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鞆ケ浦道 山吹城登城口

  • 島根県
ジャンル:
史跡・城跡 集落・街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ワード数:
251-500
作成年度:
2019年
地域協議会名:
石見銀山多言語協議会

Tomogaura Road (Entrance to Yamabuki Castle)

Located on a lush hillside some distance from the closest buildings, the starting point of the 7.5-kilometer road between Iwami Ginzan and the port of Tomogaura can be difficult to spot. In the latter half of the sixteenth century, this was the epicenter of the entire silver mine. Known as the Sannai settlement, it centered on an administrative facility where officials overseeing the mine were based. Nearby stood the miners’ homes, shops, and several temples, each with its own cemetery. In this period, the mine was ruled first by the Ouchi family, which established the Tomogaura Road and built the Yamabuki Castle on high ground just outside the settlement. This hilltop fortress served to protect the mine and the road during an epoch of constantly shifting alliances and rivalries among local warlord-led families.


The Ouchi lost their stronghold and eventually conceded control over the silver mine itself to the Mohri family in 1562, but Yamabuki Castle and Sannai maintained their central position in the mining community for another four decades. In 1600 Iwami Ginzan was taken over by the Tokugawa clan, who three years later went on to unify the entire country under their banner, establishing the Tokugawa shogunate that was to rule Japan until 1867. The new government abandoned Sannai, choosing to establish its center of control in the Omori area at the foot of the mountain. The town of Omori then developed around this magistrate’s office (daikansho), while the flow of silver was directed away from the coast, to be carried instead over land to the port at Onomichi and from there to Osaka and Edo (present-day Tokyo).


Today only the stone foundations remain. The site of Yamabuki Castle, from where you can look out over the coastline of the Sea of Japan, has been reclaimed by nature. But the Tomogaura Road can still be traveled, allowing you to imagine the massive effort needed to haul heavy loads of ore through the forests on foot more than 400 years ago.


鞆之浦道(山吹城登城口)


鞆之浦道(鞆,音同「丙」)全長7.5公里,連接石見銀山與鞆之浦港。這條道路的起點位於一座草木繁茂的山坡上,距離最近的建築仍有一點距離,因此如今這個起點確切的位置很難找到。然而,在16世紀下半葉時,這裡曾是整個銀山地區的核心。行政機構就位於名為「山內」的礦村中心,官員們駐紮在此監管礦山,附近坐落著礦工住宅、商店和幾座設有公共墓地的寺廟。大內家在最先取得銀山掌控權後,修建了鞆之浦道,在村外的高台上建起了山吹城。那一時期,由武將率領的各地方家族時而聯盟,時而敵對,形勢瞬息萬變,這座山頂要塞無疑起到了保護礦山和道路的作用。

1562年,大內家失勢,銀山的控制權落入毛利家手中。但毛利家統治的40年間,山吹城和山內礦村依然是這個礦山社區的中心。1600年,德川家接掌石見銀山。3年後,全日本納入德川麾下,開啟了統治日本至1867年的德川幕府時期。新的幕府政權捨棄了山內村落,選擇在山腳下的大森地區建立「代官所」——幕府在地方的代表處,大森町隨之發展起來。礦山出產的白銀也不再送往海岸碼頭,而是經陸路送往尾道,然後轉運至大坂(今大阪)和江戶(今東京)。

如今,這處可以遠眺日本海的山吹城遺址僅存石基,隱身於大自然中,但鞆之浦道依然可以通行。走在這條道上,不禁令人遙想400多年前人們拖著滿載的礦石穿行山林的艱辛情景。

鞆之浦道(山吹城登城口)


鞆之浦道(鞆,音同“丙”)全长7.5公里,连接石见银山与鞆之浦港。道路的起点位于一片草木繁茂的山坡上,距离最近的建筑也有些距离,因此如今很难找到。然而,在16世纪下半叶时,这里曾是整个银山地区的核心。当时行政机构就坐落在这个名为“山内”的矿村中心,官员们驻扎在此监管矿山,附近坐落着矿工住宅、商店和几座配备公共墓地的寺庙。最先取得银山掌控权的是大内家族,他们修建鞆之浦道,在村外的高台上建起了山吹城。当时,由武将率领的各地方家族时而联盟,时而敌对,形势瞬息万变,这座山城要塞无疑是起到了保护矿山和道路的作用。

1562年,大内家族失势,银山的控制权最终落在了毛利家族手中。但此后的40年间,山吹城和山内矿村依然是这个矿山社区的中心。1600年,德川家族接掌石见银山。3年后,全日本归属德川旗下,统治日本至1867年的德川幕府就此建立。新的幕府政权舍弃了山内村落,选择在山脚下的大森地区建立“代官所”(幕府在地方的代表处),大森町随之发展起来。矿山出产的白银也不再送往海岸码头,而是经陆路运到尾道,然后再转运至大坂(今大阪)和江户(今东京)。

如今,这处可以远眺日本海的山吹城遗址仅余石基,隐身于大自然中,但鞆之浦道依然可以通行。走在这条道上,不禁令人遥想400多年前人们拖着满载的矿石穿行山林的艰辛情景。

도모가우라 도로 야마부키성 입구


이와미 은광과 도모가우라항을 잇는 이 7.5km 길의 시작점은 가장 가까운 건물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 중턱의 풀이 우거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현재로서는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이 장소는 은광 전체의 중심지였습니다. 산나이 마을로 알려진 이 지역의 중심부에는 은광을 감독하는 관리의 거점이었던 관리 시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근에는 광부와 그의 가족들이 살았던 주거지와 상점, 그리고 묘지가 있는 여러 사찰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맨 처음 이와미 은광을 지배했던 오우치 씨족은 도모가우라 도로를 개통하면서 마을 바로 바깥쪽에 있는 산 정상에 야마부키성을 지었습니다. 이 언덕 위에 지어진 요새는 지방의 군벌들이 끊임없이 적대와 동맹 관계를 반복했던 전국 시대에 은광과 은 광석의 수송로를 적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오우치 씨족은 1562년 적이었던 모리 씨족에게 야마부키성과 은광 자체의 지배권을 빼앗기고 말았지만, 야마부키성과 산나이 마을은 그후로도 40년간 은 채굴 공동체의 중심적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1600년 이와미 은광이 도쿠가와 씨족의 손에 넘어가고 그들의 기치 아래 일본 전체가 통일되면서 1867년까지 일본을 통치한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산나이를 버리고 그 대신 산기슭에 위치한 오모리 지구를 은광 관리의 중심지로 선택했습니다. 그후 오모리 마을은 이 다이칸쇼(막부의 직할령을 관리하는 관청)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때부터 은은 바다가 아닌 육지를 통해 오노미치까지 운반된 후, 거기에서 다시 오사카나 에도(현재의 도쿄)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현재 자연으로 완전히 뒤덮인 야마부키성에 오르면, 일본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넓게 트여 있고 부분적으로 산성의 기초인 석축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보존된 도모가우라 도로는 400여년 전 험한 숲길을 따라 무거운 광석을 옮겼던 사람들의 엄청한 노력을 가늠케 합니다.

鞆ケ浦道 山吹城登城口

石見銀山と鞆ヶ浦港を結ぶこの7.5キロの道の始点は、最も近い建物からいくらか離れた緑が生い茂る丘の中腹にあるため、現在では見つけるのが難しくなっています。しかし16世紀後半には、この場所は銀山全体の中心地でした。山内集落として知られるこの場所は、銀山の監督を行う役人が拠点とする管理施設が中心にありました。その近隣には、坑夫とその家族の住居、商人が物を売る商店、さらに自らの墓地を管理する複数の寺院が建ち並んでいました。この時代の銀山は、初めは大内氏によって支配され、この大内氏が鞆ヶ浦道を作り、集落のすぐ外側の高地に山吹城を建てました。この丘の上に建つ要塞は、地方の武将が率いる一族の間で絶えず同盟・敵対関係が変化する時代において、敵の侵略から銀山および銀鉱石を海岸まで運ぶ道を守る役割を果たしました。


大内氏は、1562年に敵対する毛利氏の手によって、この要塞、さらに最終的には銀山自体の支配権を失いましたが、山吹城と山内集落はその後40年間にわたって、採掘共同体の中心的地位を維持しました。しかし、1600年に石見銀山が徳川氏の手に落ちると、その3年後には同氏の旗印のもと日本全土の統一が進み、1867年まで日本を統治することとなる徳川幕府が形成されました。新政府は山内を破棄し、山の麓にある大森地区に管理の中心地を確立することを選びました。その後、大森町はこの代官所を中心に発展し、銀の輸送については、海ではなく陸を通って尾道まで運び、そこから大阪や江戸(現在の東京)への運ば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現在の山内は、石造りの建物の基礎部分のみが残り、日本海をはるかに見渡すことができる山吹城の跡地は自然に覆い尽くされています。しかし、鞆ヶ浦道は今でも歩くことができ、400年以上前に森の中を歩いて重たい鉱石を運ぶのに要した、信じられないほどの労力を思い描くことができ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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