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菊池市の概要

  • 熊本県
ジャンル:
集落・街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ワード数:
251-500
作成年度:
2022年
地域協議会名:
国立公園満喫プロジェクト阿蘇くじゅう国立公園地域協議会
位置情報:
熊本県菊池市隈府888

Kikuchi: An Introduction


The Kikuchi region extends across vast fertile plains in northern Kumamoto Prefecture. Flowing out of the mountains northeast of the plains and through this pastoral landscape is the Kikuchi River, providing water for rice cultivation for more than two millennia. Agriculture remains at the core of local life and culture. Much of this cultural heritage can be traced back to the days of the Kikuchi clan, which controlled most of central Kyushu from the eleventh until the early sixteenth century. The Kikuchi headquarters was the castle town of Waifu, today the city of Kikuchi.


The rise of the Kikuchi clan

The Kikuchi clan is thought to have been founded by Fujiwara no Noritaka, a high-ranking court official. In 1070, Noritaka’s superiors at Dazaifu, the administrative center of Kyushu near what is now the city of Fukuoka, appointed him to oversee an agricultural estate (shoen) owned by the court in what is now the Kikuchi district. Noritaka changed his surname to Kikuchi and built a fortified compound on the river that later took the same name, laying the foundations for the castle town of Waifu and for the rice trade that was to bring prosperity to his descendants and expand Kikuchi ascendancy far and wide.

Noritaka’s successors extended their clan’s influence through skillful diplomacy and success on the battlefield. They acquired great wealth by monopolizing trade on the Kikuchi River and selling crops grown on the surrounding plains, which they developed into some of the most productive farmland in the country. The Kikuchi reached the height of their prosperity in the fourteenth century, when the imperial court split into two as the result of a power struggle, and the rival Northern and Southern courts fought for control of the country. The Kikuchi were staunch supporters of the Southern Court, whose emperor sent his young son, Prince Kaneyoshi, to Kyushu to strengthen existing alliances and cultivate new ones.


A cultural legacy

On Prince Kaneyoshi’s arrival in Waifu in 1348, the Kikuchi planned entertainments befitting a member of the imperial court. A celebratory New Year’s performance called matsubayashi—modeled on performing arts enjoyed by the aristocracy, with dancing accompanied by singing, drums, and flutes—inaugurated a tradition that survives today. For more than 650 years, the entertainments witnessed by the prince have been reenacted annually on a stage in front of a giant muku (Aphananthe aspera) tree in central Kikuchi. The tree is said to have been planted by Prince Kaneyoshi, or to have grown from a staff he stuck in the ground. During the matsubayashi performance, held on October 13, spectators are not allowed to enter the area between the stage and the tree so as not to obstruct the prince’s view.

The Kikuchi clan’s fortunes declined gradually after the Southern Court was defeated in the late fourteenth century. They then directed their efforts toward supporting local culture and providing education for samurai and townspeople. This tradition survived even after the Kikuchi were vanquished by rival warlords in the early 1500s. Statues of Kikuchi heroes dot the streets of the modern-day city of Kikuchi, and a shrine dedicated to these historic figures stands on the hilltop site of what was once the clan’s castle.


Dramatic scenery

In the eighteenth century, Kikuchi became famous for the dramatic scenery of its mountainous northeast. Once an inhospitable wilderness used as a training ground by ascetics who would retreat into the mountains in pursuit of spiritual discipline, the scenic beauty of the Kikuchi Gorge in the uppermost reaches of the Kikuchi River was first described in a 1772 travelogue. Its landscape includes waterfalls and several types of native woods that nurture a great diversity of plant and animal life. Today, the gorge is a popular hiking destination with a modern visitor center providing informative exhibits on the natural environment of Kikuchi.

菊池市概覽


菊池地區位於熊本縣北部廣闊肥沃的平原地帶。菊池川發源自平原東北部的山脈,穿過這片平原,兩千多年來一直灌溉著兩岸的水稻田。如今,農業仍然是這片地區生活和文化的重心。菊池地區大部分文化淵源都可以追溯到菊池一族的統治時代,這個家族在11世紀至16世紀初期控制了九州中部的大部份地區,以城下町(圍繞城郭發展起來的市鎮)「隈府」為據點,也就是今天的菊池市。


菊池一族的崛起

據說菊池家的創始人是出身於肥後國(今熊本縣)的官員藤原則隆。1070年,藤原則隆受太宰府(今福岡市附近,當時的九州行政中心)任命監管一處莊園。這座莊園位於菊池地區,藤原則隆因此搬家到這裡,改姓菊池,並在用他的姓氏命名的菊池川邊建造了一座山館(領主初期居住的小城堡),奠定了隈府城下町和大米貿易的基礎。後來,大米貿易造就了其子孫後代的繁榮,擴大了菊池家的力量。

藤原則隆的後代藉由靈活的外交策略和戰場上的勝利,擴張了家族勢力。他們壟斷了菊池川流域的貿易,從販賣平原地帶的農作物中獲得巨大的財富,並將這片土地發展為全國最富饒的農產區。菊池家的統治在14世紀達到鼎盛期,當時日本因權力鬥爭分裂為南北兩朝,菊池家是南朝的堅定支持者。南朝後醍醐天皇為了強化現有同盟、構築新的聯盟關係,將他年輕的兒子懷良親王派往了往九州,這位親王還曾出現在中國的《明史》裡。


文化遺產

1348年懷良親王抵達隈府,菊池家為迎接親王舉辦了一場名為「松囃子」的新年慶祝活動。這是一種在歌聲、鼓聲和笛聲中翩翩起舞的表演,專供貴族欣賞,這種傳統活動一直延續至今。650多年來,菊池市每年都在市中心的一棵巨大糙葉樹(Aphananthe aspera)前的舞台上,再現迎接親王的表演。據說這棵樹為懷良親王所植,甚至有傳說它是由皇子插在地上的拐杖抽枝發芽長成。每年10月13日松囃子演出期間,舞台和糙葉樹之間的區域禁止觀眾進入,這習俗傳說源於當年為了避免遮擋親王視線而設立。

14世紀晚期,南朝戰敗,菊池家也逐漸衰落。儘管如此,他們仍致力於發展本土文化,為武士和市民階層提供教育。即使在16世紀早期菊池家族完全沒落後,這一傳統仍然被保持下來。現在的菊池市,街道上立有多座菊池家重要人物的雕像,菊池家居城的遺址上還建有專門供奉他們的神社。


壯麗風景

在18世紀時,菊池東北部山區的壯麗景色聲名遠揚。菊池川最上游的菊池溪谷,環境嚴酷,曾是苦行僧的修行地。1772年出版的遊記《肥後國誌》(森本一瑞)首次向世人描繪了菊池溪谷的美景。這裡的瀑布和原始森林孕育了豐富的動、植物種類。如今,菊池溪谷已成為受歡迎的健行旅遊景點,設有現代化的遊客中心,為遊客提供有關菊池地區的自然環境資訊。

菊池市概览


菊池地区位于熊本县北部广袤肥沃的平原地带。2000多年来,发源自平原东北部山脉的菊池川流经平原,一直为两岸的水稻田提供着优质的灌溉水源。今天,农业仍然是当地生活和文化的重要支柱。菊池地区的大部分文化渊源都可以追溯至菊池家族统治时代,这个家族在11世纪至16世纪早期控制了九州中部的大部分地区,并把大本营驻扎在城下町(围绕城郭发展起来的市镇)“隈府”,即今天的菊池市。


菊池家族的崛起

据说菊池家族的创始人是出身于肥后国(今熊本县)的官员藤原则隆。1070年,藤原则隆受太宰府(今福冈市附近,当时的九州行政中心)委派监管一处位于今菊池地区的庄园。藤原则隆因此迁居此地,改姓菊池,并在用他姓氏命名的菊池河畔建造了一座山馆(领主初期居住的小城堡),奠定了隈府城下町和大米贸易的基础。之后,大米贸易造就了其子孙后代的繁荣,扩大了菊池家族的力量。

藤原则隆的后代通过灵活巧妙的外交策略和战场上的胜利,扩张了家族势力。他们垄断了菊池川流域的贸易,通过贩卖平原地带的农作物聚敛了巨大的财富,并将此地发展为全国最富饶的农产区。菊池家族的统治在14世纪迎来了鼎盛期,当时日本因权力斗争分裂为南北二朝,菊池家族支持南朝。南朝后醍醐天皇为了强化现有同盟、构筑新的联盟关系,把他年轻的儿子怀良亲王派往九州,这位亲王还曾出现在中国《明史》中。


文化遗产

1348年怀良亲王抵达隈府,菊池家族为迎接亲王举办了一场名为“松杂子”的新年庆祝活动。松杂子是一种伴随着歌声、鼓声和笛声翩翩起舞的表演,专供贵族观赏,这一传统一直延续到了今天。650多年来,菊池市每年都要在市中心的一棵巨大糙叶树(Aphananthe aspera)前的舞台上,重现招待亲王的表演。据说这棵树为怀良亲王所植,也有传说是他插在地上的拐杖抽枝发芽长成。10月13日松杂子演出期间,舞台和糙叶树之间的区域禁止观众进入,这是当年为了避免遮挡亲王视线而形成的习俗。

14世纪晚期,南朝战败,菊池家族也走向衰落。尽管如此,他们仍致力于发展本土文化,为武士和市民阶层提供教育。即使在16世纪早期菊池家族完全没落后,这一传统依然被坚持了下来。现在菊池市街道上仍竖立着多座菊池家族的重要人物雕像,菊池家族居城遗址上还建有供奉他们的神社。


壮丽风景

18世纪,菊池东北部山区的壮丽景色声名远扬。菊池川最上游的菊池溪谷自然环境严酷,曾经是苦行僧的修行地。1772年出版的游记《肥后国志》(森本一瑞著)首次向世人描述了菊池溪谷的美景。这里的瀑布和原始森林孕育了丰富的动植物种类。今天,菊池溪谷已经成为热门的徒步旅行目的地,里面设有现代化的游客中心,向来访者提供有关菊池地区的自然环境信息。

기쿠치시에 대하여


기쿠치 지역은 구마모토현 북부의 비옥한 평야에 펼쳐져 있다. 기쿠치가와 강은 평야 지역의 북동쪽에 위치한 산들로부터 흘러나오며, 그 물은 2천여 년 동안 이 땅에서 벼농사를 번영시켰다. 농업은 이 지역의 생활과 문화의 중심이다. 이 중 많은 문화는 11세기부터 16세기 초엽까지 규슈 중앙 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던 기쿠치 일족의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기쿠치 일족의 본거지는 현재의 기쿠치시인 성하 마을(봉건제 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시가지) 와이후였다.


기쿠치 일족의 융성

기쿠치 씨의 기원은 구게(조정에 봉직하던 귀족이나 고위 관리)로 봉직했던 관리인 후지와라노 노리타카로 보고 있다. 규슈 행정의 중심이었던, 현재의 후쿠오카 가까이에 위치한 다자이후는 현재 기쿠치 지방인 지역에 장원(큰 사원이나 신사, 귀족이 자신들의 재력으로 새롭게 개간한 땅)을 갖고 있었는데, 노리타카는 그 장원을 다스리기 위해 1070년에 이 땅으로 향했다. 노리타카는 자신의 성씨를 기쿠치라고 하고 기쿠치가와 강 가까이에 저택을 지어 성하 마을 와이후의 기초를 쌓았다. 쌀 교역으로 자손이 번영하여 기쿠치 씨의 지배를 확대했다.


노리타카의 자손은 능란한 외교술과 전장에서의 활약으로 일족의 세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기쿠치가와 강 유역의 교역을 독점하고, 평야 지역의 농산물을 판매함으로써 재원을 확보하여 일본에서 손꼽히는 농경지로 발전시켰다. 기쿠치 일족의 번영이 정점에 달한 때는 북조와 남조의 두 왕조가 권력을 두고 다툰 14세기였다. 기쿠치 일족은 남조를 지지했고, 남조의 천황은 기존 동맹관계의 강화와 새로운 동맹관계의 구축을 위해 젊은 아들 가네요시 친왕을 규슈로 보내주었다.


문화 유산

1348년, 가네요시 친왕이 와이후에 도착하자 기쿠치 일족은 황족에 걸맞은 접대를 했다. 마쓰바야시라고 하는 신년 축하 행사는 와이후를 찾은 황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열린, 노래와 북, 피리 연주에 맞추어 춤추는 예능으로서 현재도 이어지는 전통 행사가 되었다. 기쿠치시의 중심부에 있는 푸조나무 거목 앞에 설치된 무대에서는 650년도 더 전부터 황자가 본 상연 목록을 매년 재현하고 있다. 이 나무는 가네요시 친왕이 심었다고도 하고 땅에 꽂은 지팡이에서 돋아났다고도 한다. 10월 13일에 열리는 마쓰바야시는 무대와 푸조나무 사이에 관객이 들어서는 것을 금지하여 황자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기쿠치의 마쓰바야시는 1998년에 일본 중요무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4세기 말에 남조가 멸망하자 기쿠치 일족은 차츰 쇠퇴한다. 그러한 가운데 기쿠치 일족은 지역 문화 발전에 힘을 쏟아 무사와 조닌(도시에 사는 상인과 장인) 교육에도 주목했다. 1500년대 전반에 기쿠치 씨가 다른 무장에게 패배한 뒤에도 그 유지는 계승되었다. 현재의 기쿠치시에는 기쿠치 씨의 영웅 동상이 곳곳에 있으며, 일족이 살던 성터의 돈대에는 그 위인을 모시는 신사가 세워져 있다.


매력적인 경치

18세기 이후 기쿠치는 동북쪽 산간 지역의 매력적인 경치로 유명해졌다. 기쿠치가와 강 최상류의 기쿠치 계곡은 일찍이 슈겐자(산악 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슈겐도를 실천하는 사람)가 수행하던 장소로서 자연이 험한 계곡이며, 1772년의 기행문에 처음으로 명승지로서 소개된 곳이다. 폭포와 몇 종류의 원시림이 있어 다양한 동식물을 길러내고 있다. 현재 기쿠치 계곡은 인기 있는 하이킹 명소이며, 기쿠치의 자연 환경에 관한 정보를 전시한 현대적인 방문자 센터도 있다.

菊池市の概要


熊本県北部の肥沃な平野に広がる菊池地域。菊池川は平野部の北東に位置する山々から流れ、その水は二千年もの間、この地で米作りを繁栄させた。農業はこの地域の生活と文化の中心である。この文化の多くは、11世紀から16世紀初頭まで九州中央部の大部分を支配していた菊池一族の時代にまでさかのぼることができる。菊池一族の本拠地は、現在の菊池市となる城下町・隈府であった。


菊池一族の興隆


菊池氏の起源は、公家に仕えていた役人の藤原則隆とされている。九州の行政の中心であった、現在の福岡の近くに位置する大宰府は現在の菊池地方である場所に荘園をもっており、則隆はその荘園を治めるため、1070年にこの地におもむいた。則隆は菊池姓を名乗り、菊池川に屋敷を構え、城下町・隈府の基礎を築いた。米の交易によってその子孫が繁栄し、菊池氏の支配を拡大した。

則隆の子孫は、巧みな外交術と戦場での活躍によって、一族の勢力を拡大した。菊池川流域の交易を独占し、平野部の農産物を販売することで財源を確保し、全国屈指の農地として発展させた。菊池一族の繁栄が頂点に達したのは二つの王朝、北朝と南朝が権力を争った14世紀のこと。菊池一族は南朝を支持し、南朝の天皇は既存の同盟関係の強化と新たな同盟関係の構築のために若き息子・懐良親王を九州に送り込んだ。


文化のレガシー

1348年、懐良親王が隈府に到着すると、菊池一族は皇族にふさわしいおもてなしを披露した。松囃子(まつばやし)と呼ばれる新年の祝賀行事は、歌や太鼓、笛に合わせて踊る、貴族が鑑賞する芸能で、現在も続く伝統行事となった。菊池市の中心部にあるムクの巨木の前に設けられた舞台では、650年以上前から、皇子が見た演目の再現が毎年行われている。この木は、懐良親王が植えたとも、地面に刺した杖から生えたとも言われている。10月13日の松囃子では、舞台とムクの木の間に観客が立ち入ることは禁止されており、皇子の視界を遮らないよう配慮されている。

14世紀末に南朝が滅亡すると、菊池一族は次第に衰退していく。そのような中、一族は地域の文化発展に力を注ぎ、武士や町人への教育にも注目した。1500年代前半に菊池氏が他の武将に敗れた後も、その遺志は受け継がれている。現在の菊池市には、菊池氏の英雄の銅像が点在し、一族の居城跡の高台にはその偉人を祀る神社が建っている。


魅力的な景観

18世紀以降、菊池はその東北の山間部のドラマチックな景観で有名になった。菊池川最上流の菊池渓谷は、かつて修験者の修行の場であった厳しい自然の中で、1772年の紀行文に初めて景勝地として紹介された場所である。滝や数種類の原生林があり、多様な動植物を育んでいる。現在、渓谷は人気のハイキングスポットであり、菊池の自然環境に関する情報を展示した近代的なビジターセンター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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