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가가번과 마에다 가문의 문화정책

  • 이시카와
장르:
지역 특산물
매체 이용 구분:
간판 웹페이지
단어 수:
251-500
작성 연도:
2022
지역 협의회명:
Ishikawa Crafts and Cultural Heritage Digital Contents Promotion Council

Kaga Domain and the Maeda Family Cultural Policy


The area now known as Ishikawa Prefecture was once a part of Kaga domain—one of about 250 relatively autonomous regions under the authority of the shogun during the Edo period (1603–1867). Kaga was governed by 14 lords of the Maeda family from 1583 until the abolition of the domain system in 1871. Thanks to the family’s strong commitment to fostering Kaga’s traditional arts, the Maedas’ legacy remains alive and well in the cultural life of Ishikawa.

Kaga domain was a large and highly productive agricultural region. Because a domain’s wealth was determined by the volume of crops—particularly rice—that it produced, the Maedas’ income was second only to the aggregate income of the shogunate itself.

Before the start of the Edo period, Japan had endured centuries of conflict among independent warlords who had funded and waged war with their own armies. At the end of the sixteenth century, the Tokugawa family rose to ascendency and established a shogunal government based in Edo. The Tokugawas were well aware that greater wealth meant more resources to recruit and equip troops, and that wealthy domain lords like the Maedas could pose a significant threat should they decide to revoke their allegiance and funnel their wealth into rebellion.

The Maedas, too, worried their wealth might lead the shogun to view them as political rivals. As a result, they embarked on a shrewd political course: to invest heavily in non-military pursuits like noh theater, the decorative arts, and tea ceremony. This policy kept the family in the shogun’s good graces, giving them access to government posts and transforming Kanazawa into a regional hub despite its distance from the capital. At the same time, developing cultural influence was a peaceful way to assert the domain’s independence and offset the control of the shogunate.

The Maeda cultural policy can broadly be categorized as twofold: collection and cultivation. Accumulating fine works of art lent prestige to a domain lord. While this was a common pursuit among the samurai class, the deep pockets of the Maedas allowed them to outspend their rivals, and many masterpieces from around Japan ended up in their possession. The Maedas were not satisfied, however, with simply collecting. They made the promotion of local arts and crafts a fundamental part of their domain management. They attracted many of the country’s finest artisans to Kaga by offering generous stipends, patronage, and land. Many of the crafts for which Ishikawa is famous, such as Kaga yūzen silk dyeing, were established by artisans from Kyoto and Edo (now Tokyo) who moved to Kanazawa at the Maedas’ invitation.

One of their most influential acts was to turn a former armor repair workshop at Kanazawa Castle into a multidiscipline crafts workshop called the Kaga Domain Workshop (Osaikusho). With the financial support of successive domain lords, artists honed their skills, trained successors, and collaborated on boundary-pushing projects and masterworks. The fifth Maeda lord, Maeda Tsunanori (1643–1724), initiated the creation of a wide-ranging compendium of contemporary craft samples from around the country. Known as the Hyakkō Hishō, it helped to educate and inspire artisans at the Kaga Domain Workshop. Many key techniques that define Ishikawa’s lacquerware, metalwork, and woodwork today emerged from this innovative institution.

加賀藩と前田家の文化政策


 現在の石川県として知られている地域は、かつて加賀藩の一部でした。江戸時代(1603~1867)には徳川将軍家による支配の下で、約250の藩が一定の自治を許されていました。加賀藩は1583年から前田家が治め、それは江戸時代の終焉で藩が廃止された1871年まで続きました。加賀の伝統工芸の育成に力を注いだ前田家の遺産は、現在も石川の文化に脈々と受け継がれています。

 加賀藩の領地は広大で、しかも非常に豊かな農業生産地でした。当時、藩の財力は米を中心とした農作物の生産量で決まるため、前田家は総収入において将軍家に次ぐ裕福な大名家でした。

江戸時代前の日本は、数百年もの間、各地域の武将たちが自ら兵力を蓄えて軍を組織し、戦に明け暮れる時代が続いていました。しかし、16世紀末に徳川家康が台頭して天下統一を果たし、江戸(現在の東京)に幕府を開きます。徳川家は、財力が増せば兵士の動員や装備の増強につながると十分認識しており、前田家のように裕福な大名が謀反を企て、資金を反乱の準備につぎ込めば大きな脅威になりかねないと分かっていました。

 前田家もまた、その裕福さ故に将軍から政敵とみなされかねないと懸念していました。そこで前田家は賢明な政策をとります。豊かな資産を能や装飾美術、茶道など、軍事とは無縁の分野につぎ込んだのです。この方針が功を奏し、前田家は将軍家に気に入られ、幕府内で好待遇を得ます。また金沢も、江戸から遠く離れているにも関わらず、地方の中心都市へと変貌を遂げました。同時に、文化面で影響力を高めることは、幕府の支配を認めつつ藩の独立性を示す平和的な方法でもありました。

 前田家の文化政策は、大きく分けて「収集」と「育成」の二つに分けられます。美術品の収集は藩主の威信を高めるものでした。これは当時の武士にとって一般的なことでしたが、裕福だった前田家は、他の大名を上回る資金を美術品につぎ込み、日本各地の多くの名画が前田家の資産となりました。ですが、前田家は収集だけでは満足しません。地元の芸術や工芸の振興を藩経営の基本としていた前田家は、全国から優秀な職人を呼び寄せ、活動を支援し、住居などを提供しました。加賀友禅をはじめ、石川を代表する工芸品の多くが、前田家の招きで京都や江戸から金沢に移り住んだ職人たちによって確立されたものです。

 中でも石川工芸の発展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のが、金沢城下にあった武具の修理所を、多分野の工芸工房である「加賀藩御細工所」に転換したことです。歴代藩主の資金援助を受けた職人たちは、技術を磨き、後継者を育成し、工芸分野の境界を越えて共同作業に臨み、数々の名作を作り上げました。さらに、第5代藩主前田綱紀(1643~1724)は、全国から様々な分野の工芸見本を集め、整理、分類するよう指示しました。これが「百工比照」で、御細工所の職人たちはこれを参考に学び、インスピレーションを得ました。漆器や金工、木工など、今日の石川の伝統工芸の礎となる多くの重要な技術を生み出したのが、この革新的な御細工所なのです。

加賀藩和前田家的文化政策


在江戶時代(西元1603–1867),幕府轄下約有250個相對自治的領地,現在的石川縣當時屬於其中的加賀藩。從西元1583年到1871年廢藩置縣,加賀藩歷經14任前田氏藩主統治。多虧有前田家大力推動加賀藩的傳統藝術,這項文化傳統才得以歷久彌新,並延續到今日石川縣的文化生活中。

  加賀藩是一片地域遼闊、富饒多產的農業區域。由於各藩地的財富取決於生產的農作物(尤其是稻米)產量,因此前田家的收入僅次於幕府的總收入。

  在江戶時代之前,日本經歷了幾個世紀的混戰。武將們各自擁兵,割據一方且爭鬥不休。到了16世紀末,德川家族在征戰中崛起,在江戶建立了幕府政權。德川家族清楚地意識到當財富增加,代表擁有更多資源來招募軍隊和備妥裝備。當前田家如此富裕的藩主一旦不再效忠,並將財富用於叛亂,將會構成重大威脅。

  另一方面,前田家也擔心可能會因為所擁有的財富,被幕府視為政治對手,因此他們選擇了一種高明的政治策略,將財富大量投入能劇、裝飾藝術和茶道等非軍事活動。上述策略讓前田家得到了幕府將軍的青睞,並獲得一些官職,他們管理的金澤儘管遠離首都,但也發展為地區中心。與此同時,前田家透過發展文化影響力,以一種和平的方式與幕府的控制抗衡,維護領地的獨立性。

  前田家的文化政策大致可以分為收藏手工藝品和培養人才兩個方面。收藏精美的藝術品可以提升藩主的威望,雖然這種興趣在武士階級並不少見,然而前田家的財力格外雄厚,更願意為收藏一擲千金,因此得以將日本各地的許多珍品和傑作納入囊中。不過單單收藏無法滿足前田家,他們更致力於推動當地藝術和手工藝發展,以此作為治理藩地的基礎,因此提供豐厚的資助、補貼和土地,吸引日本全國最優秀的工匠們來到加賀藩。在前田家的邀請下,不少工匠從京都和江戶(今東京)遷居至金澤,並研究出許多石川縣著名的手工藝,例如加賀友禪染絲綢。

  前田家所推行的措施中影響最深遠之一,是將金澤城的盔甲修理坊,改造為匯集多種手工藝類別的加賀藩御細工所。在歷任藩主的財政支援下,工匠們不斷磨鍊技藝、培養傳人,並攜手完成突破性的創新計畫,創造一流的作品。前田家的第五代藩主前田綱紀(西元1643–1724)廣泛收集當時日本各地的手工藝樣本,並編成「百工比照」,為加賀藩御細工所的工匠們提供指引、帶來啟發。今日石川縣代表性的漆器、金屬加工和木工,許多的關鍵技術都源於這個創新機構。

加贺藩和前田家族的文化政策


  在江户时代 (1603–1867),幕府政权下有大约250个相对自治的藩领,现在的石川县当时属于其中的加贺藩。从1583年到1871年废藩置县,前田家族共有14任藩主统治加贺藩。得益于前田家族对加贺藩传统艺术的强劲支持,这种文化传统历久弥新,并延续到今天石川县的文化生活中。

  加贺藩是一片地域辽阔、富饶多产的农业区域。由于各藩地的财富取决于其农作物(尤其是大米)的产量,因此前田家族的收入仅次于幕府本身的总收入。

  在江户时代之前,日本经历了几个世纪的混战。武将们各自拥兵,割据一方,争斗不休。16世纪末,德川家族在征战中崛起,并于江户建立了幕府政权。德川家族清楚地意识到,拥有更多财富意味着有更多的资源来招募和装备军队。前田家族这样富裕的藩主一旦不再效忠,并将财富用于叛乱,将会构成重大威胁。

  而前田家族也担心自己因为富甲一方而被幕府视为政治对手。为此他们选择了一种高明的政治策略,将财富大量投入能剧、装饰艺术和茶道等非军事活动。因为这种策略,前田家族得到了幕府将军的青睐,获得了一些官职;他们管理的金泽尽管远离首都,也发展成为地区中心。与此同时,前田家族通过发展文化影响力,以一种和平的方式抵消幕府控制,从而维护领地的独立。

  前田家族的文化政策大致可以分为收藏工艺品和培养工艺人才两个方面。收藏精美的艺术品可以提升藩主的威望。这种兴趣在武士阶层并不少见,然而,前田家族的财力格外雄厚,更愿意为收藏一掷千金,因此得以将日本各地的许多珍品和杰作纳入囊中。但前田家族并不仅仅满足于收藏,更以推动当地艺术和工艺发展作为治理藩地的基础。他们通过提供丰厚的资助、补贴和土地,吸引全国最优秀的艺术家们来到加贺藩。在前田家族的邀请下,不少艺术家从京都和江户(今东京)迁居至金泽,并开发出石川赖以闻名的许多工艺,例如加贺友禅染丝绸。

  前田家族所推行的措施中影响最深远之一,是将金泽的武器盔甲修理坊改造为综合多种工艺类型的加贺藩御细工所。在历任藩主的财政支持之下,艺术家们不断磨炼技艺,培养传人,并合作进行突破边界的创新项目,创造一流的作品。前田家的第五代藩主前田纲纪 (1643–1724) 广泛收集和汇总当时日本各地的工艺样本,编成“百工比照”,这一收藏集为加贺藩御细工所的工匠提供了指导和启发。今天石川的漆器、金属工艺和木工的许多关键技术都源于这一创新机构。

가가번과 마에다 가문의 문화정책


 현재 이시카와현으로 알려진 지역은 과거 가가번의 일부였습니다. 에도 시대(1603~1867)에는 도쿠가와 쇼군 가문의 지배 아래 약 250개의 번에서 각자의 자치가 허용되었습니다. 가가번은 1583년부터 마에다 가문이 다스렸는데, 이는 에도 시대가 끝나고 번이 폐지된 1871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가가의 전통공예 육성에 힘을 쏟은 마에다 가문의 유산은 현재도 이시카와의 문화로서 맥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가가번의 영지는 굉장히 넓었으며, 농업 생산 또한 매우 풍요로운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번의 재력은 쌀을 중심으로 한 농작물 생산량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마에다 가문은 총수입 면에서 쇼군 가문에 이어 두 번째로 부유한 다이묘 가문이었습니다.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은 수백 년 동안 각 지역의 무장들이 독자적으로 병력을 모으고 군대를 조직하며 전쟁에 몰두하던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6세기 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등장하여 천하통일을 이루면서 에도(현재의 도쿄)에 막부를 세웠습니다. 도쿠가와 가문은 재력이 증가하면 병사의 동원과 장비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에다 가문처럼 부유한 다이묘가 반란을 꾀하고 자금을 반란 준비에 투입한다면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에다 가문 역시 그들의 부유함이 쇼군에게 정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습니다. 이에 마에다 가문은 현명한 정책을 채택했습니다. 풍부한 자산을 군사와 무관한 일본 전통 가면극인 노, 장식미술, 다도와 같은 문화적 분야에 투입한 것입니다. 이 방침은 성공을 거두어 마에다 가문은 쇼군 가문에게 신임을 얻고 막부 내에서 높은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 가나자와는 에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중심도시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문화적 영향력을 높이는 것은 막부의 지배를 인정하면서도 번의 독립성을 나타낼 수 있는 평화적인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마에다 가문의 문화정책은 크게 ‘수집’과 ‘육성’ 2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미술품 수집은 번주의 위신을 높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당시 무사들에게 일반적인 일이었지만, 부유했던 마에다 가문은 다른 다이묘들을 능가하는 자금을 미술품 수집에 쏟아부어 일본 각지의 많은 명화가 마에다 가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에다 가문은 단순히 수집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마에다 가문은 지역예술과 공예의 진흥을 번 경영의 기본으로 삼으며, 전국에서 우수한 장인들을 초청해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주거공간 등을 제공했습니다. 가가유젠을 비롯해 이시카와를 대표하는 많은 공예품들은 마에다 가문의 초청으로 교토와 에도에서 가나자와로 이주한 장인들에 의해 확립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이시카와 공예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가나자와 성 아래에 있던 무구 수리소를 다양한 공예 공방인 ‘가가번 세공소’로 전환한 일이었습니다. 역대 번주의 자금 지원을 받은 장인들은 기술을 연마하고 후계자를 양성했으며, 공예분야의 경계를 넘어 공동작업에 참여하여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냈습니다. 제5대 번주 마에다 쓰나노리(1643~1724)는 전국에서 다양한 분야의 공예 견본을 수집하여 정리하고 분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것이 ‘햣코히쇼’인데, 가가번 세공소 장인들은 이를 참고하여 배우고 영감을 얻었습니다. 칠기, 금속공예, 목공예 등 오늘날 이시카와 전통공예의 토대가 된 많은 중요한 기술을 탄생시킨 곳이 바로 이 혁신적인 가가번 세공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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