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原城跡 露頭

  • 長崎県
ジャンル:
史跡・城跡 自然
媒体利用区分:
看板
ワード数:
250以下
作成年度:
2019年
地域協議会名:
一般社団法人島原半島観光連盟

Hara Castle Ruins

The story of Hara Castle began around 90,000 years ago with the eruption of Mt. Aso, 150 kilometers to the east in Kumamoto Prefecture. A massive eruption sent a wave of hot gas, ash, and white pumice an incredible distance, creating a ridge that today seems to rise suddenly out of the Ariake Sea. This set the scene for a very different kind of catastrophe in the seventeenth century.

Hara Castle was built in 1604 by the Arima clan, who were led by the Christian lord Arima Harunobu (1567–1612). Although Christianity had only arrived in Japan in 1549, it had quickly spread to the leaders of the region. Their conversion would be their downfall. Christianity was outlawed in Japan in 1614, and after controlling the area for almost 300 years, the Arima clan was removed by the Tokugawa shogunate and replaced by the Matsukura clan in 1616. Shortly thereafter, Hara Castle was abandoned.

This new clan began brutally repressing Christianity while dramatically raising taxes to pay for a brand-new castle to the north. Suffering from famine and overwork, the peasants revolted in 1637. Nearly the entire population of the Shimabara Peninsula rose up in arms in what would come to be known as the Shimabara Rebellion. Joined by masterless samurai and other Christian peasants from the Amakusa Islands and led by the charismatic 16-year old Amakusa Shirō, the peasants fought against the new lords of the region. After several defeats, the nearly 37,000 rebels—including women and children—decided to reestablish Hara Castle and make their final stand.

More than 120,000 shogunate troops from around Kyushu were mobilized to crush the rebellion, but the rebels held out. Eventually, after months of winter and a blockade by Dutch and shogunate ships, the rebels ran out of food and ammunition. A final assault in April 1638 destroyed the castle, and the tens of thousands of rebels inside were executed.

Today, monuments to the rebels, the foundations of the castle, and the white pumice of Mt. Aso are all that remain.


原城遺址


原城的歷史可以追溯到約9萬年前距離島原半島以東約150公里的熊本縣阿蘇山(海拔1592公尺)的爆發。這次大規模的火山爆發將高溫氣體、火山灰和白色浮石噴射到遠方,有明海上從此形成了一座高聳的山丘。17世紀時,這裡又因截然不同的原因上演了一場悲劇。

原城由有馬家於1604年建造,當時該家族的家主是吉利支丹大名(大領主)有馬晴信(1567-1612)。吉利支丹是16世紀至明治時代(1868-1912)期間的日本基督教徒。基督教於1549年才進入日本,但當地一些領袖人物迅速皈依,這也為他們引來了無妄之災。1614年,日本宣布禁止基督教,1616年,德川幕府驅逐了在該地區統治了近300年的有馬家。松倉重政(1574-1630)取而代之成為大名(大領主),另建島原城。因此後實行「一國一城令」,原城被廢棄。

新上任的松倉家為了在北部修建新城郭而大幅提高稅收,同時開始殘酷鎮壓基督教。遭受饑荒且不堪重負的農民在1637年揭竿起義,武裝起義幾乎席捲了整個島原半島,被稱為「島原・天草起義」。在深具領袖魅力的16歲少年天草四郎的領導下,浪人(失去領主的武士)和來自天草群島的吉利支丹農民紛紛加入起義軍,共同反抗新領主。儘管多次兵敗,近3.7萬名起義軍決定重建一度被廢棄的原城,進行最後的抵抗,其中還包括一些婦女和兒童。

來自九州各地的逾12.5萬幕府軍應征前來圍剿,但遭到起義軍頑強抵抗。冬季,在荷蘭和幕府船隻連續數月的聯合封鎖下,起義軍終於彈盡糧絕。1638年4月,幕府軍終於攻下了原城,城內數萬名起義軍被處決。

如今,此地只留下了起義軍紀念碑、城郭的地基,以及來自阿蘇山的白色浮石。


※天草四郎:本名益田四郎時貞,以透過奇跡來傳教而著稱,日本著名電影導演大島渚曾拍攝影片《天草四郎時貞》,使其於後世一舉成名。

原城遗址


原城的历史始于9万年前距此地以东150公里的熊本县阿苏山(1592米)喷发。大规模喷发将高温气体、火山灰和白色浮石喷射到极远处,有明海上从此出现了一座高耸的山丘。到了17世纪,这里又因截然不同的原因发生了一场人间悲剧。

原城由有马家族于1604年建造,当时该家族的家主是吉利支丹——即16世纪至明治时代(1868-1912)的日本基督教徒大名(大领主)有马晴信(1567-1612)。基督教于1549年才进入日本,但很快就在当地一些领袖人物中传播开来。然而,皈依改宗为他们引来了无妄之灾。日本于1614年宣布禁止信仰基督教,1616年,有马家族在统治该地区近300年后被德川幕府驱逐,领主之位由松仓重政(1574-1630)取代。后来,岛原城建成,原城也因“一国一城令”而被废弃。

新上任的松仓家族开始残酷打压基督教,同时为了在北部修建新城郭而大幅提高税收。遭受饥荒且不堪重负的农民在1637年发动了武装起义,几乎整个岛原半岛的居民都参与其中,这就是“岛原・天草起义”。在深具领袖魅力的16岁少年天草四郎的领导下,浪人(失去领主的武士)和来自天草群岛的吉利支丹农民纷纷加入起义军,共同反抗新领主。多次兵败后,包括妇女儿童在内的近3.7万名起义军决定重建一度被废弃的原城,并进行最后的抵抗。

幕府从九州各地调集了逾12.5万名官兵前来镇压叛乱,遭到起义军顽强抵抗。冬季,在荷兰和幕府船只连续几个月的联合封锁下,起义军终于弹尽粮绝。1638年4月,幕府军最终攻下原城,城内数万起义军被处决。

如今,此地只留下了起义军纪念碑、城郭的地基,以及来自阿苏山的白色浮石。


※天草四郎:本名益田四郎时贞,以通过奇迹来传教而著称。日本著名电影导演大岛渚曾拍摄影片《天草四郎时贞》,令他于后世一举成名。

하라 성터(原城跡)


하라 성에 대한 이야기는 약 9만 년 전 150km 동쪽 아소산(1,592m) 분화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대 분화에 의한 고온 가스, 재, 쇄설물이 상당히 멀리까지 비산되어 지금의 아리아케카이에 갑자기 융기한 것처럼 보이는 산등성이 같은 대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곳은 이후 17세기에 전혀 다른 대참사의 무대가 된 곳입니다.


하라 성은 1604년 기독교인 아리마 하루노부(1567년-1612년)를 영주로 하는 아리마 번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이 무렵 기독교는 1549년 일본에 전래된 직후였지만, 이 지역 지도자들에게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그들은 이 개종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파멸하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1614년 기독교가 금교되었고, 300년 가까이 이 땅을 지배하던 아리마씨는 1616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영지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라 성은 폐성되었습니다.


새로 온 영주는 잔혹한 기독교 탄압을 시작했고, 북쪽에 새로운 성을 짓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기근과 중노동에 시달린 농민들은 1637년에 잇키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마바라반도 인구의 대부분이 무장하여 들고 일어선 시마바라・아마쿠사 잇키입니다. 영주를 잃은 무사와 아마쿠사 제도에서 온 기리시탄 농민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16세의 아마쿠사 시로의 지휘 아래 새로운 영주를 상대로 싸웠습니다. 몇 번인가 패배한 후에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3만 7천 명의 반란군은 폐성이 된 하라 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최종 결전지로 삼았습니다.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규슈 각지에서 12만 명이 넘는 막부군이 동원되었지만 반란군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개월의 겨울이 지나고 도쿠가와 막부와 네덜란드 배에 봉쇄되면서 반란군의 식량과 탄약은 다 떨어졌습니다. 1638년 4월의 마지막 공격으로 성은 파괴되었고, 수 천명의 반란군이 처형되었습니다.


오늘날 이곳에는 반란군을 추모하는 위령비, 성의 토대, 아소산의 하얀 속돌만이 남아 있습니다.

原城跡


原城の物語は 150 キロメートル東にある阿蘇山(1,592 m)の噴火があった 約9 万年前にさかのぼる。巨大噴火により熱気波、灰、砕屑物がかなり遠くまで飛散し、現在は有明海の外に突如立ち上がるかのように見える尾根となった。これは 17 世紀に起きた非常に毛色の異なる大惨事の基盤となった。


原城は 1604 年にキリスト教徒の有馬晴信(1567年-1612年)を君主とする有馬藩によって建てられた。キリスト教は 1549 年に日本に紹介されたばかりだったが、この地域のリーダーたちに素早く広がった。この改宗で結果的に破滅することになる。日本では1614年にキリスト教が禁教され、300年近くこの地を支配していた有馬氏は1616年に徳川幕府によって改易され、ほどなく原城は廃城となった。


この新しい藩は残酷なキリスト教弾圧を始め、北に新しい城を建てるために税を激増した。飢饉と過剰な労働に悩まされた農民たちは 1637 年に一揆を起こした。島原半島の人口のほとんどが武装して立ち上がり、島原の乱が起きた。浪士や天草諸島からのキリシタン農民たちが加わり、カリスマ溢れる 16 歳の天草四郎に率いられ、農民たちは新しい藩を相手に闘った。何度か負けた後に、女性と子どもを含む 3 万 7 千人の反乱者たちは、原城を再生し最終決戦の地とした。


反乱軍を鎮圧するため、九州各地から12万人以上の幕府軍が動員されたが、反乱軍は屈しなかった。しかし冬の数カ月が過ぎ徳川とオランダ船に阻まれ、反乱者たちの食料と弾薬は尽きた。1638 年 4 月の最後の突撃で城は破壊され、数万人の反乱者たちが処刑された。


今日、反乱者たちへの記念碑、城の壁、阿蘇山の火山砕屑物が残っているすべて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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