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Jo-an

  • Aichi
Topic(s):
Historic Sites/Castle Ruins Activities
Medium/Media of Use:
App, QR code, etc. Web Page Pamphlet
Text Length:
751+ Words
FY Prepared:
2022
Associated Tourism Board:
Nagoya Railroad Co.,Ltd.

「国宝茶室 如庵」


如庵


 織田有楽の最高傑作とされる「如庵」は、彼の茶の美学と個性が具現化されたものです。千利休(1522-1591)などの茶人たちによって築かれた茶室建築の既存の枠組みから様々な点で逸脱するデザインにもかかわらず(あるいはそれゆえに)、如庵は名作とされました。名画家であった尾形光琳(1658-1716)は如庵を賞賛し、自分のために複製を依頼しました。その複製された茶室は現在、京都の仁和寺に所蔵されています。如庵は、世界で最も多く複製された茶室と言われています。


初期の歴史

 1621年に有楽が亡くなった後、彼の遺品は建仁寺の管理下に置かれ、寄付によって維持されていました。しかし、明治新政府が1872年に全国の仏教施設の権力と影響力を弱める政策を実施し、建仁寺の土地とその他の所有物は強制的に競売にかけられました。その結果、正伝院書院、如庵、如庵の茶庭(茶室の庭、露地)等を含む有楽邸の所有権が京都の祇園に譲渡され、「有楽館」という名称で茶葉などの様々な用途に利用されることとなりました。祇園は1908年にこの建物を全国各地の多くの買い手に売却しました。その中には、三井高棟という人物も含まれていました。


三井家

 三井高棟(1857-1948)は、19世紀末の著名で富裕な商家の一つであった、三井惣領家の10代目当主でした。彼は生涯にわたって茶道を学び、伝統的な建築物にも深い造詣を持っていました。彼は、正伝院書院と如庵、そして如庵の茶庭を購入し、1908年に東京の麻布の自身の屋敷に移築しました。1938年、彼は神奈川県大磯の別邸に隠居することを決め、そこに建造物を移築しました。老後は茶道に専念したいと考えており、密集した東京の街では火災の危険が常につきまとうことも懸念していたのです。彼のおかげで、第二次世界大戦の爆撃で東京が焼け野原になっても、この建物はすでに東京を離れていました。


犬山への移転

 三井高棟が亡くなって間もない1951年に、如庵は国宝に指定されました。そして1969年には、三井家の大磯邸の権利と、その建築物、美術品などの多くを名鉄(名古屋鉄道株式会社)が取得しました。これが、有楽苑設立のきっかけとなりました。

 1971年初頭、如庵を犬山(愛知県犬山市)に移す準備が始まりました。まず、建物全体が徹底的に調査され、壁や支柱の状態を確認するために、当時としては画期的なレントゲン撮影が行われました。解体が始まると、入念な図面作成と計測が行われ、各パーツには番号が振られました。全てのパーツは中綿と防水カバーで包まれ、玄関部分(土間とその周りの壁)は、さらなる補強のため木枠で梱包されました。パーツは振動吸収装置つきの大型トラックに積まれ、1971年3月31日午前1時30分、如庵は、NHKの取材班を引き連れて、大磯を出発しました。

 しかし、途中の高速道路の料金所で、積み荷が規定の高さをわずかに超えていたため、1台のトラックが足止めされるという大きなハプニングがありました。茶室自体には被害はありませんでしたが、料金所の職員はトラックを通すのを嫌がり、苛立ちを隠せなかった名鉄の社員が最終的に説得するに至りました。


復元と修復

 如庵が無事犬山に到着し、修復師たちは再組み立て作業を始めました。屋根からの雨漏りによる浸水などの影響もあり、修理が必要な箇所もありましたが、元の建物を保存に最善を尽くしました。部分的に腐った支柱など、損傷した構造部分は合成樹脂で補強され、木のような質感を再現するために塗装が施されました。また、屋根の板材など交換が必要なものは、当時の工法や材料を用いて製作されました。

 この機会に、修復師たちは長年にわたる如庵の変貌を元の状態に戻すことにしました。大磯での配置から一転、如庵と正伝院書院は、有楽の京都での邸宅の配置に基づいて再結合されました。大磯では書院の南東角から外廊下でつながっていましたが、有楽苑では、この廊下を取り払い、書院の縁側から如庵へ直接出入りできるような配置に変更しました。


建築の特徴

 如庵では、茶会の客人は建物の南西側にある屋根付きの玄関から入ります。侍は刀を抜いて襖の奥の小部屋の棚に納めた後に入ります。客は全員、履物を脱ぎ、低い位置にある小さな入口(にじり口)から這うように狭い部屋に入ります。如庵の茶室の広さはわずか3.25畳(約5.9平方メートル)ですが、これは千利休が好んだとされる2畳間よりは広いですが、「小間」と定義される4.5畳の範囲内に収まっています。有楽が客人の快適さを重視し、茶室を広めに設計にしたことがわかります。

 また、有楽は比較的明るい茶室を好んでいました。そのため、如庵の屋根には突き上げ窓があり、天窓のように開けることができます。また、東側の壁には「有楽窓」と呼ばれる、如庵特有の窓が2つあります。これらの窓は四角く半透明で、細い竹が垂直に打ち込まれています。窓を開けておくと竹の隙間から光が射し込み、障子を閉めると竹の影が映し出され、上品な陰影が生まれます。

 正面の壁と低いにじり口の反対側には、別のタイプの窓が見えます。これは「下地窓」と呼ばれ、壁の一部を漆喰で覆わずに、その下にある竹と葦の格子を露出させたものです。

 如庵の装飾の中でも特に珍しいのは、外からは見ることができない場所にあります。壁面の下3分の1は古い暦で埋め尽くされており、中には1629年までさかのぼるものもあります。この装飾は「暦張り」と呼ばれる技法で、身の回りのものを再利用し、何も無駄にしない庵の飾り気のない素朴さを表現する意図が込められています。

如庵


如庵茶室被視為織田有樂(1547-1621)的巔峰之作,它的設計集中體現了織田有樂的茶道美學與個性。如庵的設計在各種方面都背離了千利休(1522-1591)等茶道大師擬定的茶室建築慣例,儘管如此,或者說正因如此,如庵才被奉為傑作。著名畫家尾形光琳(1658-1716)對如庵極為推崇,乃至以其為範本為自己造了一間茶室,現存於京都仁和寺中。據說如庵是全球被仿建次數最多的茶室。


早期歷史

1621年織田有樂去世後,他的宅邸委託給建仁寺管理,1872年前,寺院一直靠捐助維護宅邸。但此後明治政府頒佈法令,在全國範圍內削弱佛教的勢力與影響,建仁寺等寺院的土地和其他資產因此被強制拍賣。織田有樂宅邸的正傳院書院、如庵茶室和旁邊「露地」(茶庭)的所有權也被轉移至京都祇園,并更名為「有樂館」,被用於加工茶葉等多種用途。1908年,祇園向來自全國各地的買家拋售該建築,三井高棟(1857-1948)就是買家之一。


三井家

三井家是日本19世紀晚期最顯赫的巨賈之一,三井高棟是三井家主支第10任家主。他畢生鑽研茶道,對傳統建築也有很深的造詣。三井高棟購買了正傳院書院、如庵茶室及其茶庭,並於1908年將它們遷至自己在東京麻布的私宅內。希望在退休後能專注研究茶道的他,因為擔心人口稠密的東京存在火災隱患,於是在1938年決定去神奈川縣大磯的家族別墅頤養晚年時,將這些建築一併遷移了過去。而正是他的這個決定,才讓這些古建築在二戰東京大轟炸期間逃過一劫。


遷至犬山

1951年,三井高棟去世後不久,如庵被指定為國寶。1969年,名古屋鐵道株式會社購得三井家的大磯別墅以及其中許多建築和藝術品,為興建有樂苑奠定了基礎。

如庵遷址犬山的準備工作始於1971年初。首先,對如庵建築作深入研究,牆壁和支柱都運用了當時最先進的X光檢測來評估其狀態。開始拆卸時,工作人員繪製了詳細圖紙,並進行了精細測量,為每個部件都標上編號。拆下的每個部分都分別用襯墊和防水材料包裹,玄關(土質門廳及周邊牆體)部分則被裝進了木框架中進一步加固。最後,工人將所有部件都裝上設有減震裝置的大卡車。1971年3月31日淩晨1:30,日本廣播協會NHK安排了全程跟拍如庵離開大磯的過程。

然而在運輸過程中發生了一件意外:過高速公路收費站時,一輛卡車的貨廂頂部輕微擦撞到限高欄,被迫停了下來。所幸茶室並未受損,但收費站工作人員拒絕讓這輛卡車通行,經過努力周旋最終才得以放行。


重建與修復

如庵安全抵達犬山後,由專業修復師開始組裝。雖然茶室的部分區域因屋頂漏水等原因必須局部整修,但重點還是盡可能保持建築原貌。對受損的結構部件,如部分腐朽的柱子,修復師採用合成樹脂進行加固,再經過紋理處理和上漆,看起來就跟真的木頭一樣。此外,若有需要完全替換的部件,例如屋頂的木片瓦,則使用與原始建築相同的工藝重新製作。

藉此機會,修復師還清除了長久以來對如庵的種種改造痕跡。他們以史料對織田有樂京都宅邸的描述為據,將大磯時期變動過的建築佈局還原如故。比如在大磯時,如庵茶室和正傳院書院通過一條由書院東南角引出的戶外廊道相連,而建設有樂苑時,修復師們拆除了這條廊道,將兩棟建築排在一起,這樣從書院的緣側(簷廊)便可直接進入如庵。


建築特點

前來如庵出席茶會的客人需從建築西南側帶屋頂的泥地外門廳進入。入門前武士要卸下長刀,放置在一扇拉門後小房間內的刀架上。所有客人均需脫鞋,然後俯身爬過窄小低矮的「躙口」(躙,音同「藺」)進入一個狹小的房間。如庵的茶室僅3.5疊榻榻米大小(約6.2平方公尺),比千利休偏好的2疊稍大一些,但依然小於4.5疊,屬於「小間」(小茶室)。織田有樂十分看重客人的舒適與否,因此設計了相對寬敞的茶室空間。

織田有樂還喜歡光線相對明亮的茶室。為此,如庵的屋頂設有帶鉸鏈的活動面板,可以如天窗般向上打開。東側牆上還有兩扇窗為如庵獨有,被稱作「有樂窗」。這種正方形的窗戶用細竹枝豎直密排,營造出半透光的效果。窗戶開啟時,光線透過竹枝間的縫隙照進來,拉上移門,門紙上便會映出優雅的竹影。

如庵正面牆壁和低矮的「躙口」對面設有另一種叫「下地窗」的窗戶,窗戶旁的部分牆體不抹灰泥,用竹子和蘆葦編成的網格層顯露無遺。

如庵還有一個獨一無二的裝飾,只在茶室內部可見,即茶室內牆的下部三分之一處貼滿了舊日曆,有些甚至早至1629年。這種裝飾技法叫「曆張」(日曆貼),意在表達隱居生活的樸素,以彰顯日常用具皆可再利用,沒有絲毫浪費。

如庵


如庵茶室被视为织田有乐(1547-1621)的巅峰之作,其设计集中体现了织田有乐的茶道美学与个性,但在各方面都背离了千利休(1522-1591)等茶道大师拟定的茶室建筑惯例。尽管如此,或者说正因如此,如庵才被奉为杰作。著名画家尾形光琳(1658-1716)对之极为推崇,乃至以如庵为范本也为自己建造了一间茶室,现存于京都仁和寺中。据说,如庵是全球被仿建次数最多的茶室。


早期历史

1621年织田有乐去世后,他的宅邸被委托给建仁寺管理,至1872年前,寺院一直靠捐助维护宅邸。但此后明治新政府颁布法令,在全国范围内削弱佛教的势力与影响,因此建仁寺等寺院的土地和其他资产被强制拍卖。织田有乐宅邸的正传院书院、如庵茶室和旁边“露地”(茶庭)的产权也被移交至京都祇园,并更名为“有乐馆”,被用于加工茶叶等多种用途。1908年,祇园向来自全国各地的买家抛售这些建筑,三井高栋(1857-1948)就是买家之一。


三井家族

三井家族是日本19世纪晚期最显赫的巨贾之一,三井高栋是三井家族主支第10任家主。他毕生钻研茶道,在传统建筑方面也有很深的造诣。三井高栋购买了正传院书院、如庵茶室及其茶庭,并于1908年将它们迁至自己在东京麻布的私宅内。他希望在退休后能专注茶道,但人口稠密的东京存在火灾隐患,于是1938年,在他决定去神奈川县大矶的家族别墅颐养晚年时,将上述建筑也一并迁移了过去。也正是他的这个决定,让这些古建筑在二战东京大轰炸期间逃过一劫。


迁至犬山

1951年,三井高栋去世后不久,如庵被指定为国宝。1969年,名古屋铁道株式会社购得三井家族的大矶别墅以及其中许多建筑和艺术品,为兴建有乐苑奠定了基础。

如庵迁址犬山的准备工作始于1971年初。首先项目组对如庵的建筑进行了深入研究,运用当时最先进的X光来检测评估墙壁和支柱的状态。开始拆卸时,工作人员绘制了详细图纸并进行了精细测量,还为部件都标上编号。拆下的每个部分都分别用衬垫和防水材料包裹,玄关(土质门厅及周边墙体)部分则被装入木头框架中进一步加固。最后,工人将所有部件都装上配备减震装置的大卡车,1971年3月31日凌晨1:30,如庵离开大矶,日本广播协会NHK安排了全程跟拍。

运输过程中曾发生了一件意外:过高速公路收费站时,一辆卡车的货厢顶部轻微蹭到了限高栏,被迫停了下来。所幸茶室并未受损,但收费站工作人员拒绝让此车通行,几经努力周旋,最终才得以放行。


重建与修复

如庵安全抵达犬山后,由专业修复师开始组装。尽管因屋顶漏水等原因,茶室必须局部整修,但尽可能保持建筑原貌,才是本次修复工程的最大目的。对于部分腐朽的柱子等受损构件,修复师决定采用合成树脂进行加固。经过纹理处理和上漆,修复处看起来就跟真的木头一样。而如屋顶木片瓦等需要完全替换的地方,则采用与原始建筑相同的工艺重新制作。

借此机会,修复师还清除了长久以来对如庵的种种改造痕迹。他们以史料对织田有乐京都宅邸的描述为据,将大矶时期变动过的建筑布局还原如初。比如在大矶时,如庵茶室和正传院书院通过一条由书院东南角引出的户外廊道相连。修建有乐苑时,修复师们拆除了这条廊道,将两栋建筑紧靠在一起,这样,从书院的缘侧(檐廊)便可直接进入如庵。


建筑特点

前来如庵出席茶会的客人需从建筑西南侧带屋顶的泥地外门厅进入。入门前武士要卸下长刀,放置在一扇拉门后小房间内的刀架上。所有客人均需脱鞋,然后俯身爬过窄小低矮的“躙口”(躙,音同“蔺”)进入一个狭小的房间。如庵的茶室仅3.5叠榻榻米大小(约6.2平方米),比千利休偏好的2叠要大一些,但依然小于4.5叠,属于“小间”(小茶室)。织田有乐十分看重客人的舒适度,因此设计了相对宽敞的茶室空间。

织田有乐还喜欢光线相对明亮的茶室。为此,如庵的屋顶设有带铰链的活动面板,可以像天窗那样向上打开。东侧墙上还有两扇窗为如庵独有,被称作“有乐窗”。这种正方形的窗户用细竹枝竖直密排,营造出半透光的效果。窗户开启时,光线透过竹枝间的缝隙照进来,拉上移门,门纸上便会映出优雅的竹影。

如庵正面墙壁和低矮的“躙口”对面设有另一种叫“下地窗”的窗户,窗户旁的部分墙体不抹灰泥,用竹子和芦苇编成的网格层暴露无遗。

如庵还有一个独一无二的装饰,只在茶室内部可见:茶室内墙的下部三分之一处贴满了旧日历,有些早至1629年。这种装饰技法叫“历张”(日历贴),意在表达隐居生活的朴素。在这里,日常用具皆可再利用,没有丝毫浪费。

‘국보 다실 조안(如庵)’


조안


 오다 우라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조안’은 그의 차에 대한 미학과 개성이 구현된 것입니다. 센리큐(1522-1591) 등과 같은 다인들이 쌓아올린 다실 건축의 기존 틀에서 벗어난 점이 많은 디자인인데도 불구하고(혹은 그것 때문에) 조안은 명작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유명한 화가였던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1658-1716)은 조안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을 위해 복제를 의뢰했습니다. 그 복제된 다실은 현재 교토의 닌나지 절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조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다실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의 역사

 1621년 우라쿠가 타계한 후 그의 유품은 겐닌지 절의 관리 하에 놓였고, 기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신정부가 1872년 전국 불교시설의 권력과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겐닌지 절의 토지와 기타 소유물은 강제로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그 결과 쇼덴인쇼인, 조안, 조안의 다정(다실에 딸린 정원, 로지) 등을 포함한 우라쿠 저택의 소유권이 교토 기온에 양도되었고, '우라쿠칸(有樂館, 우라쿠관)'이라는 명칭으로 찻잎 가공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게 되었습니다. 기온은 1908년에 이 건물을 전국 각지의 구매자들에게 매각했습니다. 그 중에는 미쓰이 다카미네(三井高棟)라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미쓰이 가문

 미쓰이 다카미네(三井高棟, 1857-1948)는 19세기 말 유명한 부유 상가 중 하나였던 미쓰이 종가의 10대 당주였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다도를 배웠고, 전통적인 건축물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는 쇼덴인쇼인과 조안, 그리고 조안의 다정을 구입하여 1908년에 도쿄의 아자부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이축했습니다. 1938년 그는 가나가와현 오이소의 별저에 은거를 결정하고, 그곳으로 건축물을 이축했습니다. 노후에는 다도에 전념하고자 했고, 또 밀집된 도쿄에서는 화재 위험이 항상 따라다닌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도쿄가 불바다가 되었어도 이 건물은 이미 도쿄를 떠나 있어 무사했습니다.


이누야마(犬山)로의 이전

 미쓰이 다카미네가 세상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1년에 조안은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에는 미쓰이 가문의 오이소 저택에 대한 권리와 그 건축물, 미술품 등의 대부분을 메이테쓰(나고야철도주식회사)가 취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라쿠엔 설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1년 초 조안을 이누야마(아이치현 이누야마시)로 옮기는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건물 전체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벽과 버팀목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엑스레이 촬영이 실시되었습니다. 해체가 시작되자 꼼꼼한 도면 작성과 계측이 이루어졌으며, 각 부속품에는 번호가 매겨졌습니다. 모든 부속품은 안솜과 방수커버로 감싸고, 현관 부분(토방과 그 주변 벽)은 더욱 강력한 보강을 위해 나무틀로 포장했습니다. 부속품은 진동흡수장치가 있는 대형트럭에 실렸고, 조안은 1971년 3월 31일 오전 1시 30분 NHK 취재진과 함께 오이소를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화물이 규정 높이를 약간 넘겨 트럭 1대가 발이 묶이는 큰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다실 자체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톨게이트 직원들은 트럭을 통과시키는 것을 주저했고, 초조했던 메이테쓰의 사원이 최종적으로 설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복원과 수복

 조안이 무사히 이누야마에 도착했고, 수복사들이 재조립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지붕에 빗물 누수에 의한 침수 등의 영향으로 수리가 필요한 곳도 있었지만, 원래의 건물을 보존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분적으로 썩은 버팀목 등 손상된 구조부분은 합성수지로 보강하고, 나무와 비슷한 질감을 재현하기 위해 도장을 했습니다. 또 지붕의 판재 등 교체가 필요한 것은 당시의 공법과 재료를 활용해 제작했습니다.

 수복사들은 이 기회에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변모된 조안의 모습을 원상태로 되돌리기로 했습니다. 오이소에서의 배치를 완전히 바꾸어 조안과 쇼덴인쇼인을 우라쿠의 교토 저택에 있던 배치로 재결합했습니다. 오이소에서는 쇼덴인쇼인의 남동쪽 모퉁이에서 바깥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우라쿠엔에서는 이 복도를 없애고 쇼덴인쇼인의 툇마루에서 조안으로 바로 출입할 수 있는 배치로 변경했습니다.


건축의 특징

 조안에서는 다회(茶會, 차모임)에 오신 손님은 건물 남서쪽 지붕이 있는 현관으로 들어갑니다. 사무라이는 칼을 빼내 맹장지 안쪽 작은 방 선반에 넣고 들어갑니다. 손님들은 모두 신발을 벗고 낮은 위치에 있는 작은 입구(니지리구치)를 통해 기듯 좁은 방으로 들어갑니다. 조안의 다실 넓이는 3.25조(약 5.9㎡)에 불과했는데, 이는 센리큐가 좋아했다고 전해지는 2조 넓이의 방보다는 넓지만 '작은방(小間)'으로 정의되는 4.5조 범위 내에 들어갑니다. 우라쿠가 손님의 쾌적함을 중시하여 다실을 넓게 설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라쿠는 비교적 밝은 다실을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조안의 지붕에는 돌출창이 있어 천창처럼 열 수 있습니다. 또 동쪽 벽에는 '우라쿠마도(有楽窓)’라고 불리는 조안 특유의 창이 2개 있습니다. 이 창문들은 사각의 반투명 창으로 가는 대나무가 수직으로 박혀 있습니다. 창문을 열어두면 대나무 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장지문을 닫으면 대나무 그림자가 비쳐 품격 높은 음영이 생깁니다.

 정면 벽과 낮은 니지리구치 반대쪽에는 다른 타입의 창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타지마도'라고 하는데, 벽의 일부를 회반죽으로 덮지 않고, 그 아래에 있는 대나무와 갈대의 격자를 노출시킨 창입니다.

 조안의 장식 중에서도 특히 더 특이한 것은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벽면 아래 3분의 1이 오래된 달력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중에는 1629년 것도 있습니다. 이 장식은 ‘고요미바리’라고 불리는 기법으로, 주변의 물건을 재사용하여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는 암자의 꾸밈없는 소박함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Jo-an


The creation of Jo-an is considered Oda Uraku’s pinnacle achievement, and its design expresses both his personal tea aesthetic and his individuality of spirit. In many ways, Jo-an’s design is a departure from the conventions of tea house architecture laid down by tea masters like Sen no Rikyū (1522–1591). But in spite of this (or perhaps because of it), Jo-an was considered a masterwork. The acclaimed artist Ogata Kōrin (1658–1716) so admired the tea house that he commissioned a copy for himself, which is now at Ninnaji Temple in Kyoto. It is said that Jo-an has been replicated more often than any other tea house in the world.


Early History

After Uraku’s death in 1621, his estate ultimately passed into the care of Kenninji Temple. The temple maintained the estate through donations until 1872, when the new Meiji government took measures to decrease the power and influence of Buddhist institutions across the country. The temple’s land and other holdings were forcibly auctioned off, and ownership of Uraku’s residential complex—including the Shōdenin Shoin, Jo-an, and its attached tea garden (roji)—was transferred to Kyoto’s Gion district. The complex was renamed “Urakukan” (literally, “Uraku Hall”), and its buildings were used for various purposes, such as processing tea leaves. In 1908, the district sold off the buildings to various buyers from different parts of the country. One of those buyers was a man named Mitsui Takamine.


The Mitsui Family

Mitsui Takamine (1857–1948) was the tenth-generation head of the lead branch of the Mitsui family, one of the most prominent and wealthy merchant families of the late nineteenth century. Mitsui was a lifelong student of tea and a connoisseur of traditional architecture. He purchased the Shōdenin Shoin along with Jo-an and its tea garden, and in 1908 he had them moved to his residence in the Azabu neighborhood of Tokyo. In 1938, Mitsui decided to retire to the family villa at Ōiso, in Kanagawa Prefecture, and he had the structures moved there. Mitsui wished to devote more of his time to the study of tea during retirement, and he was worried about the ever-present danger of fire amid the densely clustered neighborhoods of Tokyo. Thanks to him, the buildings were no longer in Tokyo when the city was leveled by firebombing during World War II.


The Move to Inuyama

In 1951, not long after Mitsui Takamine’s death, Jo-an was designated a National Treasure. In 1969, Meitetsu (Nagoya Railroad Company, Ltd.) acquired rights to the Mitsui family’s Ōiso estate along with many of the structures and artifacts there. This set the stage for the creation of Urakuen.

The preparations to move Jo-an to Inuyama began in early 1971. First, the building was closely studied. Its walls and supports were X-rayed to determine their condition—an innovative technique at the time. As disassembly began, careful drawings and measurements were taken, and the pieces were numbered. Each piece was wrapped in padding and waterproof coverings, and the entryway section (the earthen vestibule and its surrounding walls) was then set inside a timber framework for further structural support. Workers loaded the sections onto large trucks equipped with vibration-dampening devices. At 1:30 a.m. on March 31, 1971, Jo-an departed Ōiso with NHK reporters in tow.

The journey had one notable incident: at a highway toll gate along the way, one of the trucks was stopped because the top of its cargo had very slightly grazed the clearance barrier. No harm was done to the tea house, but the toll gate employee refused to let the truck through until one frustrated Meitetsu employee finally persuaded him.


Reconstruction and Restoration

Jo-an arrived safely in Inuyama, and restorers began the work of reassembling it. Some repairs to the tea house were necessary, primarily due to water damage from roof leaks, but great effort went into preserving the original building. Damaged structural components, like the partially rotted support posts, were reinforced with synthetic resin that was textured and painted to look like wood. Anything that had to be replaced, such as the roof’s shingles, was remade using the same methods and materials as the original.

Restorers took the opportunity to undo changes that had been made to Jo-an over the years. In contrast to how the buildings had been positioned at Ōiso, Jo-an and the Shōdenin Shoin were rejoined in accordance with historical accounts of how they had been arranged at Uraku’s Kyoto residence. At Ōiso, the buildings had been connected by an exterior walkway that extended from the southeast corner of the Shoin. At Urakuen, workers removed this walkway and positioned the buildings close enough that Jo-an could be entered directly from the veranda of the Shoin.


Architectural Features

Guests attending a tea gathering at Jo-an would enter from the covered vestibule on the building’s southwest side. Before entering, samurai would remove their long swords and place them on a rack in the alcove behind the papered sliding doors. All guests would remove their footwear and crawl through the small, low entrance (nijiriguchi) into a narrow room. Jo-an’s main room has only 3.5 tatami mats of floor space (about 6.2 m2). This is larger than the two-mat rooms Sen no Rikyū is said to have favored, but still within the limit of 4.5 mats that defines a “small” tea room (koma). Uraku’s emphasis on the comfort of the guests can be seen in the more spacious design of his tea houses.

Uraku also preferred tea rooms to be comparatively well lit. To this end, Jo-an has a hinged panel in the roof that can be propped open like a skylight. It also has two windows on the eastern wall called urakumado, or “Uraku windows,” that are unique to Jo-an. The windows have square, semi-translucent panels made of thin, vertical bamboo branches that are closely spaced together. When the windows are open, light enters through the space between the branches, and sliding the paper shoji closed produces an elegant shadow effect on the paper.

Another type of window can be seen on the front wall and opposite the low nijiriguchi entrance. These are shitajimado, meaning “understructure windows.” These windows are made by leaving a section of the wall unplastered, exposing the bamboo-and-reed lattice underneath.

One highly unusual feature of Jo-an’s decoration is not visible from the outside. The bottom third of the tea house’s walls are papered in old calendars, some of which date back as far as 1629. This decorative technique, called koyomibari, is intended to evoke the rustic simplicity of a hermitage, where common objects are repurposed and nothing is wa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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