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世界文化遺産「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萩城下町 木戸孝允旧宅 内観

  • 山口県
ジャンル:
世界遺産(自然・文化)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ワード数:
251-500
作成年度:
2020年
地域協議会名:
萩・外国の方に分かりやすい解説文整備推進協議会

Former Residence of Kido Takayoshi (1833–1877)

The former residence of early Meiji statesman Kido Takayoshi (also known as Katsura Kogorō) stands on a side street branching off the historical main road to Hagi Castle. The family was wealthy enough to afford a two-story house, but the second story had to be hidden from the street below. Two-story residences were generally prohibited during the Edo period (1603–1867), when it was considered rude to look down at a samurai from above (much less the daimyo himself). So, from the streets of Hagi, the house appears to be a humble single-story townhouse.


Born in this house under the name “Wada Kogorō,” Kido Takayoshi is remembered in Japan as one of the “Three Heroes” of the Meiji Restoration. His biological father was a samurai and physician to the Mōri daimyo family, but Kido was adopted at the age of seven by the Katsura family, who lived next door. Even as a young child, his intellectual talents were clear, and in 1849, Kido enrolled at the Meirinkan, the domain school where Yoshida Shōin (1830–1859) taught military science. There, Kido embraced Shōin’s ideas about westernization and imperial loyalism, summed up in the slogan sonnō jōi, or “revere the emperor, expel the barbarians.” While at the school, Kido became radicalized toward modernizing Japan, with or without the shogunate. In 1856, he wrote a letter supporting the construction of Chōshū domain’s first Western-style warship.


Kido became a member of anti-shogunate groups, and in 1864 he came close to being assassinated by the Shinsengumi in Kyoto. The Shinsengumi were a special police force organized by the Tokugawa shogunate to put down the growing insurrection against the established regime. Purportedly, Kido was warned by his geisha lover, Ikumatsu (1844–1887), who saw the Shinsengumi coming to kill him. They later married. Following the fall of the Tokugawa shogunate in 1868, Kido became one of the founders of the new Meiji government, and in December 1871, he joined the other statesmen and scholars of the Iwakura Mission on their voyage to observe industry and affairs i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Influenced by what he saw and learned on his journey, Kido became a powerful voice for further governmental reform on his return to Japan in 1873.


Today, Kido’s former childhood home is open to the public. It is a Nationally Designated Historic Site and is preserved as it was in the late 1800s. Displayed in the rooms are various things from Kido’s life, including a portrait photograph of Kido. Inscribed with “Maul and Co., Photographers and Miniature Painters of 187a Piccadilly and 62 Cheapside,” on the back, the portrait shows him in modern, Western-style dress. Also on display are examples of Kido’s childhood calligraphy. One particularly notable piece, of the word for “today,” hangs in an alcove. Kido's teacher added the Japanese phrase appare, which means “first rate” or “outstanding.”


木戶孝允故居


木戶孝允(1833-1877,即桂小五郎)是明治時代(1868-1912)初期的政治家,被譽為明治維新「三傑」之一,其故居位於通往萩城(萩,音同「秋」)歷史主街的一條支路旁。儘管這個家庭擁有足夠財富建造一棟兩層樓的房子,但在江戶時代(1603-1867),從上俯視武士(更不用說藩主)是不禮貌的,官方普遍禁止雙層住宅,所以這棟房子即使有兩層樓,外觀看起來也像一棟低調的平房。

木戶孝允就出生在這棟房屋內,那時他叫和田小五郎。其生父是藩主毛利家的侍醫,但他7歲時便被隔壁的桂家收養。木戶孝允在孩提時代就智力超群,1849年,他進入了明倫館,那是吉田松陰(1830-1859)教授軍事科學的藩校。他在那裡接受了老師關於西化和效忠皇家的觀念,即「尊王攘夷」思想。在校期間,木戶孝允益發認定,無論幕府是否當政,日本都需要走向現代化。1856年,他曾寫信支持萩藩(也叫「長州藩」,今山口縣)建造第一艘西式戰艦。

為了鎮壓越演越烈的反叛活動,幕府成立了特別警員部隊「新選組」。1864年,加入倒幕派的木戶孝允在京都險被新選組刺殺。據說,他的藝伎情人幾松(1844-1887)看到了刺客並提前警告,木戶孝允才逃過一劫。之後,兩人成婚。1868年幕府倒台後,木戶孝允成為新明治政府的創始成員之一,並於1871年12月加入岩倉使節團,和其他政治家以及學者一同前往美國和歐洲考察工業和社會現狀。受旅行中見聞的影響,1873年回國後,木戶孝允加強了對政府進一步改革的呼籲。

如今,木戶孝允童年時期的住宅已對大眾開放,它是國家指定史跡,保存了19世紀晚期的原貌。房間裡陳列著他的肖像照片以及與他有關的各種物品。肖像的背面寫著英文「Maul & Co., Photographers and Miniature Painters of 187a Piccadilly and 62 Cheapside」,照片中的他穿著現代西裝。此外,屋內還有木戶孝允童年的一些書法作品,懸掛在床之間(日式壁龕)的「今日」兩字特別值得注目,他的老師在上面批註了日語「天晴」兩字,意為「太棒了」。

기도 다카요시(1833~1877) 옛 주택


메이지 시대(1868~1912) 초기의 정치가이자 메이지 유신의 ‘삼걸(三傑)’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옛 주택은 하기 성 방면으로 성하도시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와 교차하는 좁은 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2층 집을 소유할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던 집안이었지만, 건물의 2층 부분은 아랫쪽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아야 했습니다. 에도 시대(1603~1867)에는 무사[특히 다이묘(넓은 영지를 다스린 대영주)]를 내려다보는 행위를 무례하다고 여겼고,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2층 건물을 금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기도 다카요시 옛 주택은 도로에서 보면 소박한 단층 구조의 마치야(상가주택)처럼 보입니다.


모리 가문의 시의(侍醫) 집안에서 와다 고고로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다카요시는 7세 때 옆집인 가쓰라 가문에 입양되면서 가쓰라 고고로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어릴 적부터 뛰어난 지성을 자랑했던 다카요시는 1849년에 양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로 요시다 쇼인(1830~1859)이 군사학을 가르치는 번교(무사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학교) ‘메이린칸’에 입학했습니다. 다카요시는 그곳에서 쇼인이 주창한 ‘서양화(西洋化)’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외적을 척결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에 공감하면서 면학에 힘썼습니다. 재학 중에는 막부와의 협력과는 상관없이 일본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56년에 조슈번 최초의 서양식 군함 건조를 진언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다카요시가 반막부 세력의 일원이 되면서 1864년에는 신센구미에 의해 교토에서 암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신센구미란,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에 대한 폭동을 진압하고자 조직한 특수 경찰 조직을 말합니다. 다카요시의 애인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게이샤 이쿠마쓰(1844~1887)는 신센구미가 다카요시를 노리고 찾아온 것을 목격하면서 그에게 경고했다고 합니다. 다카요시는 1868년에 막부가 붕괴된 후, 메이지 신정부의 창설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면서 1871년 12월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다른 정치가 및 학자들과 함께 미국과 유럽의 산업과 사회를 시찰하는 항해에 나섰습니다. 이 시찰 여행을 통해 보고 배운 것에 영향을 받은 다카요시는 1873년에 일본에 귀국하면서 정치 개혁 심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다카요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옛 주택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800년대 후반의 모습 그대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실내에는 다카요시의 생애에 관한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모던한 서양복 차림의 다카요시의 모습과 뒷면에는 ‘Maul & Co., Photographers and Miniature Painters of 187a Piccadilly and 62 Cheapside’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초상 사진, 다카요시가 유년기에 쓴 서예 작품 등이 있는데 그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도코노마(일본식 방의 상좌에 바닥을 한층 높게 만든 곳)에 걸려 있는 ‘今日(오늘)’라고 적힌 작품입니다. 다카요시가 7살 무렵에 쓴 이 작품에는 당시 서예의 스승이 ‘매우 훌륭하다’는 뜻으로 쓴 글자가 붉은 색으로 적혀 있습니다.

木戸孝允(1833~1877)旧宅


明治時代(1868~1912年)初期の政治家であり、明治維新の「三傑」の一人として知られる木戸孝允(桂小五郎という名でも知られる)の旧宅は萩城へ向かって城下町を貫く主要な通りと交わる細い通りに建っている。一家は2階建ての家を持つ経済的余裕があったが、2階部分は下の通りからは見えない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江戸時代(1603~1867年)、武士(特に大名(広い領地を治めた大領主))を見下ろすことは無礼に当たると考えられており、通常、2階建ては禁じられていたからだ。そのため、木戸孝允旧宅は、通りから見ると地味な平屋の町屋(商人の家)に見える。


和田小五郎という名前で毛利家の侍医の家に生まれた孝允は、7歳の時に隣家の桂家に養子に出され、桂小五郎を名乗った。幼い頃から優れた知性を誇っていた孝允は、1849年、養父の意向に反して吉田松陰(1830~1859年)が軍事学の教鞭をとる藩校(武士の子弟を教育するための学校)「明倫館」に入学した。そこで孝允は、松陰が唱えた「西洋化」と、天皇への忠誠を誓い、外敵を斥ける「尊王攘夷」の思想に共感し、勉学に励んだ。在学中、幕府との協力の有無にかかわらず、日本の近代化の必要性を切実に感じるようになった。そして1856年に、長州藩初の洋式軍艦の建造を進言する書簡を送った。


孝允は倒幕グループの一員になり、1864年には新撰組により京都で暗殺されそうになった。新撰組とは、徳川幕府が政権への暴動を鎮圧するために組織した特殊な警察組織である。孝允の恋人であり、のちに彼の妻となる芸者の幾松(1844~1887年)が、新撰組が孝允を狙ってやって来たところを目撃し、彼に警告をしたと言われている。1868年に幕府が崩壊した後、孝允は明治新政府の創設者の一人となり、1871年12月には、岩倉使節団の一員として、他の政治家や学者たちと一緒に、アメリカやヨーロッパの産業や社会を視察する航海に出た。この視察の旅で見て学んだものに影響を受けた孝允は、1873年に帰国すると、政治改革の深化を求める声を強めた。


孝允が幼少期を過ごした旧宅は国の史跡に指定されており、1800年代後半当時のまま一般公開されている。部屋には、孝允の生涯に関する様々なものが展示されている。モダンな西洋服姿の孝允が写っていて、裏面には「Maul & Co., Photographers and Miniature Painters of 187a Piccadilly and 62 Cheapside」と書かれている肖像写真や、孝允が幼少期に描いた書道の作品などがあるが、特に注目すべきは、床の間(日本間の上座に、床を一段高くして作った所)に掛けられている「今日」と書かれた作品であろう。孝允が7歳の頃に書いたこの作品には、書道の師匠が、「非常に素晴らしい」という意味のコメントを赤字で付け加え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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