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오시(御師) 주택(옛 도가와 가문 주택)

  • 야마나시
장르:
마을·거리
매체 이용 구분:
팸플릿
단어 수:
501-750
작성 연도:
2019
지역 협의회명:
FUJIGOKO

The Former Oshi Lodging House of the Togawa Family


At the height of the Fujiko faith’s popularity in the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ies, thousands of pilgrims came every summer to make the ritual climb to the summit of Mt. Fuji. Most chapters of the religion sent a small group each year. The first port of call was a pilgrims’ inn kept by an oshi, one of the Shinto priests who provided the pilgrims with spiritual guidance as well as supplies and equipment for the climb.


At one time, as many as 86 oshi inns could be found in Fujiyoshida, but only a handful still offer accommodation. Instead of joining them, the Togawa family opted to convert the inn run by their ancestors into a living museum, where visitors can see exhibits detailing how Fujiko pilgrims once prepared for their climb.


Purification and Preparation


Oshi inns were built on long, narrow plots of land that maximized the number of inns that could fit side by side along the main street. In front of each inn was a garden with stone monuments and a channel of water drawn from mountain streams for purification. The inns had several entrances, the grandest of which were reserved for high-ranking officials, visitors of great spiritual attainment, and the oshi himself.


Beyond the entrance, each inn was laid out differently. The Togawa Inn, for example, was divided into two sections: the omoya or “main building,” which housed the kitchen and dining areas, and the urazashiki or “rear rooms” added later at the back of the property. Lodging 20 to 30 people every day required a great deal of tableware, bedding, and other sundries, and the Fujiko tradition met this need in a unique way. Chapters donated necessary supplies to “their” inn, each striving to outdo the others in generosity to show their piety. Because visits were planned in advance, the staff was able to rotate through the inn’s various sets of plates and utensils to ensure that each group was served on the tableware it had contributed. To maintain these permanent ties, oshi would spend the off-season traveling to Edo and elsewhere to visit Fujiko chapters at their homes.


The spiritual heart of the Togawa Inn lay in the rear rooms. In the room called the goshinzen, meaning “before the divine,” the oshi would preach to the pilgrims about their faith and the ascetic practices to be carried out during their climb. He also prayed to Mt. Fuji on the pilgrims’ behalf while the leader of the pilgrims, known as the sendatsu, led the others in chants expressing the tenets of the faith. Recordings of those ceremonies are played at the Togawa Inn to re-create the mystical atmosphere that prevailed during those times.


The rear rooms were also where the pilgrims slept, enjoying one last night of comfort before the rigors of the ascent. Relative comfort, at least: During peak summer climbing season, there were so many guests that some had to sleep out in the corridors.


Artifacts from the Past


The main part of the Togawa family inn was built in 1768, while the rear rooms were added a century later, around 1860. Apart from necessary maintenance and restoration, the building is kept just as it was when it still served pilgrims. The inn houses a number of valuable artifacts, including a statue of Jikigyo Miroku (1671–1733), a revered figure whose teachings brought the Fujiko faith to the masses. There is also a rare example of a gyoi, the white garment worn by pilgrims on the climb. The same article of clothing was used to dress the deceased, reflecting the faith’s view of Mt. Fuji as a spiritual realm beyond the world of the living. Pilgrims had their gyoi stamped at shrines and checkpoints along the ascent, so that each garment became a record of their devotion.


The Osano House


Visitors seeking to learn more about oshi inns should also visit the exact reproduction of an inn once run by the Osano family that has been built on the grounds of the Fujisan Museum. Comparing this with the Togawa Inn reveals how each oshi lineage maintained its own traditions within the broader outlines of the faith.


御師住宅旧外川家住宅


18世紀と19世紀の富士講信仰の最盛期には、毎夏何千人という巡礼者が儀式として富士山への登頂 (登拝) に訪れており、富士講の講の大半が、小規模のグループを毎年送り込んでいました。最初の立ち寄り先は、巡礼者に信仰の指導や、登山に必要な物と装備を提供した神官、御師が運営していた富士講信者のための宿坊 (御師住宅)でした。


ある時期には86軒もの御師住宅が富士吉田にありましたが、現在宿泊できるものはほんのわずかです。外川家は、先祖が運営していた御師住宅を宿泊に供する代わりに、かつて登拝する富士講の巡礼者がどのように旅支度をしていたのかが詳しくわかる展示物を展示する生きた博物館にすることにしました。


禊と旅支度


御師住宅は、最大限の数の御師住宅が隣り合うことができるよう、間口が狭く細長い目抜き通り沿いの敷地に建てられており、それぞれの御師住宅の前には石碑と、禊に使うために富士山の水が引かれた水路がありました。また、御師住宅にはいくつかの入り口があり、最も広いものは、位の高い役人、信仰に関する偉大な業績のある来客や、御師専用となっていました。


入り口の奥は、宿によってそのレイアウトが異なっていました。たとえば、外川御師住宅は、台所や食堂があった主屋と、後に敷地の裏に増築された裏座敷の2つのセクションに分かれていました。毎日20~30人を泊めるには非常に多くの食器、寝具やその他の雑貨を要しましたが、講は、所定の御師住宅に必要な物品を寄付しており、それぞれが他の講よりももっと多くの寄付を行って信心深さを示そうとするという、富士講独自の伝統によりこの需要を満たしていました。登拝は予め計画されていたため、必ず各グループにはそのグループが提供した食器類で食事を提供できるようにスタッフは家中の様々な食器や様々な用具をローテーションして使っていました。こうした長期的な関係を保つために、御師はオフシーズンになると江戸などに出向き、富士講信者の家を訪問していました。


裏座敷は外川御師住宅の信仰の中心となっており、ご神前の間という部屋では、御師が巡礼者に信仰と登拝する際に行うべき事について説きました。また御師は、巡礼者に代わって富士山に対して祈りを捧げ、またその間先達と呼ばれていた巡礼者の代表は率先してその他の巡礼者と一緒に富士講の教義を表現した念仏を唱えました。これらの儀式の録音は旧外川家住宅で再生され、この時代にはよくみられた神秘的な雰囲気を再現しています。


巡礼者は裏座敷に宿泊し、厳しい登拝に出発する前の最後の快適な夜を楽しみました。ただ、快適と言っても、夏の登拝の最盛期には、非常に多くの宿泊客が滞在したため、その一部には廊下で寝なければならない者もおり、実際には「少なくとも比較的快適だった」というべきでしょう。



過去を伝える遺物


外川家の御師住宅の主屋は1768年に建築され、裏座敷は、その約1世紀後の1860年ごろに増築されました。この住宅は、必要な保守や修復以外には、巡礼者にサービスを提供していた時代どおりに維持されており、ここには、その教えが富士講信仰を一般に広めたことにより崇拝されている食行身禄 (1671-1733) の像をはじめとする多くの貴重な遺物が収蔵されています。また、巡礼者が登拝時にまとっていた稀少な行衣も展示されています。富士山を現世の先にある霊的な領域だと考えていた富士講では、同じ行衣を亡骸を包むのにも使っていました。信者は自分の登拝を記録できるよう山頂への道すがらの神社や参拝ポイントで各自の行衣に御朱印を押してもらっていました。


御師住宅小佐野家住宅

御師住宅についてもっと知りたい方には、小佐野家がかつて運営していたものをふじさんミュージアムの敷地内にそのまま復原した御師住宅にも行ってみることをお勧めします。この住宅と旧外川家住宅を比較すると、富士講信仰という広い枠組みの中、それぞれの御師一族がいかにして独自の伝統を維持してきたのかがわかります。


御師住宅(舊外川家住宅)


18、19世紀是「富士講」信仰最為興盛的時期,每年夏天有數以千計的朝聖者為參加儀式(登拜)而攀登富士山頂。絕大多數的「富士講」分會每年都會派一支小分隊參加登拜儀式。首先,他們會先在由「御師」運營的宿坊(專為神社齋主作祈禱的「御師」的住所)留宿一晚。宿坊專為「富士講」信徒而設,御師不僅教導朝聖者參拜的禮儀,還提供登山必需的物資和裝備。

全盛時期,富士吉田一帶的御師住宅曾一度多達86家,現在僅有幾家還有提供住宿。外川家將代代經營傳承至今的御師住宅改建為博物館,不再提供住宿,而是致力於向「富士講」的朝聖者詳盡地展示過去在參加登拜時如何做足登山準備。


祓禊和登山準備

御師住宅沿街道兩側比鄰而立,每戶的門面都相當窄小,且縱深狹長,如此一來就可以在街道兩旁建造更多的住宅。每家御師住宅的前院都有石碑和為了祓禊(ㄈㄨˊㄒㄧˋ,潔淨身體以除不祥的一種祭祀)而引入富士山泉的水渠。御師住宅有多扇大門,最寬闊的大門是專為社經地位崇高、對「富士講」信仰有重大貢獻的來賓以及御師專用。

不同的住宅,其內部設計差異甚大。比如,外川御師住宅就分為兩大區域,一個是設有廚房以及用餐區的主屋,另一個是後來在場地後方擴建的裡屋。「富士講」的分會為了表示虔誠,會向特定的御師住宅捐贈必需品,而且每個分會為超過其他分會都會努力捐贈。由於每天都有20至30人住宿,因此需要很多餐具、寢具及其他日常用品,這項「富士講」自古以來的傳統剛好滿足這些需求。此外,由於登拜都會提前規劃,因而御師住宅的員工會輪換使用住宅中的各項餐具和用品,以便每個分會的人都可以使用該分會捐贈的餐具。為了長期保持這種關係,淡季時,御師會前往江戶等地,到「富士講」信徒的家中拜訪。

在外川御師住宅中,裡屋是最神聖的地方。在一間名叫「御神前之間」的房間,御師會教導朝聖者們參拜禮儀和登拜時的注意事項。御師代替朝聖者向富士山祈禱,在此期間,名叫「先達」的朝聖者代表會率領其他朝聖者一起朗誦「富士講」教義的經文。來到舊外川家住宅仍可以聽到儀式過程中的錄音,營造唯有現代才能體驗到的神秘氛圍。

朝聖者會被安排住在裡屋,在迎接登拜的艱辛之旅前可盡情享受夜晚的美好。在夏天的登拜旺季,由於住宿的遊客相當多,有些人只能睡在走廊上,因而也算不上真正的「舒適」,只是相比登拜行程而言,「還算舒適」而已。


承載著歷史的文物

外川家御師住宅的主屋建於1768年,已被日本政府指定為重要文化財,而裡屋是大約於100年後的1860年左右擴建。關於這家住宅,除進行必要的維護和修復以外,基本保留了招待朝聖者時期的原貌。這裡收藏了包括食行身祿(1671-1733)的雕像等眾多珍貴文物(食行身祿通過傳播其教義使「富士講」信仰在一般民眾中得到廣泛傳播而備受崇拜),還展示了朝聖者登拜時所穿的白色「行衣」。由於「富士講」認為富士山是現世彼岸的靈界,因此早期也穿上了用於包裹大體的「行衣」。信徒為了記錄登拜次數,在通往山頂沿途的神社或參拜點,會請人為自己的行衣蓋上御朱印(日本的神社和寺廟授予參拜者的一種參拜證明)。


御師住宅(小佐野家住宅)

如想進一步瞭解御師住宅,推薦前去參觀過去由小佐野家運營的御師住宅(在富士山博物館內,依原貌修復)。對比小佐野家住宅與舊外川家住宅,能夠清楚瞭解到在「富士講」信仰的宏偉架構中,不同的御師門派是如何維繫並發揚自家獨特的傳統。

御师住宅(旧外川家住宅)


18世纪和19世纪是“富士讲”信仰的鼎盛期,每年夏天有数以千计的朝圣者参加登顶富士山的仪式(登拜)。绝大多数“富士讲”分会每年都会派一支小分队参加登拜仪式。首先,他们要抵达“御师”经营的宿坊(专为神社斋主作祈祷的“御师”的住所)后留宿一晚。宿坊专为“富士讲”信徒而设,御师不仅给与朝圣者信仰指导,还提供登山必需的物资和装备。

鼎盛期,富士吉田一带的御师住宅曾一度多达86家,现在仅有几家还能住宿。外川家将世代经营传承至今的御师住宅改建为一座博物馆,不再提供住宿,而是致力于向人们详尽展示过去“富士讲”朝圣者参加登拜时如何做登山准备。


祓禊和登山准备

御师住宅沿街道两侧并排而立,每一家都门面窄小,且纵深狭长,这样可以在街道两边开设尽可能多的御师住宅。每家御师住宅的前院,都有石碑和为了祓禊(洁净身体去除邪祟)而引入的富士山泉的水渠。御师住宅有多扇大门,最宽阔的大门供达官贵人、对“富士讲”信仰有重大贡献的客人以及御师专用。

不同的住宅,其内部布局差异很大。比如,外川御师住宅就分为两大区域,一个是带厨房和用餐区的主屋,另一个是后来在场地后方扩建的里屋。每天有20至30人住宿,需要很多餐具、寝具及其它日用品,“富士讲”以其独特的传统方式满足这些需求。“富士讲”的分会会向特定的御师住宅捐赠必需品,而且为了表示虔诚,每个分会都会努力捐赠以求超过其它分会。此外,由于登拜都会提前规划,因而御师住宅的员工会将住宅中的各种餐具和用具依次轮换使用,以便每个分会的人都可以使用该分会捐赠的餐具用餐。为了长期保持这种关系,淡季时,御师会去江户等地,到“富士讲”信徒的家中拜访。

在外川御师住宅中,里屋是最神圣的地方。在一间名叫“御神前之间”的房间,御师会向朝圣者们讲解信仰和登拜时的应做事项。御师代替朝圣者向富士山祈祷,在此期间,被叫作“先达”的朝圣者代表会率领其他朝圣者一起诵读体现“富士讲”教义的经文。现在,旧外川家住宅还通过播放这些仪式的录音,再现旧时代特有的神秘氛围。

朝圣者住在里屋,可尽情享受艰辛登拜之旅开始前的最后一个舒适之夜。在夏天的登拜旺季,由于住宿的客人很多,有些人只能睡在走廊上,因而也算不上真正的“舒适”,只是相比登拜而言,“还算舒适”而已。


承载着历史的文物

外川家御师住宅的主屋建于1768年,已被日本政府指定为重要文化财,而里屋是大约于100年后的1860年左右扩建。关于这家住宅,除了进行必要的维护和修复以外,基本上保留了招待朝圣者时期的原貌。这里收藏了包括食行身禄(1671-1733)的雕像等众多珍贵文物(食行身禄通过传播其教义使“富士讲”信仰在一般民众中得到广泛传播而备受崇拜),还展示了朝圣者登拜时所穿的白色“行衣”。“富士讲”认为,富士山是现世彼岸的灵界,同样的“行衣”也用于包裹尸骨。信徒为了纪念登拜,在通往山顶沿途的神社或参拜点,都会请人为自己的行衣盖上御朱印(日本的神社和寺庙授予参拜者的一种参拜证明)。


御师住宅(小佐野家住宅)

如想进一步了解御师住宅,推荐前去参观过去由小佐野家经营的御师住宅(在富士山博物馆内,依原样复原)。对比小佐野家住宅与旧外川家住宅,能够清楚了解到,在“富士讲”信仰的宏伟架构中,不同的御师门派是如何维系并发扬自家独特的传统。

오시(御師) 주택(옛 도가와 가문 주택)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후지코 신앙이 전성기를 맞았던 당시에는 매년 여름이 되면 수많은 후지코 단체가 후지산을 등정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이때 각 단체의 인원은 적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수천 명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맨 처음 들른 곳은 후지코 순례자들에게 신앙을 지도하고 등산에 필요한 물건과 장비, 그리고 숙박을 제공했던 신관 오시의 거처(오시 주택)였습니다.


전성기에는 86채의 오시 주택이 후지요시다에 있었지만 현재 숙박할 수 있는 곳은 극히 적습니다. 도가와 가문 주택도 조상 대대로 순례자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오시 주택이었지만, 현재는 후지코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후지산 등정을 앞둔 순례자들이 어떤 준비를 했는지 알려주는 박물관으로 변모했습니다.


목욕재계와 여행 준비


오시 주택은 최대한 많이 서로 담을 맞대고 늘어설 수 있도록 중심가 도로변의 정면 폭이 좁고 안 길이가 긴 가느다란 부지에 지어졌으며 각각의 오시 주택 앞에는 비석과 목욕재계를 위해 후지산의 물을 끌어온 수로가 있었습니다. 또한 오시 주택에는 입구가 여러 개 있었는데, 가장 넓은 것은 지위가 높은 관리와 신앙과 관련해 위대한 업적이 있는 방문객, 그리고 오시들의 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입구 안쪽은 주택에 따라 그 배치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도가와 주택은 부엌과 식당이 있는 안채와 뒤편 부지 안쪽에 증축된 뒤채의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오시 주택에서는 매일 20~30명이 숙박했기 때문에 매우 많은 식기와 침구 등 다양한 물품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물품들은 후지코 단체가 숙박하기로 정한 오시 주택에 기부하는 것으로 충당되었지만, 다른 단체보다 더 많이 기부해 깊은 신앙심을 나타내려는 후지코 특유의 전통으로 이 수요는 충분히 충족되었습니다. 등정 일정이 미리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반드시 그 단체에서 받은 식기류로 식사가 제공되도록 집 안의 다양한 식기와 용구를 계획적으로 꺼내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장기간에 걸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오시는 후지산 등산 계절이 끝나면 에도 등으로 나가 후지코 신자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도가와 가문 주택에서 신앙의 중심지로 여겨졌던 뒤채의 고신젠노마(신 앞의 방)라는 방에서는 오시가 순례자들에게 신앙과 등정할 때 해야할 일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또한 오시는 순례자를 대신해 후지산에 기도를 드렸고 그와 동시에 센다쓰라 불린 순례자의 대표는 다른 순례자를 선도하며 후지코의 교리를 표현한 염불을 외웠습니다. 옛 도가와 가문 주택에서는 이러한 의식을 녹음한 음성을 재생하여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장엄한 의식의 모습을 현재에 전하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뒤채에 숙박하며 험난한 등정을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쾌적한 밤을 보냈습니다. 다만 쾌적이라고 해도 여름 등정 성수기 때는 매우 많은 투숙객이 머물렀기 때문에 일부는 복도에서 자야 하는 등 실제로는 ‘적어도 비교적 쾌적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를 전하는 유물


도가와 가문 오시 주택의 안채는 1768년에 건축되었고 뒤채는 그로부터 약 1세기 후인 1860년경에 증축되었습니다. 이 주택은 필요한 보수와 복원 외에는 순례자들을 돌봤던 시대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후지코 신앙을 대중에게 전파하여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지키교 미로쿠(1671~1733)의 상을 비롯해 수많은 귀중한 유물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순례자들이 등정할 때 걸쳤던 귀중한 웃옷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후지산을 현세 이후에 존재하는 영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후지코 신자들은 같은 웃옷을 시신을 감싸는 데에도 사용했습니다. 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스스로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도중의 신사나 기타 지점에서 웃옷에 고슈인(증명 도장)을 찍으며 나아갔습니다.


오시 주택(오사노 가문 주택)

후지산 뮤지엄 부지 내에는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오시였던 오사노 가문의 주택이 복원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시 주택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면 이곳을 방문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 주택과 옛 도가와 가문 주택을 비교해보면 후지코 신앙이라는 넓은 틀 안에서 각각의 오시 가문이 어떻게 독자적으로 전통을 유지해 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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