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Kofukuji Temple

  • Nara
Topic(s):
Shrines/Temples/Churches
Medium/Media of Use:
Web Page
Text Length:
≤250 Words
FY Prepared:
2019
Associated Tourism Board:
kotonaranobunkazaitagengokaisetsuseibisuishinkyogikai
Associated Address:
48 Noboriojicho, Nara-shi , Nara

興福寺


1,300年以上にわたる歴史を持つ興福寺は、日本でも大変古く、そして最も有名な寺院のひとつである。「南都七大寺」として知られる奈良の大きな寺院の1つにも数えられている(「南都」は、「北都」すなわち京都と対比して南に位置する奈良を意味する言葉)。


その歴史は669年にまで遡り、この年、鏡王女(683年没)が夫の藤原鎌足(614~669年)の病気平癒を祈願して、現在の京都市山科に山階寺を創建したといわれている。この寺は673年に奈良の厩坂に移されて厩坂寺と改称され、さらに710年の平城京(現在の奈良市)が築かれた際に現在の場所に移された。鎌足の息子で優れた政治家であった藤原不比等(659~720年)の支援を受けたこの寺は、『維摩経』の一節にちなんで「福を生み出す寺」を意味する興福寺と名前を変えた。


8世紀前半、興福寺は法相宗の大本山として台頭した。「すべての現象は心が生み出したものであり、経験したように見えるだけである」という教えで知られる法相宗は、7世紀に中国の僧侶である玄奘三蔵によって東アジアにもたらされ、735年に玄昉(746年没)によって興福寺に伝えられた。


奈良時代(710~794年)から平安時代(794~1180年)にかけて、皇室と有力氏族であった藤原氏の支援を受けた興福寺は急速に拡大し、近隣にあって、藤原氏の家門を守る神である春日大社とも徐々に融合していった。さらに鎌倉時代(1185~1333年)から室町時代(1336~1573年)にかけては、この地域の有力な政治勢力として大和国(現在の奈良県)の統治を委任されるまでになった。


15世紀になると、政治的・経済的に衰退期を迎え、1717年には大きな火災に見舞われ、伽藍の西半分が焼失した。明治時代(1868~1912年)初期には中央政府の神仏分離令に由来する仏教排斥運動の標的となり、春日大社から強制的に切り離され、最終的には僧侶たちは寺から去り、無住となった。その後、宗教施設として再興する許可を受け、現在は再び、法相宗の本山としての機能を果たしている。

興福寺


興福寺擁有長達1,300多年的歷史,在日本也是非常古老,且最為知名的寺院之一,此處還是以「南都七大寺」聞名的奈良大型寺院之一(「南都」一詞意指與京都對比,位於南方的奈良)。


其歷史可以上溯至西元669年,這一年,鏡王女(生年不詳-西元683)為了祈求丈夫藤原鎌足(西元614-669)康復,在現在的京都市山科興建了山階寺。這座寺院於673年遷至奈良的廄坂後改稱廄坂寺,並於710年修建平城京(現在的奈良市)時遷至現址。藤原鎌足的兒子藤原不比等(西元659-720),也是一位優秀的政治家,這座寺院接受了他的支援,並將名稱更改為興福寺,寓意出自《維摩詰經》一節中的「孕育福德之寺」。


在8世紀前期,興福寺興起成為法相宗的大本山(在宗派中的地位僅次於總本山,負責統管同宗派寺院)。法相宗的教義主張「所有現象均為心識所變,僅是似曾相識」,以此廣為人知,且由後來成為《西遊記》角色原型的唐朝知名僧侶玄奘三藏加以廣傳。玄昉(生年不詳-西元746)於735年將之傳入了興福寺。


從奈良時代(西元710-794)起至平安時代(西元794-1185)間,興福寺接受皇室與勢力雄厚的世家大族藤原氏的支援快速擴張,並和位於鄰近處,身為藤原氏氏神(同一地區居民共同信仰的守護神)的春日大社逐漸融合。此外,從鎌倉時代(西元1185-1333)起至室町時代(西元1336-1573)間,甚至以該地區雄厚的政治勢力之姿,接受委任統治大和國(現在的奈良縣,「國」為日本舊行政區劃,不同於「國家」)。


15世紀後迎來了政治與經濟的衰退期,1717年遭遇嚴重的火災,伽藍的西半部遭到燒毀。明治時代(西元1868-1912)初期,因中央政府頒布《神佛分離令》導致排斥佛教運動,本寺成為目標,被強制從春日大社分離而出,最後僧侶們紛紛離寺而去,此地成為無住持的寺院。其後,以宗教設施的身分獲得復興許可,現在則再次發揮身為法相宗大本山的功能。

兴福寺


兴福寺的历史长达1,300多年,是日本最古老、最有名的寺院之一,它也是以“南都七大寺”闻名的奈良大型寺院之一(“南都”一词意指与京都相比,位于南方的奈良)。


兴福寺的历史可以追溯至669年,这一年,镜王女(生年不详-683)为了祈求丈夫藤原镰足(614-669)康复,在现在的京都市山科兴建了山阶寺。这座寺院于673年迁至奈良的厩坂后改称厩坂寺,并于710年修建平城京(现在的奈良市)时迁至现址。寺院接受了藤原镰足的儿子、优秀政治家藤原不比等(659-720)的支援,并改名为兴福寺,寓意出自《维摩诘经》一节中的“孕育福德之寺”。


在8世纪前期,兴福寺作为法相宗的大本山(在宗派中的地位仅次于总本山,负责统管同宗派寺院)得以兴盛。法相宗的教义主张“世间万象皆为心识所变,仅是似曾相识”,由后来成为《西游记》角色原型的唐朝高僧玄奘三藏加以传播。玄昉(生年不详-746)于735年将之传入了兴福寺。


奈良时代(710-794)到平安时代(794-1185)间,兴福寺接受皇室与望族藤原氏的支援而快速扩张,并与邻近的春日大社(供奉着藤原氏的土地神)逐渐融合。在镰仓时代(1185-1333)到室町时代(1336-1573)间,兴福寺甚至作为该地区强大的政治势力而被委任统治大和国(现在的奈良县;“国”为日本旧行政区划,不同于“国家”)。


进入15世纪后,兴福寺在政治与经济方面都开始衰退。1717年,兴福寺遭遇严重火灾,伽蓝的西半部被烧毁,在明治时代(1868-1912)初期,则成为中央政府颁布《神佛分离令》所导致的排斥佛教运动的目标,被强制从春日大社分离而出,最后僧侣们纷纷离去,变成了无住持的寺院。其后,兴福寺终于作为宗教设施获得复兴许可,现在则再次发挥着其作为法相宗大本山的功能。

고후쿠지 절(興福寺, 흥복사)


1,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고후쿠지 절은 일본에서도 매우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사원 중 하나입니다. ‘난토 7대 절’로 알려진 나라의 대규모 사원 중 하나로도 꼽힙니다[‘난토(南都: 남쪽의 도읍)’란 호쿠토(北都: 북쪽의 도읍) 즉, 교토와 대비하여 남쪽에 위치한 나라를 가리키는 말].


그 역사는 66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해에 가가미노 오오키미(683년 사망)가 부군인 후지와라노 가마타리(614~669년)의 병이 쾌유되기를 기원하며 현재의 교토시 야마시나에 야마시나데라 절을 창건했다고 합니다. 이 절은 673년에 나라의 우마야사카로 옮겨져 우마야사카데라 절로 개칭되었다가, 이후 710년에 헤이조쿄(현재의 나라시)가 조성되었을 때 현재의 장소로 이전되었습니다. 가마타리의 아들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던 후지와라노 후히토(659~720년)의 지원을 받은 이 절은 『유마경』의 한 구절을 따서 ‘복을 낳는 절’을 뜻하는 고후쿠지 절(興福寺)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8세기 전반에 고후쿠지 절은 법상종의 대본산으로 부상했습니다. ‘모든 현상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며 경험한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가르침으로 알려진 법상종은 7세기에 중국의 승려인 현장삼장에 의해 동아시아로 퍼져 나갔고, 735년 승려 겐보(746년 사망)에 의해 고후쿠지 절에도 전해졌습니다.


나라 시대(710~794년)부터 헤이안 시대(794~1180년)에 걸쳐 황실과 유력 씨족이었던 후지와라 가문의 지원을 받은 고후쿠지 절은 급속히 확장되어 인근의 후지와라 가문의 조상신을 모신 가스가타이샤 신사와도 서서히 융합되었습니다. 나아가 가마쿠라 시대(1185~1333년)부터 무로마치 시대(1336~1573년)에 걸쳐서는 이 지역의 유력한 정치 세력으로서 야마토국(현재의 나라현)의 통치를 위임받기까지 했습니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1717년에 큰 화재를 겪으며 가람의 서쪽 절반이 소실되었습니다. 메이지 시대(1868~1912년) 초기에는 중앙 정부의 신불분리령에서 유래한 불교 배척 운동의 표적이 되어 가스가타이샤 신사에서 강제로 분리되었고, 결국 승려들이 절을 떠나 주지가 없는 사찰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종교 시설로서 재건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현재는 다시 법상종 본산으로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Kofukuji Temple


With a history of more than 1,300 years, Kofukuji is one of Japan’s oldest and most prominent Buddhist temples.


It was one of the Seven Great Temples of Nara, which was Japan’s capital during the Nara period (710–794). Its history begins in 669, when Kagami no Okimi (d. 683) founded a Buddhist chapel, Yamashina Temple, in modern-day Kyoto Prefecture to pray for her sick husband Fujiwara no Kamatari (614–669). The temple was moved to Umayasaka in Nara Prefecture in 673 (when it was renamed Umayasaka Temple) and then to its present location after the capital was established here in 710. Backed by founding patron Fujiwara no Fuhito (659–720), the temple was renamed Kofukuji, the Temple that Generates Blessings, a reference to the Vimalakirti Sutra.


Kofukuji was established as a leading center in the Hosso (Ch. Faxiang) philosophical tradition of Buddhism. It was spread by seventh-century Chinese monks and holds that all phenomena are representations created by the mind that appears to experience them. The monk Genbo (d. 746) introduced these teachings to Kofukuji, where they have been transmitted and practiced ever since.


The temple expanded rapidly under the patronage of the court and the Fujiwara clan, and merged with nearby Kasuga Taisha Shrine, the ancestral Shinto shrine of the Fujiwara clan. The temple became the dominant political force in the region. In the Kamakura (1185–1333) and Muromachi (1336–1573) periods, it had a shogunal mandate to oversee Yamato Province.


In the 15th century, Kofukuji entered a period of decline and in 1717 suffered a catastrophic fire that destroyed most of the complex. In the early Meiji era (1868–1912), Kofukuji was targeted by the anti-Buddhist policies of the central government, forcibly separated from Kasuga Taisha Shrine, and ultimately abandoned by its monks. Eventually Kofukuji obtained permission to reestablish itself as a religious institution, and flourishes today as the head temple of the Hosso school of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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