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Welcome to Urakuen

  • Aichi
Topic(s):
Historic Sites/Castle Ruins
Medium/Media of Use:
App, QR code, etc. Web Page Pamphlet
Text Length:
501-750
FY Prepared:
2022
Associated Tourism Board:
Nagoya Railroad Co.,Ltd.

「日本庭園 有楽苑について」 


有楽苑へようこそ


 有楽苑は、17世紀の貴重な茶室である「如庵」のための庭園として造られました。如庵は茶道建築の最高傑作とされ、国宝に指定されている3つの茶室の一つです。1971年に名古屋鉄道株式会社(名鉄)が如庵を買収し、神奈川県大磯から愛知県犬山市へと移築し、そこにこの庭園が造られました。有楽苑を造るにあたり名鉄の設計者が目指したのは、如庵の創設者である茶人・織田有楽(1547-1621)の嗜好を体現する庭園を造ることでした。有楽苑という名前も、「有楽の庭」を意味しています。


有楽苑の中心となる歴史的な国宝「如庵」

 織田有楽は、尾張国(現在の愛知県西部)で犬山城を築いた有力な武士の一族である織田家の出身です。1618年に隠居し、京都の建仁寺の境内に正伝院という名の邸宅を構えました。茶会を愛した有楽は、邸宅の隣に茶室を設計・建築し、その茶室を「如庵」と名付けました。

 如庵とその周囲の建築物は、明治時代(1868-1912)まで京都に残っていましたが、その後、所有者が変わり、複数回にわたって移築されました。如庵と正伝院の一部はやがて三井家の所有物になり、神奈川県大磯の邸宅に移築されました。 

 1969年、三井家はこれらの建物を、如庵の茶庭(茶室の庭、露地)の品々やその他多くの歴史的遺物と一緒に名鉄に売却しました。名鉄はこの購入を足がかりに、歴史的建造物を保存し文化遺産を公開する庭園を建設しようと計画を立てていました。

 その庭園計画の陣頭指揮をとったのが、著名な建築史家である堀口捨己(1895-1984)でした。堀口は、赴任前の数十年間、如庵をはじめとする茶室に関する古いスケッチや図面、史料を丹念に収集し、如庵や他の茶室に関する著書も執筆していました。如庵の復元を監修し、それを引き立たせる幻想的な庭園をつくる機会は、堀口のライフワークの集大成となりました。


庭園の建設

 名鉄が有楽苑の建設地として選んだのは、犬山城に近い遊園地の跡地でした。建設は前途多難なスタートを切りました。1971年5月18日、堀口が名古屋に到着すると、名鉄の従業員らがストライキを行っており、バスも電車もすべて運行を停止していたのです。堀口が犬山に来てからも問題は続きました。5月19日の朝、堀口は土砂降りの中現地を視察しに行きました。作業員たちは、堀口が東京から送った図面をもとに1週間かけて、建物の位置を示す縄を張っていました。それを見た堀口は、自分の設計した線と全く違い、如庵の位置も間違っていると激怒しました。翌日、いくつかの修正が行われた後に、工事が始まりました。次の年にかけて、堀口の指揮のもと、修復師、石工、大工が有楽の歴史的建造物の再組立と修復を行い、庭師によって手の込んだ生き生きとした景観が作られました。

 堀口は70代にもかかわらず、雨天でも、名鉄のレインコートを借りて工事に立ち会うなど、精力的に活動しました。堀口は21回も犬山へ足を運び、その都度、詳細な指示を残しました。


ビジョンの実現

 堀口捨己は、自然素材の特性をデザインに取り入れた手腕が評価されています。堀口は、最初に思い描いた庭のイメージに縛られることなく、石や木の個性を生かしながら設計を進めました。

 堀口は如庵の復元と庭園造成の計画を立てるにあたり、史料と1799年に描かれた有楽邸の絵図を参考にしました。建物の位置だけでなく、垣根の形、飛び石の配置、松の木の位置、竹の種類に至るまで、如庵の元の姿を連想できるように、これらの資料を綿密に調べてから決定されました。

 1799年に描かれた絵図には、石塔のある低い丘、その横には簡素な石橋のかかった池が描かれています。堀口は池を掘る代わりに、細かい白砂で水を表現する枯山水によってこの風景を再現しました。また、有楽が月見をするために四角く囲った「嘯月台」と呼ばれる場所も再現しました。庭の随所に数百年前の門や石灯籠、蹲居を取り入れ、数十本の大木や石を移植して、歴史を感じさせる庭園に仕上げました。

 有楽苑は、当初は簡単な移転・修復プロジェクトとして始まりましたが、その後、庭園全体がより大きなものに成長しました。その設計は、17世紀の茶人の美的感覚、巨匠建築家の献身とビジョン、そしてこの文化遺産を次の世代のために維持する管理人のたゆまぬ努力を体現しています。

歡迎來到有樂苑


這是一座專為17世紀的稀世之珍「如庵」茶室而建造的庭園。如庵是日本僅有的,被指定為國寶的三家茶室之一,同時也是唯一對民眾開放的國寶茶室,它被譽為茶室建築的巔峰之作。1971年,名古屋鐵道株式會社(以下簡稱「名鐵」)收購了如庵。為了繼承如庵的建造者、著名茶人織田有樂(1547-1621)的文化精髓,名鐵將茶室從神奈川縣大磯遷至愛知縣犬山市,並在此興建了一座庭園,命名為「有樂苑」。


有樂苑的核心——歷史國寶如庵

織田有樂出身於尾張國(今愛知縣西部;「國」是日本古代行政區劃,並非國家。)的織田家。這個強大的武士家族在附近建立了犬山城。1618年,織田有樂選擇隱居退世,在京都建仁寺內新建了一處居所「正傳院」。因其熱衷於舉辦茶會,又在居所旁設計建造了一間茶室,取名「如庵」。

直至明治時代(1868-1912),如庵及其週邊建築一直被保留在京都。之後,因房屋所有權轉移,歷經幾次遷移。如庵以及正傳院的部分建築最終被三井家收購,並移至位於神奈川縣大磯的私宅之中。

1969年,三井家將這些建築和如庵的「露地」(茶庭),連同其他眾多歷史文物一併出售給了名鐵。依照名鐵的規劃,首先購得這些建築,最終打造一個既能保護歷史建築,又能向大眾展示文化遺產的庭園。

名鐵請來了著名建築師和建築史學家堀口舍己(1895-1984)擔任總指揮。在執行這項工作之前的數十年間,堀口舍己一直在收集如庵以及其他茶室的古老草圖、圖紙和歷史文獻,還以此為基礎撰寫了數本著作。對堀口舍己來說,參與如庵的復原工作,並為展示它而創建一座充滿想像力的庭園,無疑是他一生集大成之作。


造園

名鐵選擇了犬山城附近的一家早已關閉的遊樂場来建造有樂苑。工程開始時並不順利,1971年5月18日,堀口舍己抵達名古屋的當天,恰逢名鐵工人罷工,客運和火車全都停駛。在經歷了一番波折後,他終於抵達了犬山,但麻煩尚未結束。5月19日早晨,他在滂沱大雨之中前往現場進行評估,雖然工人們已按照他從東京寄來的圖紙,花了一週的時間,用繩索在地上標記了建築位置,但他在實地勘察後大為不滿,怒斥繩索的定位與他的設計截然不同,連如庵的位置都標記錯誤。第二天經過調整,工程才終於正式開工。此後一年中,大批修復師、石匠和木匠在堀口舍己的指導下,重新搭建和修復了織田有樂的歷史建築。同時,園藝師也打造出了一片複雜而精細的景觀。

堀口舍己當時已年逾古稀,但工作起來依然精力充沛,不辭辛勞,經常穿著借來的名鐵雨衣,冒雨察看工地。他前後21次奔赴犬山,每次必定留下詳盡的指示。


願景達成

堀口舍己以擅長將天然材料的特性融入設計中而聞名。他不受限於最初的庭園構想,而是根據現場每塊岩石、每棵樹的特點來調整設計方案。

在制定如庵修復和造園方案時,堀口舍己參考了史料記載和一幅1799年的織田有樂居所的畫作。他的設計中一切都有依據,包括建築位置、圍牆樣式,甚至踏腳石的排列、松樹的種植位置,以及竹子的選擇等,都經過了細緻的考證,只求再現如庵的原始面貌。

在1799年的那幅畫作中,一座石塔矗立在矮丘上,塔旁有一個池塘,並有一座簡樸的石橋跨越其上。不過堀口舍己並沒有挖掘水池,而是以細潔的白砂代水,用枯山水再現了這一景觀。此外,他還重現了織田有樂的正方形賞月臺「嘯月台」。在他的設計與安排下,園中不僅配置了數百年歷史的古舊門扉、石燈籠、手水缽,還有移植而來的數十株大樹,以及石頭。所有都巧妙地融為一體,令庭園古意盎然。

有樂苑最初只是一個簡單的搬遷和修復工程,但在庭園落成後,反而發展出更重要的意義。它的設計不僅展現了17世紀茶人的審美趣味、建築大師的奉獻精神與願景,同時也體現了有識之士為子孫後代保護庭園文化遺產的所做出的不懈努力。

欢迎来到有乐苑


这是一座专为17世纪的稀世之珍“如庵”茶室建造的庭园。如庵是日本仅有的三家国宝茶室之一,也是唯一向公众开放的国宝茶室,被视为茶室建筑的最高杰作。1971年,名古屋铁道株式会社(以下简称“名铁”)收购了如庵。为了继承如庵的建造者、著名茶人织田有乐(1547-1621)的文化精髓,名铁将茶室从神奈川县大矶迁至爱知县犬山市,并在此兴建了一座庭园,命名为“有乐苑”。


有乐苑的核心——传世国宝如庵

织田有乐出身于尾张国(今爱知县西部;“国”是日本古代行政区划,有别于国家。)的织田家族。这个强大的武士家族在附近建立了犬山城。1618年,织田有乐退隐避世后,在京都建仁寺内新建了一处居所“正传院”。因他热衷于举办茶会,又在居所旁设计建造了一间茶室,取名“如庵”。

直至明治时代(1868-1912),如庵及其周边建筑一直位于京都。之后,由于产权变更房屋几经迁移。最终,如庵以及正传院的部分建筑被三井家族收购,并移至神奈川县大矶的私府之中。

1969年,三井家族将这些建筑售于名铁,一并出售的还有如庵的“露地”(茶庭)和其他众多历史文物。在名铁的计划中,收购只是第一步,打造一座既能保护历史建筑,又能向公众展示文化遗产的庭园,才是最终目的。

名铁请来著名建筑师、建筑史学家堀口舍己(1895-1984)主持这个庭园项目。在此前的几十年中,堀口舍己一直在千方百计收集着如庵以及其他茶室的古旧草图、图纸和历史文献,还以此为题材撰写了数本著作。参与如庵的复原工作,并为展示它而创建一座充满想象力的庭园,无疑是他一生集大成之作。


造园

名铁选择了犬山城附近的一座早已关闭的游乐场来建造有乐苑。工程开始时可谓好事多磨,1971年5月18日,堀口舍己抵达名古屋的当天,正逢名铁工人罢工,巴士和火车全都停运。当他好不容易赶到犬山后,还是波折不断。5月19日早晨,他在一场滂沱大雨中前往现场评估。虽然工人们已经花了一周时间,按照他从东京寄来的图纸,用绳索在地上标记了建筑位置,但他在实地勘察后勃然大怒,怒斥绳索的定位与他的设计截然不同,连如庵的位置都标记错误。第二天经过调整,项目才终于正式开工。此后一年中,一大批修复师、石匠和木匠在堀口舍己的指导下,重新搭建并修复了织田有乐的历史建筑,园艺师也打造出了一片精致而富有活力的景观。

堀口舍己当时已年逾古稀,但工作起来依然全力以赴、废寝忘食,还经常穿着借来的名铁雨衣冒雨察看工地。他前后21次奔赴犬山,每次都会留下一套详尽的指示。


实现愿景

堀口舍己以擅长将天然材料的特性融入设计而著称。他绝不拘泥于自己最初的庭园构想,而是根据每块岩石、每棵树的特点调整设计方案。

在制定如庵修复和造园方案时,堀口舍己参考了史料记载和一幅1799年的织田有乐居所的画作。在他的设计中,园中一切都必有出处,不仅是建筑位置、围墙样式,还包括踏脚石如何排列、松树种于何处、选用何种竹子等等,所有细节都经过仔细考据,只求重现如庵的原貌。

在1799年的那幅画作上,一座石塔立于矮丘上,塔旁有水池,池上横跨着一座简朴的石桥。堀口舍己并没有挖掘水池,而是以细洁的白砂代水,用枯山水再现了这一景观。除此之外,他还重现了织田有乐的正方形赏月台“啸月台”。在他的精心设计下,园中不仅拥有数百年历史的古旧门扉、石灯笼、手水钵,还有移植而来的数十株大树以及石块。所有这些都有机地融为一体,令庭园古意盎然。

有乐苑的建设最初只是一个简单的搬迁与修复工程,但庭园落成后反而具有更重大的意义。它的设计不仅展现了17世纪茶道大师的审美趣味、建筑大师的奉献精神与愿景,同时也体现了有识之士为子孙后代守护庭园文化遗产所作出的不懈努力。

‘일본정원 우라쿠엔(有楽苑)’ 


우라쿠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라쿠엔은 17세기의 귀한 다실인 ‘조안(如庵)’을 위한 정원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조안은 다도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여겨지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3개의 다실 중 하나입니다. 1971년에 나고야철도주식회사(메이테쓰)가 조안을 매수하여 가나가와현 오이소(大磯)에서 아이치현 이누야마시(犬山市)로 이축했는데, 그곳에 이 정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라쿠엔을 만들 때 메이테쓰의 설계자가 목표로 한 것은 조안의 창설자인 다인・오다 우라쿠(織田有楽, 1547-1621)의 기호를 구현하는 정원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라쿠엔이라는 이름도 '우라쿠의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우라쿠엔의 중심이 되는 역사적인 국보 ‘조안(如庵)’

 오다 우라쿠(織田有楽)는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현 서부)에서 이누야마 성을 쌓은 힘있는 무사의 일족 오다 가문 출신입니다. 1618년에 속세를 떠나 교토의 겐닌지 절 경내에 쇼덴인(正伝院, 정전원)이라는 이름의 저택을 지었습니다. 다회(茶會, 차모임)를 사랑한 우라쿠는 저택 옆에 다실을 설계하여 건축하고, 그 다실을 조안(如庵)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조안과 그 주위의 건축물은 메이지시대(1868-1912)까지 교토에 남아있었지만, 그 후 소유자가 바뀌면서 여러 번 이축되었습니다. 조안과 쇼덴인의 일부는 결국 미쓰이 가문의 소유물이 되었고, 가나가와현 오이소의 저택으로 이축되었습니다. 

 1969년 미쓰이 가문은 이 건물들을 조안의 다정(다실에 딸린 정원, 로지)에 있던 물건들 및 그 외 많은 역사적 유물들과 함께 메이테쓰에 매각했습니다. 메이테쓰는 이 매입을 발판으로 역사적 건축물을 보존하고, 문화유산을 공개하는 정원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 정원 계획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유명한 건축가이자 건축사학자 호리구치 스테미(堀口捨己, 1895-1984)였습니다. 호리구치는 부임 전 수십 년 동안 조안을 비롯한 다실의 옛 스케치와 도면, 사료를 수집하는데 힘썼으며, 조안과 다른 다실에 관한 저서도 집필했습니다. 조안의 복원을 감수하고,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환상적인 정원을 만들게 된 기회는 호리구치의 필생의 사업을 집대성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정원 건설

 메이테쓰가 우라쿠엔의 건설지로 선택한 곳은 이누야마 성에서 가까운 유원지 터였습니다. 건설의 출발은 쉽지 않았습니다. 1971년 5월 18일, 호리구치가 나고야에 도착해 보니 메이테쓰의 종업원들이 파업을 하고 있었고, 버스도 전철도 모두 운행이 정지된 상태였습니다. 호리구치가 이누야마에 온 후에도 문제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5월 19일 아침, 호리구치는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을 뚫고 현지를 시찰하러 갔습니다. 작업자들은 호리구치가 도쿄에서 보낸 도면을 토대로 1주일에 걸쳐 건물 위치를 표시하는 밧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호리구치는 자신이 설계한 선과 전혀 맞지 않고, 조안의 위치도 틀렸다고 격노했습니다. 다음 날 몇 가지 수정을 거친 후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해와 다음 해에 걸쳐 호리구치의 지휘 아래, 수복사, 석공, 목수가 우라쿠의 역사적인 건축물을 재조립하고 복구했으며, 정원사의 손길이 세심하게 미친 생생한 경관이 만들어졌습니다.

 호리구치는 70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오면 메이테쓰의 우비를 빌려 공사장에 나갈 정도로 온힘을 다해 임했습니다. 호리구치는 21번이나 이누야마를 방문했고, 그때마다 상세한 지시사항을 남겼습니다.


비전 실현

 호리구치 스테미는 자연 소재의 특성을 디자인에 접목한 실력이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호리구치는 맨처음에 그렸던 정원의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고, 돌과 나무의 개성을 살리면서 설계를 진행했습니다.

 호리구치는 조안의 복원과 정원 조성 계획을 세울 때 사료와 1799년에 그려진 우라쿠의 저택 그림을 참고했습니다. 건물의 위치뿐만 아니라 울타리 모양, 징검돌 배치, 소나무 위치, 대나무 종류에 이르기까지 조안의 원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도록 이 자료들을 면밀히 살펴본 후 결정했습니다.

 1799년에 그려진 그림에는 석탑이 있는 낮은 언덕이 있었고, 그 옆에는 소박한 돌다리가 놓인 연못이 그려져 있습니다. 호리구치는 연못을 파는 대신 고운 백사로 물을 표현하는 가레산스이(枯山水)로 이 풍경을 재현했습니다. 또, 우라쿠가 달구경을 하기 위해 사각으로 둘러친 '쇼게쓰다이(소월대)'라고 하는 곳도 재현했습니다. 정원 곳곳에 수백 년 전 문과 석등, 쓰쿠바이(신성한 장소 입구에서 제공되는 세면대)를 도입하고, 수십 그루의 거목과 돌을 옮겨 심어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정원으로 꾸몄습니다.

 우라쿠엔은 당초에는 간단한 이전과 수복 프로젝트로 시작되었지만, 그 후 정원 전체가 더 커졌습니다. 그 설계는 17세기 다인(茶人)의 미적 감각과 거장 건축가의 헌신과 비전, 그리고 이 문화유산을 다음 세대를 위해 유지관리하는 관리인의 꾸준한 노력이 구현되어 있습니다.

Welcome to Urakuen


This garden was created for a single purpose: to serve as the setting for Jo-an, a priceless seventeenth-century tea house. Jo-an is a masterwork of tea house architecture and one of only three tea houses recognized as National Treasures. In 1971, Jo-an was acquired by the Nagoya Railroad Company, Ltd. (also called “Meitetsu”), which moved the tea house from Ōiso, Kanagawa Prefecture, to the city of Inuyama, Aichi Prefecture, where the garden was built. In building Urakuen, Meitetsu planners sought to create a garden that would embody the tastes of Jo-an’s architect, the tea master Oda Uraku (1547–1621). Even the name “Urakuen” literally means “Uraku’s garden.”


Jo-an, the Historic National Treasure at the Core of Urakuen

Oda Uraku was born in Owari Province (now western Aichi Prefecture) to the powerful Oda family, the samurai who built nearby Inuyama Castle. In 1618, Uraku withdrew from public life and constructed a residence, called the Shōdenin, on the grounds of Kenninji Temple in Kyoto. Uraku enjoyed holding tea gatherings, and he designed and built a tea house that adjoined his residence. The name he chose for this tea house was “Jo-an.”

Jo-an and its surrounding structures remained in Kyoto until the Meiji era (1868–1912). Thereafter, the buildings changed ownership and were relocated several times. Jo-an and part of the Shōdenin were eventually acquired by the Mitsui family, who had the structures moved to their private residence in Ōiso, Kanagawa.

In 1969, the Mitsui family sold these buildings to Meitetsu, along with objects from Jo-an’s tea garden (roji) and many other historical artifacts. Purchasing the buildings was the first step of Meitetsu’s plan to create a garden where the historic structures could be preserved and their cultural legacy could be made available to the public.

Renowned architect and architectural historian Horiguchi Sutemi (1895–1984) was chosen to spearhead the garden project. Horiguchi had painstakingly collected old sketches, diagrams, and historical accounts related to Jo-an and other tea houses for decades prior to his appointment, and he had also authored several books on the topic. The chance to oversee the restoration of Jo-an and create a visionary garden to showcase it was the culmination of Horiguchi’s life’s work.


Construction of the Garden

Meitetsu chose to build Urakuen on the grounds of a former amusement park close to Inuyama Castle. Construction got off to a rocky start: on May 18, 1971, the day Horiguchi arrived in Nagoya, Meitetsu workers were on strike, and buses and trains had all stopped running. The trouble continued after Horiguchi arrived in Inuyama. On the morning of May 19, Horiguchi arrived to assess the site in the midst of a downpour. Workers had spent the past week laying string lines to mark the building locations based on plans Horiguchi had sent from Tokyo. After one look at the results, he flew into a rage, shouting that the lines were completely different from his design, and that the location for Jo-an was wrong. The next day, after some revisions, construction work began. Over the next year, a legion of restorers, masons, and carpenters under Horiguchi’s direction reassembled and repaired the historic structures of Uraku, while gardeners crafted an intricate living landscape.

Despite being in his 70s, Horiguchi was a dedicated and tireless participant, often standing in the rain in a borrowed Meitetsu raincoat to oversee construction. He made a total of 21 trips to Inuyama, each time leaving a set of detailed instructions.


Achieving a Vision

Horiguchi Sutemi has been praised for his ability to incorporate the characteristics of natural materials into his designs. Rather than being bound by his initial vision of a garden, Horiguchi adapted his design to incorporate the individual qualities of each rock and tree.

In developing his plan for the restoration of Jo-an and the creation of the garden, Horiguchi used historical descriptions and a drawing of Uraku’s residence from 1799. Everything was determined through careful scrutiny of these sources—not just the building positions, but the styles of the fences, the arrangements of the stepping stones, the locations of the pine trees, and the types of bamboo were all selected to evoke Jo-an’s original setting.

The 1799 drawing shows a low hill with a stone pagoda, and beside it, a pond spanned by a simple stone bridge. Instead of digging a pond, Horiguchi replicated the scene using a dry landscape garden (karesansui), in which water is represented by fine white gravel. He also recreated Uraku’s square moon-viewing platform, called the Shōgetsudai. Throughout the garden, Horiguchi incorporated centuries-old gates, stone lanterns, and washbasins (tsukubai) and transplanted dozens of large trees and stones to imbue the garden with a sense of history.

Although Urakuen began as a simple relocation and restoration project, the garden as a whole grew into something much greater. Its design embodies the aesthetic sensibilities of a seventeenth-century tea master, the dedication and vision of a master architect, and the unflagging efforts of caretakers who preserve the garden’s cultural heritage for generations to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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