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昆布山谷集落跡

  • 島根県
ジャンル:
史跡・城跡 世界遺産(自然・文化)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ワード数:
250以下
作成年度:
2020年
地域協議会名:
石見銀山多言語解説協議会
位置情報:
島根県大田市大森町

Kobuyamadani Settlement Site


The Kobuyamadani valley is located about 200 meters from the entrance to the Ryugenji mining tunnel, one of the central sights at Iwami Ginzan. When the silver mine flourished in the late sixteenth and early seventeenth centuries, a large mining settlement was built across the entire hillside. Houses and facilities for processing silver ore were constructed on flattened and terraced ground, at a convenient distance from the many mining tunnels dug into the rock. The Kobuyamadani settlement proved enduring: it was expanded gradually over the centuries and remained populated until the Meiji era (1868–1912). This was partially thanks to its relatively convenient location near the foot of Mt. Sennoyama, around which the silver mine was located. The low-lying setting, however, was also a curse: Kobuyamadani was often hit by floods, some of which caused severe damage.


In the upper part of the valley is the Shinyokoai mining tunnel, which was developed in the middle of the Edo period (1603–1867) and is a testament to the ingenuity of Kobuyamadani’s miners. To reach the vertical silver veins, the tunnel was dug into the mountainside horizontally and at a slight upward angle so that groundwater released by mining would flow out. Traditional mining tunnels were dug at a steep downward angle parallel to one or several silver veins, but they would sooner or later fill up with water. In addition to developing this innovative type of tunnel, the Kobuyamadani miners took up copper mining when the silver deposits in the area were depleted. These efforts were continued in the Meiji era, when the Fujita-gumi corporation acquired rights to Iwami Ginzan and built modern ore dressing and refining facilities in the valley. Those functions were moved to the nearby Kojidani area at the turn of the twentieth century, and Kobuyamadani fell silent after some 350 years of mining.


昆布山谷礦村遺址


昆布山谷距離龍源寺「間步」(礦坑通道)僅200公尺之遙,後者是石見銀山最重要的景點之一。16世紀晚期至17世紀早期,本地的銀礦採掘產業如火如荼,興建的大型礦村佔據了昆布山谷的整片山坡。礦工的住宅和礦石冶煉設施建在平坦的階梯狀台地上,離許多深入岩層裡的礦道都不遠。昆布山谷礦村在數百年間逐步發展,直至明治時代(1868-1912)仍有人居住。昆布山谷礦村之所以能存續如此長久,這在一定程度上得益於它便利的地理位置。礦村靠近仙之山山腳,周圍便是銀礦。然而,低窪的地勢也常常讓昆布山谷因此遭遇洪水襲擊,時而會蒙受巨大的人員及經濟損失。

山谷的高處便是新橫相間步。這條礦道於江戶時代(1603-1867)中期開掘,見證了昆布山谷礦工的聰明才智。為了挖到垂直分布的銀礦脈,新橫相間步的礦道相對山壁呈水平微向上傾斜走向,這樣就能把採礦時滲出的地下水順勢排出坑道。而傳統礦道通常都順著一或多條礦脈的走向往下挖掘,這樣坑道內早晚會被滲出的地下水淹沒。除了在礦道挖掘上有突破創新之外,昆布山谷的礦工們還隨機應變,在本地的銀礦資源耗竭後轉而投身銅礦開採。進入明治時代後,這種不屈不撓的姿態依然未變。當時藤田組拿到了石見銀山的開採權,在這處山谷裡建起了現代化的選礦和冶煉設施。19世紀末20世紀初,所有生產轉移到相距不遠的柑子谷區域,持續採礦近350年的昆布山谷終於重歸寧靜。

昆布山谷矿村遗址


昆布山谷距离龙源寺“间步”(矿坑通道)入口只有200米,后者是石见银山最重要的景点之一。16世纪晚期至17世纪早期,本地的银矿采掘产业如火如荼,兴建的大型矿村占据了昆布山谷的整片山坡。矿工的住宅和矿石冶炼设施建在平坦的阶梯状台地上,离许多深入岩层里的矿道都不远。昆布山谷矿村在数百年间逐步发展,直至明治时代(1868-1912)依然有人居住。昆布山谷矿村之所以能存续如此长久,这在一定程度上得益于它相对便利的地理位置。矿村靠近仙之山山脚,周围便是银矿。然而,低洼的地势也如同达摩克利斯之剑,昆布山谷常常遭遇洪水袭击,有时会蒙受巨大的损失。

山谷的高处便是新横相间步。这条矿道于江户时代(1603-1867)中期开掘,见证了昆布山谷矿工聪明才智。为了挖到垂直分布的银矿脉,新横相间步的矿道相对山壁呈水平微向上倾斜走向,以便将采矿时渗出的地下水顺势排出坑道。而传统矿道通常都顺着一条或多条矿脉的走向往下挖掘,这样坑道内早晚会被渗出的地下水淹没。除了在矿道挖掘上有突破创新之外,昆布山谷的矿工们还灵活机变,在本地银矿资源耗竭后转而投身铜矿开采。进入明治时代后,这种积极奋进的姿态依然未变。当时藤田组拿到了石见银山的开采权,在这处山谷里建起了现代化的选矿和冶炼设施。19世纪末20世纪初,所有生产转移到相距不远的柑子谷区域,持续采矿近350年的昆布山谷终重归宁静。

고부야마다니 마을 터


고부야마다니는 이와미 은광의 주요 명소 중 하나인 류겐지 갱도 입구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마을 터입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이와미 은광이 번성하면서 언덕의 경사면 일대에는 광산 노동자들을 위한 대규모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때 암반에 뚫린 다수의 갱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자리한 평탄한 계단식 지대 위에 노동자들의 마을과 은을 가공하는 시설이 건설되었습니다. 고부야마다니 마을은 수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메이지 시대(1868~1912)까지도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마을이 이렇게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와미 은광 근처에 있는 센노산 기슭과 거리가 가까워서 비교적 접근이 편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이 저지대에 형성되었다는 점은 재앙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종종 홍수가 발생하여 때로는 마을에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혔던 것입니다.


고부야마다니 위쪽에는 신요코아이 갱도가 있습니다. 신요코아이 갱도는 에도 시대(1603~1867) 중기에 개발된 것으로 고부야마다니에 살았던 광산 노동자들의 창의성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신요코아이 갱도는 수직으로 뻗은 은 광맥에 닿을 수 있도록 산중턱에서 수평보다 약간 위쪽을 향하는 각도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채굴 과정에서 나온 지하수를 외부로 쉽게 흘려 보낼 수 있었습니다. 원래의 갱도는 하나 이상의 은 광맥과 평행이 되도록 급격한 각도로 아래를 향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광맥을 따라 만들어진 갱도는 배수 기능이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물로 가득차 버리고 맙니다. 고부야마다니의 광산 노동자들은 이를 방지하지 위해 혁신적인 형태의 갱도를 발명한 것 외에도 은이 전부 채굴되자 구리를 채굴하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는데, 후지타구미라는 기업은 이와미 은광의 권리를 손에 넣은 후 근대적인 광석 선광이나 제련을 위한 시설을 고부야마다니에 건설했습니다. 이러한 기능은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인근에 자리한 고지다니 지역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처럼 350년 가까이 채굴이 이루어졌던 고부야마다니에는 결국 조용한 정적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昆布山谷集落跡


石見銀山における中心的な名所の1つである龍源寺間歩への入り口から200メートルほど離れた所にあるのが昆布山谷です。石見銀山が16世紀後期から17世紀初期にかけて栄えると、丘の斜面一帯に大きな鉱山労働者のための集落が造られました。岩盤へと掘られた多くの坑道から便利な距離の場所にある、平坦で階段状になった土地の上には、家々や銀を加工するための施設が建設されました。昆布山谷の集落は長きにわたり存続することとなりました。集落は数世紀にもわたって段々と拡大していき、明治時代(1868–1912)までは人々が暮らしていました。集落がこれほど長く存続した理由の1つが、石見銀山付近にある仙ノ山の麓に近いという比較的便利な立地でした。しかし、集落が低地にあったことは災いの素ともなりました。昆布山谷はしばしば洪水に見舞われ、時には深刻な被害を受けることがあったのです。


昆布山谷の上側には新横相間歩があります。新横相間歩は江戸時代(1603–1867)中頃に開発されたもので、昆布山谷の鉱山労働者たちの創意工夫の証となっています。垂直に伸びる銀脈に届くように、新横相間歩は山腹に対して水平かつやや上向きの角度で掘られています。こうすることで採掘により出てきた地下水が流れ出すのです。従来の坑道は1つ以上の銀脈に対して並行して真っすぐ下向きの角度で掘られていました。しかし、そうした坑道は遅かれ早かれ水でいっぱいになってしまいます。こうした革新的なタイプの坑道を発明したことに加えて、昆布山谷の鉱山労働者たちは、その地域に埋まる銀が掘り尽くされると、銅の採掘を始めました。こうした取り組みは明治時代でも続けられました。明治時代に藤田組という企業が石見銀山の権利を手に入れると、近代的な鉱石の選鉱および精錬施設を昆布山谷に建設したのです。それらの機能は20世紀に入る頃に近くにある柑子谷の地域へと移されました。こうして350年間近く採掘が行われてきた昆布山谷に静寂が訪れ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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