 11번째 아들로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현 서부)에서 태어났습니다. 출가를 하고부터 '우라쿠'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우라쿠의 형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후에 천하통일을 꿈꾼 3대 무장 중 최초의 1인으로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중앙집권적 지배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우라쿠는 2번째로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3번째로 천하통일을 이룬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와도 친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힘있는 무장과의 연결고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라쿠는 무인보다는 문화인으로 더 알려져 있으며, 일본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다인(茶人), 센리큐(千利休, 1522-1591)를 스승으로 모시고 다도를 배웠습니다. 격동의 시대였던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우라쿠는 빈번하게 다회(茶會, 차모임)를 열어 여러 파의 화의를 성립시켰습니다. 후에 교토의 절에 은거한 우라쿠는 그곳에 그의 대표작인 다실 ‘조안(如庵)’을 지었습니다.


청년시절

 우라쿠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20세였던 1567년에 형 노부나가가 막 제압한 기후에서 노부나가와 합류했습니다. 1581년에 가톨릭 선교사들이 기후 땅을 찾아 수 백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세례를 받은 사람 중에 우라쿠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일본어로 '조안'이라고 발음하는 'João'('John'의 포르투갈어)이 세례명이었다고도 전해집니다. 그 후에 우라쿠는 자신의 다실에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1582년에 재난이 닥쳤습니다. 우라쿠와 노부나가가 교토의 혼노지(本能寺)라는 절을 방문했을 때, 노부나가가 신하 중 한사람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1528-1582)에게 배신을 당해 그 세력들에게 혼노지 절을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노부나가는 포로가 되는 것을 택하지 않고 자결했습니다. 노부나가의 장남인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 1557-1582)는 아버지와 자결할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라쿠의 조언에 따라 노부타다는 그 자리에서 할복했지만, 우라쿠 자신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다회를 통한 조화 실현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때 우라쿠는 오다 가문에 가르침을 주던 다인, 센리큐를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몇 년 후 리큐가 도요토미 가문을 섬기게 되었을 무렵에 우라쿠는 다시 리큐 밑에서 수학했습니다. 또, 어느 기록에는 우라쿠가 리큐 칠철(利休七哲, 센리큐의 제자 중에서 특히 우수했던 7인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우라쿠의 다도에 대한 탐구심은 당시와 같은 긴박한 정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라쿠는 16세기 후반 광범위한 평화활동의 일환으로 수많은 중요한 국면에서 조정역할로 다회에 참가했습니다. 1585년에는 노부나가의 옛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노부나가의 차남이자 후계자인 오다 노부카쓰(1558-1630) 사이의 평화 교섭을 이끌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라쿠는 히데요시와 히데요시의 전 측근이자 조언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다회에 참가했고, 1586년에는 이 둘 사이의 평화협정을 성사시켰습니다.


대립하는 충성심

 1598년 히데요시가 세상을 뜨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 가신들과 싸움을 시작했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쇼군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우라쿠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측 무장으로 활약했는데, 그 공적으로 넓은 영지를 받았습니다.

 히데요시의 측실인 요도도노(淀殿, 1567-1615)와 그의 어린 아들인 히데요리(秀頼, 1593-1615)를 제외하고 이에야스는 1614년까지 히데요시파의 잔당을 제압했습니다. 요도도노와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에 머물며, 지원자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요도도노의 숙부인 우라쿠는 여러 차례 요도도노에게 이에야스와의 화해를 종용했으나, 적대관계가 이어지자 화가 난 우라쿠는 1615년 초에 오사카를 떠났습니다. 그해 6월 이에야스의 공격으로 성은 함락되었고, 요도도노와 히데요리는 자결했습니다.


은거

 오사카에서의 일에 낙담해서인지 같은 해 우라쿠는 교토에 은거했습니다. 1617년에는 겐닌지 절과 협상하여 노후화된 배전 하나를 재건해 은거처로 하는 것을 허가받았습니다. 그리고 1618년에는 새로 완성한 쇼덴인(正伝院, 정전원)이라는 이름의 사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 3년 후에 우라쿠는 75세의 나이로 타계했고, 저택 부지에 묻혔습니다.


우라쿠가 남긴 것

 우라쿠의 후계자와 제자들은 '우라쿠류'라고 불리는 차의 유파를 계승했는데, 그 전통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972년 3월 23일에는 우라쿠류의 제15대 종가(어느 일족, 일문에서 적통 가계)인 오다 나가시게(織田長繁, 1918-1992)가 우라쿠엔 건설에 참여했습니다.

 우라쿠가 자노유(손님을 초대해 말차를 대접하며 즐기는 것. 다도의 의의에 가깝지만, ‘차를 즐긴다’는 것을 더 중시한다. 또는 그러한 모임)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진심을 담아 손님을 대접하는 것과 손님이 쾌적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우라쿠는 다인들이 대가의 방식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고, 창의적인 생각 없이 모방하는 것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우라쿠의 주체성은 스승의 가르침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그 가르침을 반영한 ‘조안(如庵)’의 디자인에 나타나 있습니다.

The Life of Oda Uraku


Oda Nagamasu—more commonly known by his tea name, “Uraku”—was born in 1547 in Owari Province (now western Aichi Prefecture). He was the eleventh son of Oda Nobuhide (1511–1549), head of the powerful Oda samurai family that controlled the region. Uraku’s older brother, Oda Nobunaga (1534–1582), later became the first of three great warlords whose campaigns to unify the country culminated in centralized rule under the Tokugawa government. Uraku also associated with the second and third of these unifying warlords, Toyotomi Hideyoshi (1537–1598) and Tokugawa Ieyasu (1543–1616).

Despite his ties to such powerful martial figures, Uraku is best remembered as a man of culture more than combat. He studied tea under the most influential tea master in Japanese history, Sen no Rikyū (1522–1591). During the tumultuous decades of the late sixteenth and early seventeenth centuries, Uraku often used tea gatherings as a setting for brokering peace between warring factions. He eventually retired to the seclusion of a Buddhist temple in Kyoto, where he built his masterpiece, the tea house Jo-an.


Early Years

Relatively little is known about Uraku’s youth. In 1567, at age 20, he joined his brother Nobunaga in the city of Gifu, which Nobunaga had just conquered. In 1581, Catholic missionaries came to the area and baptized several hundred people. Although no reliable records remain, anecdotal sources claim Uraku was among those baptized, and that he took the baptismal name “João” (Portuguese for “John”), which in Japanese is pronounced “Jo-an.” He would later bestow this name on his tea house.

In 1582, disaster struck. While Uraku and Nobunaga were visiting Honnōji Temple in Kyoto, Nobunaga was betrayed by one of his generals, Akechi Mitsuhide (1528–1582), whose forces surrounded the temple. Rather than be captured, Nobunaga committed suicide. Reportedly, Nobunaga’s eldest son, Oda Nobutada (1557–1582), was wavering over whether to join his father in suicide or to flee. At Uraku’s advice, Nobutada remained and committed ritual suicide, but Uraku himself departed.


Mediation through Tea Gatherings

Uraku studied under tea master Sen no Rikyū during Rikyū’s tenure as instructor to the Oda household, which lasted until the death of Oda Nobunaga. Uraku became Rikyū’s student again some years later while the tea master was employed by the Toyotomi family. Some records even list Uraku as one of the “Seven Great Disciples” of Rikyū.

Uraku’s study of tea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political affairs of the time. As part of his wider peacemaking efforts, he attended tea gatherings in the role of mediator at several key points in the latter half of the sixteenth century. In 1585, he negotiated an accord between Nobunaga’s former general Toyotomi Hideyoshi and Oda Nobukatsu (1558–1630), Nobunaga’s second son and successor. Shortly thereafter, Uraku attended tea gatherings with Hideyoshi and Tokugawa Ieyasu, Hideyoshi’s former lieutenant and advisor. Uraku achieved a peace agreement between the two rising warlords in 1586.


Conflicting Loyalties

When Hideyoshi died in 1598, Tokugawa Ieyasu moved to fill the power vacuum. A struggle began between Ieyasu and Hideyoshi’s successors and retainers, and Ieyasu’s decisive victory at the Battle of Sekigahara in 1600 secured his position as shogun. Uraku had acted as one of Ieyasu’s generals at Sekigahara, and he was awarded sizeable landholdings for his participation.

By 1614, Ieyasu had subdued Hideyoshi’s remaining allies, with the exceptions of Hideyoshi’s consort, Yodo-dono (1567–1615), and his young heir, Hideyori (1593–1615). The two had encamped at Osaka Castle and had begun recruiting supporters. Uraku, who was Yodo-dono’s uncle, repeatedly urged her to seek peace with Ieyasu. Finally, frustrated by the continuing hostilities, Uraku left Osaka in early 1615. That June, Ieyasu attacked the castle, and Yodo-dono and Hideyori committed suicide.


Retirement

Perhaps discouraged by his experience in Osaka, Uraku retired to Kyoto the same year. In 1617, he negotiated with Kenninji Temple for permission to rebuild one of its dilapidated worship halls and construct a residence in which to retire. He moved into the newly finished complex, called the Shōdenin, in 1618. Uraku died three years later, at age 75, and was buried on the grounds of his residence.


Uraku’s Legacy

The school of tea carried on by Uraku’s heirs and followers is known as Uraku-ryū, and it continues to be practiced today. The fifteenth head of the Uraku-ryū school, Oda Nagashige (1918–1992), came to see the construction of Urakuen on March 23, 1972.

For Uraku, the primary concern in tea practice (chanoyu) was heartfelt hospitality and the comfort of his guests. Uraku was critical of tea practitioners who copied what great tea masters did without truly understanding it or employing any thought or innovations of their own. Uraku’s independence of spirit is evident in the design of Jo-an, which reflects the teachings of his mentor without being bound by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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