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石見銀山(世界の鉱山比較)

  • 島根県
ジャンル:
世界遺産(自然・文化)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ワード数:
251-500
作成年度:
2020年
地域協議会名:
石見銀山多言語解説協議会

Iwami Ginzan and International Contacts


The Iwami Ginzan silver mine experienced two periods of vigorous international engagement during its 400-year history. The first of these came soon after the discovery of the mine in 1527 and lasted until the early 1600s, while the other coincided with the rapid modernization of Japan during the Meiji era (1868–1912).


Silver in the Age of Discovery

In the 1500s, when the Spanish and Portuguese empires expanded global trade and colonized lands and peoples from Mexico to Macau, silver became perhaps the most in-demand commodity in the world. The source of these dominant nations’ wealth—silver mined in places such as Guanajuato in Mexico, Potosí in Bolivia, and Iwami Ginzan—greased the wheels of the world economy. Iwami silver was handled mainly by the Portuguese, who bought it with Chinese silk. They sold some silver to Ming China while circulating the rest throughout their maritime empire. It is estimated that at least 10 percent of all the silver traded around the world in the late 1500s came from Iwami Ginzan. This was made possible by another product of international exchange: the haifuki (cupellation) method of refining silver, which was introduced to Iwami from the Korean Peninsula in 1533 and allowed for the production of high-purity silver in large quantities. Iwami Ginzan’s ties to the world economy were largely severed, however, after the Tokugawa clan unified all of Japan under its banner and in 1603 established a government that was to rule the country until 1867. The Tokugawa restricted foreign contacts and adopted an isolationist foreign policy that prevailed until the latter half of the 1800s.


Colonial links

Japan began to look outward again after the Meiji Restoration of 1868, which led to the establishment of a new government with Emperor Meiji (1852–1912) as its sovereign ruler. Victory in the First Sino-Japanese War (1894–1895) resulted in the acquisition of Chinese territory, including the island of Taiwan, making Japan a colonial power. At this time, Iwami Ginzan was controlled by the Fujita-gumi corporation, which had obtained rights to the silver mine in 1886 and also operated several other mines in other parts of the country. Fujita-gumi, however, was in dire financial straits due to the low profitability of its mines. In 1896, the Japanese government, eager to develop its newly acquired colony, distributed claims to two promising mines in Taiwan. Fujita-gumi jumped at the opportunity, and was awarded the Ruifang gold and copper mine near the town of Jiufen in the northern part of the island.


Iwami Ginzan and Taiwan

Fujita-gumi invested heavily in its Taiwanese holdings, introducing cutting-edge mining and refining equipment and technology, some of which had been developed at Iwami Ginzan. Many engineers and other specialists were also transferred to Ruifang after proving their worth at Iwami Ginzan, and active exchange of personnel took place between the two mines. Jiufen grew into a bustling town, which survived the critical situation in 1923 when Fujita-gumi abruptly abandoned its Taiwanese operations. That was also the year when low copper prices on the world market forced the company to close its operations at Iwami Ginzan. Japanese mining in Taiwan continued at the Kinkaseki gold mine near Jiufen, which entered its greatest period of prosperity in the 1930s. In 1935, Kinkaseki was the most productive facility of its kind in the Japanese empire, generating up to 2.6 tons of gold annually. It operated until 1987 and is now designated a historic site, where a museum introduces visitors to the history of mining in the Jiufen region.


石見銀山與海外


石見銀山在其400年的礦業發展歷程中,經歷過兩個繁盛的國際貿易時期:第一次從1527年銀礦發現之後,一直延續到17世紀早期;另一次則與明治時代(1868-1912)日本的現代化發展時期同步。


大航海時代的白銀生產與貿易

16世紀,西班牙和葡萄牙兩大王國大肆拓展全球貿易,殖民了從墨西哥到澳門的廣闊領土,白銀需求量激增,成為當時全球最炙手的商品。墨西哥的瓜納華托、玻利維亞的波多西、日本的石見銀山等地開採的銀礦,成為這些海上霸主的財富之源,也快速推動了世界經濟的車輪前行。石見銀山的白銀貿易基本控制在葡萄牙人手中,他們用中國絲綢交換日本白銀,再將部分銀子賣給明朝政府,剩餘部分則在他們的航海帝國裡流通。據估算,截至16世紀晚期,在全球白銀貿易總量中,至少有10%來自石見銀山。而這樣的開採效能,得益於另一項國際貿易的成果「灰吹法」。所謂的灰吹法係指一種銀礦的精煉技術,於1533年自朝鮮半島傳入石見地區,它可以大量冶煉高純度白銀。德川家於1603年統一全國,創建幕府政權後,統治日本直到1867年。然而德川幕府嚴格限制對外交往,實施閉關鎖國政策,在此期間,石見銀山與世界經濟的聯繫幾乎斷絕,直到19世紀下半葉才改觀。


延伸至海外殖民地的採礦業

1868年,明治維新開始,以明治天皇(1852-1912)為執政者的新政府建立。之後,日本重新將目光投向了世界。中日甲午戰爭(1894-1895)後,日本成為殖民國家,佔據了包括台灣在內的亞洲許多地區。此時的石見銀山為藤田組掌控,後者於1886年取得銀礦開採權,並同時在日本全國經營著多處礦場。然而,礦業利潤低,因此藤田組陷入了財務危機。1896年,正值日本政府熱衷於開發新的殖民地的時期,開放了兩處前景可觀的台灣礦藏的經營權。藤田組抓住機會,獲准開採台灣北部九份附近的瑞芳金銅礦山。


石見銀山與台灣

藤田組在台灣投下巨資開發礦山,引進了最先進的採掘、冶煉設備與技術,其中部分還是在石見銀山研發的。大批經驗豐富的工程師和各類專業人員從石見銀山被派到瑞芳,兩處礦山人員交流頻繁,九份也漸漸發展為一座繁榮的小鎮。1923年,藤田組突然放棄台灣業務,九份經濟因此一度陷入困境,但終究還是恢復了活力。同一年,全球銅價下跌,藤田組不得不關閉了石見銀山的開採業務。不過日本在九份附近的金瓜石金礦的採礦項目依然延續,及至1930年代,金瓜石金礦的產量達到了巔峰。1935年,金瓜石已經成為日本轄下同類礦山中產量最高的一處,年產黃金可達2.6噸。金礦開採一直持續到1987年才關閉,如今已成歷史遺址。遺址上落成的新北市立黃金博物館,向遊客介紹九份地區的礦業興衰。

石见银山与海外


400年间,石见银山的矿业发展经历过两个繁盛的国际贸易时期。第一次是在1527年银矿发现后不久,一直延续到17世纪早期;另一次则与明治时代(1868-1912)日本的高速现代化发展时期同步。


大航海时代的白银生产与贸易

16世纪,西班牙和葡萄牙两大王国大肆拓展全球贸易,殖民了从美洲墨西哥到亚洲澳门的许多土地和人民,白银需求量激增,几乎算得上是当时全球最紧俏的商品。由墨西哥的瓜纳华托、玻利维亚的波多西、日本的石见银山等地开采的银矿,成为这些强国的财富之源,也飞速推动了世界经济的车轮前行。石见银山的白银基本把持在葡萄牙人手中,他们用中国丝绸交换日本白银,再将一部分银子卖给中国明朝,剩余部分则在他们的航海帝国里流通。据估算,截至16世纪晚期,在全球白银贸易总量中,至少有10%来自石见银山。而这样的产出能力,得益于另一项国际贸易的成果“灰吹法”。这是一种银矿的精炼技术,于1533年自朝鲜半岛传入石见地区,它可以大批量冶炼出高纯度白银。之后,德川家族于1603年统一全国,创建幕府政权,统治日本直到1867年。然而在此期间,石见银山与世界经济的联系几乎断绝。德川幕府严格限制对外交往,实施闭关锁国政策,直到19世纪下半叶才改观。


延伸至海外殖民地的采矿业

1868年,明治维新开始,以明治天皇(1852-1912)为执政者的新政府建立。之后,日本重新将目光投向了世界。中日甲午战争(1894-1895)后,日本化身殖民国家,占据了包括台湾在内的部分中国领土。这一时期的石见银山为藤田组掌控,后者于1886年取得银矿开采权,并在全国经营多处矿场。然而,因为矿山的利润太低,藤田组陷入了财务危机。1896年,日本政府正热衷于开发新的殖民地,开放了两处前景可观的台湾矿藏的经营权。藤田组抓住机会,获准开采台湾北部九份附近的瑞芳金铜矿山。


石见银山与台湾

藤田组在台湾投下巨资开发矿山,引进了最先进的采掘、冶炼设备与技术,其中部分还是在石见银山研发的。大批经验丰富的工程师和各类专业人员从石见银山被派到瑞芳,两处矿山人员交流频繁,九份也渐渐发展为一座繁荣的小镇。1923年,藤田组突然放弃台湾业务,九份经济因此一度陷入困境,但终究还是恢复了活力。同一年,全球铜价下跌,藤田组不得不关闭了石见银山的开采业务。不过日本在九份附近的金瓜石金矿的采矿项目依然延续,及至20世纪30年代,这处金矿的产量更是达到了巅峰。1935年,金瓜石已经成为日本所辖同类矿山中产量最高的一处,年产黄金可达2.6吨。金矿一直运营到1987年才关闭,如今已是历史遗址。遗址上落成的新北市立黄金博物馆,向来访者介绍九份地区的矿业发展历史。

이와미 은광과 국제 사회의 연관성


400년의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이와미 은광은 두 차례에 걸쳐 활발하게 국제 사회와 연관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1527년 은광이 발견된 직후부터 1600년대 초기까지 지속되었고 두 번째는 메이지 시대(1868~1912) 일본의 급격한 근대화와 궤를 같이합니다.

대항해 시대의 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제국이 세계 무역을 확장하며 남아메리카와 아시아 등 넓은 영토와 수많은 민족을 식민지화했던 1500년대에 은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수요가 많은 상품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부의 원천, 즉 멕시코의 과나후아토, 볼리비아의 포토시, 그리고 이와미 은광 등에서 채굴된 은은 세계 경제의 윤활류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이와미의 은은 주로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거래되었는데 그들은 명나라에서 사들인 비단과 이와미의 은을 교환했습니다. 또한 명나라에서 비단과 교환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이와미의 은은 포르투갈 해양 제국 전역에서 유통되었습니다. 1500년대 후반 전 세계에서 거래된 은의 총량 중 적어도 10%는 이와미 은광에서 채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국제 교역의 또 다른 산물인 회취법(灰吹法)이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높은 점유율을 보유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역시 국제 교역이 가져다준 회취법이라는 제련 기술 덕분이었습니다. 1533년에 한반도에서 전해진 이 기법을 바탕으로 순도가 높은 은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1603년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 전역을 통일하고 그후 1867년까지 일본을 통치하는 에도 막부가 성립된 후에는 외국과의 접촉을 제한하는 쇄국 정책을 실시하면서 이와미 은광과 세계 경제의 연결고리는 단절되었습니다.

식민지와의 연관성

도쿠가와 가문이 통치하던 에도 막부가 붕괴되고 1868년 이후 다시 외부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이는 메이지 천황(1852~1912)을 주권자로 하는 신정부의 수립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청나라와의 전쟁인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만을 포함한 중국의 일부 영토를 획득하여 식민지 보유국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와미 은광은 후지타구미라는 기업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1886년에 은광의 채굴권을 취득한 후지타구미는 일본 내 다른 지역에서도 여러 개의 광산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후지타구미는 소유한 광산의 낮은 수익성 때문에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1896년 새롭게 획득한 식민지 개발에 열을 올리던 일본 정부는 대만의 유망 광산 두 곳에 대한 권리를 각 회사에 할당했습니다. 이 찬스를 놓치지 않은 후지타구미는 대만섬 북부 지우펀 인근에 있는 루이팡(瑞芳) 광산의 금과 구리 채굴권을 할당받게 되었습니다.

이와미 은광과 대만

후지타구미는 대만에서 보유한 광산에 거액의 금액을 투자하고 채굴과 제련을 위해 최첨단 설비와 기술을 도입했는데 그 일부는 이와미 은광에서 개발된 것이었습니다. 이와미 은광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한 기술자 등 많은 전문가들도 루이팡으로 파견되어 이와미와 루이팡 두 광산 사이에서 활발한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1923년 세계 시장에서 구리 가격이 하락하자 후지타구미는 이와미 은광과 대만에서의 사업을 돌연 중지했지만, 그 시기 루이팡은 이미 활기 넘치는 도시로 성장한 이후였기 때문에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대만의 광산 개발은 지우펀(九份) 인근의 진과스(金瓜石) 금광으로 이어졌고 1930년대에 절정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35년에 일본제국 내에서도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설로 자리잡은 진과스 금광은 연간 최대 2.6톤의 금을 생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일본의 손을 떠나 대만 기업이 운영하게 되었으며 1987년까지도 조업이 계속되었습니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이곳 박물관에서는 지우펀 지역의 광산 개발 역사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石見銀山と海外とのつながり


石見銀山は、その400年の歴史の中で、精力的に国際社会への関与を見せた時期が2回ありました。最初は、1527年の鉱山の発見後すぐから1600年代初頭まで続く時期で、2回目は、明治時代(1868~1912年)の日本の急速な近代化と軌を一にしています。


大航海時代の銀

スペインとポルトガルの帝国が世界貿易を拡大し、メキシコからマカオまでの土地と人民を植民地化した1500年代、銀はおそらく世界で最も需要のある商品となりました。これらの支配的国家の富の源泉、すなわちメキシコのグアナファト、ボリビアのポトシ、そして石見銀山などの土地で採掘された銀は、世界経済の潤滑油となります。石見の銀は、主にポルトガル人の手で取引され、彼らを中国の絹で銀を購入していました。銀の一部は明朝に売られ、残りはポルトガルの海洋帝国全域で流通することとなります。1500年代後半に世界中で取引された銀の総量のうち、少なくとも10%は石見銀山のものであったと推測されます。これを可能としたのが、国際交易のもう1つの産物である灰吹(はいふき)法でした。これは銀の精錬方法の一種で、1533年に朝鮮半島から伝わり、高純度の銀を大量生産が可能となったのです。ところが、徳川家が日本全国をその旗の下に統一し、1603 年に、1867年まで国を支配することとなる幕府を樹立した後は、石見銀山と世界経済とのつながり大きく断絶します。徳川家は、外国との接触を制限し、鎖国政策を採用して、これが1800年代後半まで続きます。


植民地とのつながり

日本は、1868年の明治維新以降、再び外の世界に目を向け始め、これが明治天皇(1852~1912)を主権者とする新政府の樹立へとつながります。日清戦争(1894~1895)で勝利した結果、台湾を含む中国の領土を獲得した日本は、植民地保有国となります。当時、石見銀山は藤田組によって管理されていました。藤田組は1886年に銀山の採掘権を取得し、国内の他の地域でも複数の鉱山を経営していました。ところが、所有する鉱山は採算性が低く、藤田組はひどい経営難に陥ります。1896年、新しく獲得した植民地の開発に熱心だった日本政府は、台湾の有望な鉱山2か所に対する権利の割り当てを行います。藤田組は、このチャンスに飛びつき、台湾島北部の九份近くにある瑞芳の金銅鉱山を与えられました。


石見銀山と台湾

藤田組は、台湾の保有地に巨額の投資を行い、採掘と精錬のために最先端の機器と技術を導入します。その一部は、石見銀山で開発されたものでした。石見銀山で自らの価値を証明した技師その他多くの専門家も瑞芳へと派遣され、2つの鉱山間で積極的な人事交流が行われました。瑞芳は活気あふれる街へと成長し、1923年に藤田組が突如として台湾での操業を停止した際の危機的状況も乗り越えます。その年はまた、世界市場における銅価格の下落により、藤田組が石見銀山の操業停止を余儀なくされた年でもあります。日本人による台湾での鉱山開発は、九份に近い金瓜石の金鉱山で続き、1930年代に最盛期を迎えます。1935年の時点で、金瓜石は、同種の施設としては、大日本帝国内で最も生産性の高い施設であり、年間最大2.6トンの金を産出していました。操業は1987年まで続き、現在は史跡に指定され、博物館では訪れる人々に九份における鉱山開発の歴史を紹介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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