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鞆ケ浦 港湾

  • 島根県
ジャンル:
史跡・城跡 地域の特産物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ワード数:
250以下
作成年度:
2019年
地域協議会名:
石見銀山多言語協議会

Tomogaura Port

According to legend, the silver mine at Iwami Ginzan was discovered by the merchant Kamiya Jutei, who in 1527 noticed a mountain peak glittering in the sun when sailing along the coast nearby. Based in the southern city of Hakata (present-day Fukuoka), Kamiya reported his find to the Ouchi family that ruled those lands, and the Ouchi quickly assumed control over this mountain of riches. To transport the silver ore mined at Iwami Ginzan to Hakata and then to the Korean peninsula to be refined, they established a port at Tomogaura, the closest suitable cove, which offered protection from the Sea of Japan’s fierce waves and harsh north winds. The Ouchi cleared a 7.5-kilometer road from the mine to this port, building earthen bridges in the hilly terrain and making the path suitable for transporting the heavy ore. This road was used for some 30 years.


When the Ouchi lost Iwami Ginzan to the rival Mohri family in 1562, Tomogaura was abandoned in favor of another port and the road fell into disuse. Local residents reverted to fishing and agriculture, which still sustain many here today. The only reminders of Tomogaura’s glory years are the protruding rock formations along the shore, which were carved out of the soft stone to function as mooring devices for the Ouchi ships that once transported silver ore from this port.


鞆之浦港


1527年,一位來自南部城市博多(今福岡)、名叫神屋壽貞的商人發現了石見銀山的銀礦。根據傳說,當時他正航行在附近的海岸線,看見一座山峰在陽光下閃閃發光。神屋壽貞隨即將這一發現向當地領主大內家報告,大內家於是迅速控制了這座「財富之山」。為了將石見銀山開採出的銀礦石運送到博多,再轉運到朝鮮半島提煉,大內家在最近且最合適的鞆之浦(鞆,音同「丙」)海灣內建造港口,將日本海洶湧的惡浪和刺骨的北風阻擋在外。同時為了運輸沉重的礦石,還在銀礦(銀山柵內)與港口之間修築了一條長7.5公里的鞆之浦道,並在沿途丘陵地帶架設了土橋。鞆之浦道前後共使用了大約30年。

1562年,大內家失勢,石見銀山的經營權落入敵對的毛利家之手,鞆之浦港被另一處港口取代,鞆之浦道也隨之廢棄。本地居民再度回歸捕魚和農耕生活,至今依然有許多人以此為生。時至今日,曾見證鞆之浦港輝煌的只剩下海岸邊突出的岩體,它們由質地偏軟的岩石切削而成,供當年出入港口運送銀礦石的大內家船隻繫舟泊岸。

鞆之浦港


相传,石见银山的银矿是一位名叫神屋寿贞的商人在1527年发现的。当时,他正沿着附近的海岸线航行,看见一座山峰在阳光下闪闪发光。神屋寿贞主要在南部城市博多(今福冈)做生意,他将这一发现报告给了当地领主大内家族,大内家族迅速控制了这座“财富之山”。为了将石见银山开采出的银矿石运送到博多,再转运到朝鲜半岛提炼,大内家族在最近且最合适的鞆之浦(鞆,音同“丙”)海湾内建造了一个港口,将日本海汹涌的恶浪和刺骨的北风阻挡在外。同时为了运输沉重的矿石,还在银矿(银山栅内)与港口之间修筑了一条长7.5公里的鞆之浦道,并在沿途丘陵地带架设了土桥。鞆之浦道前后共使用了大约30年。

1562年,大内家族失势,石见银山落到敌对的毛利家族之手,鞆之浦港被另一处港口取代,鞆之浦道也随之废弃。本地居民再度回归捕鱼和农耕生活,至今依然有许多人以此为生。现在,曾见证鞆之浦港辉煌的只剩下海岸边突出的岩体,它们由质地偏软的岩石切削而成,供当年出入港口运送银矿石的大内家族船只系舟泊岸。

도모가우라항


이와미 은광은 1527년에 상인인 가미야 주테이가 근처 연안을 항해하던 중 산 정상에 햇빛이 반짝이는 것을 알아채면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규슈의 하카타(현재의 후쿠오카시)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가미야는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오우치 씨족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오우치 씨족은 곧바로 이 “부의 산”을 자신들의 지배 하에 두었습니다. 오우치 씨족은 이와미 은광에서 채굴한 철광석을 하카타와 한반도로 수송하고 제련하기 위해 은광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일본해의 거센 파도와 세찬 북풍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판단한 도모가우라 만에 항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와미 은광에서 항구까지 구릉지를 지나는 흙다리를 건설하는 등 무거운 짐도 충분히 운반할 수 있는 7.5km의 길을 정비했습니다. 그러나 이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은 고작 30여 년에 불과했습니다.


1562년에 오우치 씨족이 적이었던 모리 씨족에게 이와미 은광의 지배권을 빼앗기게 되면서 도모가우라의 항구와 길은 더 이상 은광석의 수송로로 이용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때 주변의 지역민들도 다시 어업이나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이 지역의 중심 산업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도모가우라에는 오우치 씨족이 은 수송선을 계류시키기 위해 해안가의 부드러운 암석층을 깎아 만든 설비가 지금도 남아 있어 전성기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鞆ケ浦道 港湾

石見銀山の銀鉱は、1527年に商人の神谷寿貞が付近の沿岸を航行中に陽の光に輝く山の頂に気付いたことから、発見されたと伝えられています。博多南部の街(現在の福岡)に本拠を構えていた神谷は、この地を支配していた大内氏にその事実を報告しました。大内氏はすぐさま、この“富の山”を支配下に収めました。石見銀山で採掘された鉄鉱石を博多へ運び、さらに朝鮮半島に輸送して精製を行うために、最も近く、適した入り江である鞆ヶ浦に大内氏は港を設け、日本海の荒波や厳しい北風からの防御を図りました。大内氏は、石見銀山からこの港までの間に7.5キロメートルの道を整備し、丘陵地帯を越える土橋を建設し、重い荷物の運搬に適した道をつくりました。しかし、この努力が報われたのは30余年の間にすぎず、1562年に大内氏は敵対する毛利氏に石見銀山を明け渡し、鞆ヶ浦を放棄して別の港へと移ったのでした。現地の住民は、再び漁業や農業に従事するようになり、今でもこの地では多くの人々がこれらの仕事を生業としています。鞆ヶ浦の最盛期を偲ばせる存在として、海岸沿いに突き出た岩石層は、柔らかい石を削って作られたものであり、大内氏の銀船の係留装置として利用され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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