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Gen-an

  • Aichi
Topic(s):
Historic Sites/Castle Ruins
Medium/Media of Use:
App, QR code, etc. Web Page Pamphlet
Text Length:
251-500
FY Prepared:
2022
Associated Tourism Board:
Nagoya Railroad Co.,Ltd.

「元庵」


元庵

 元庵は、近代に再建された茶室で、かつて有楽が住んでいた大坂の家に構えた茶室の古図に基づいて造られています。堀口捨己はその茶室も「如庵」と呼ばれていたのではないかと推測しています。有楽苑の構築にあたり、この図面をもとに建てられる茶室の正式名称が必要となり、堀口は、最初の隠居所を意味する「元庵」と名付けることを提案しました。

 この茶室の歴史を紐解くために、堀口は、現在、如庵にまつわる遺物の一つでもある、南側に掲げられている扁額を参考にしました。この扁額には「如庵」の名が刻まれていますが、その日付は1599年となっており、正伝院や如庵が京都に建てられるはるか以前のものになります。堀口は、この扁額は以前からあった同名の茶室のために作られ、有楽が大坂を離れる際にそれを持ち出し、京都に建てた新しい茶室にこの扁額と名前を再び使ったものと結論付けました。

 有楽は1614年の冬まで、大坂城のすぐ北西に位置する天満に住んでいましたが、彼の旧居はその3年後に新設された川崎東照宮に取り込まれました。1837年に火事で焼失するまで、有楽の茶室は神社の一部として保存されていました。1871年にこの地に造幣局が新設され、その敷地の一角に当時の茶室の一部で、入室前に客が靴を脱ぐ「沓脱石」が残っています。元庵を再建する際、堀口はこの石を有楽苑に移設するよう交渉しましたが、実現はしませんでした。

 元庵の再建が完了すると、扁額が必要となりました。堀口は、新たな材料ではなく、かつて奈良の喜光寺に掛けられていた扉板で、大磯の三井家の別邸で再利用されていたという由緒ある木材を選びました。有楽苑の職員らは木材を京都まで運び、表千家第13代宗匠の無盡宗左(1901-1979)に進呈しました。そして、無盡が扁額に選んだ名前を刻み、新しく完成した茶室を正式に「元庵」と命名しました。

 元庵は如庵よりも広く、内装も同様に型破りなものばかりで、その中には、有楽の師である千利休の好みから明らかに逸脱したものも見受けられます。例えば、有楽は部屋の仕上げとして、障子窓の木枠などに利休が忌み嫌った竹を多用しました。また、亭主と客人の席を隔てる柱にも竹が用いられています。さらに、利休は茶会用に選んだ掛け軸や生け花を客人に直接見せることを好みましたが、有楽は床の間(和室の上座の床を一段高くした所)を亭主の背後に配置しました。

元庵


這間茶室名為「元庵」,為當代重建的建築。堀口舍己(1895-1984)根據織田有樂(1547-1621)早年建於大坂(今大阪)宅邸中的茶室圖紙推測,當時的茶室可能也稱作「如庵」。因此,興建有樂苑時,他取元祖之意,建議將這間依據古圖紙重建的茶室命名為「元庵」。

堀口舍己透過如庵的一件舊物——南側匾額,推測出位於大坂的那間早期茶室的歷史。這塊刻有「如庵」字樣的牌匾製作於1599年,遠早於在京都修建正傳院和如庵的時期。於是,堀口舍己判斷這塊匾額之前曾擺放在同名茶室上。織田有樂離開大坂時,該匾額也被一同帶走。織田有樂在京都新建茶室時,很可能沿用了這個舊名和舊匾額。

織田有樂在1614年冬天之前,一直住在位於大坂城西北方的天滿。3年後,這所舊居被納入了新建的川崎東照宮之內,茶室也作為神社的一部分保留下來,直至1837年毀於火災。1871年,同址新建了日本造幣局,局中一角還保留了當年茶室供客人停留脫鞋的「沓脫石」。重建元庵時,堀口舍己甚至曾出面協商,希望能將這塊具有歷史意義的石頭移至有樂苑,可惜未能如願。

重建後的元庵同樣需要懸掛匾額,堀口舍己挑選了一塊曾懸於奈良喜光寺、後又用在三井家大磯別墅的古老門板。有樂苑的工作人員將木料送至京都,交給了茶道流派表千家第13代宗匠無盡宗左(1901-1979)。無盡宗左將選定的名字刻於匾額,正式將「元庵」之名賦予了這間新的茶室。

元庵空間比如庵更寬敞,內部裝飾同樣不循常規,其中幾處設計與織田有樂的老師千利休(1522-1591)的喜好頗有背離。千利休不喜竹子,織田有樂卻在室內大量使用竹料,例如障子窗(移窗)框架,以及用竹柱來分隔主席與客席。此外,千利休喜歡讓客人一眼就能看到為茶會挑選的卷軸書畫和插花,織田有樂卻將元庵的「床之間」(和式壁龕)設在茶會亭主(主人)的身後。

元庵


这间茶室名为“元庵”,重建于现代。织田有乐(1547-1621)早年建于大坂(今大阪)宅邸中的茶室图纸尚存,堀口舍己(1895-1984)认为图纸上的茶室很可能也叫“如庵”。因此,兴建有乐苑时,他取元祖之意,提议将这间依据古图纸重建的茶室命名为“元庵”。

堀口舍己通过参考如庵的一件旧物——南侧匾额,推测出位于大坂的那间早期茶室的历史。这块刻有“如庵”字样的牌匾制作于1599年,远早于在京都修建正传院和如庵的时期。于是,堀口舍己判断这块匾额之前曾用在同名茶室上,在织田有乐离开大坂时,匾额也被一同带走。织田有乐在京都新建茶室时,很可能沿用了这个旧名和老匾额。

织田有乐在1614年冬天之前,一直住在位于大坂城西北方的天满。在他离开3年后,这所旧居被纳入了新建的川崎东照宫之内,茶室也作为神社的一部分保留下来,直至1837年毁于火灾。1871年,此地新建了日本造币局,局中一角还保留了当年茶室供来客停留脱鞋的“沓脱石”。重建元庵时,堀口舍己曾出面交涉,希望能将这块石头移至有乐苑,但未能如愿。

重建后的元庵同样需要一块匾额,堀口舍己并未使用新的材料,而是挑选了一块历史悠久的木料——曾悬于奈良喜光寺、后又用在三井家族大矶别墅的门板。有乐苑的工作人员将木料送至京都,交给茶道流派表千家第13代宗匠无尽宗左(1901-1979)。大师将选定的名字刻于匾额,正式将“元庵”之名赋予了这间新的茶室。

元庵空间比如庵更大,内部装饰同样不循常规,其中几处明显背离了织田有乐的老师千利休(1522-1591)的喜好。千利休不喜竹子,织田有乐却在室内大量使用竹料,障子窗(移窗)用了竹框架,甚至分隔主席与客席的柱子也用了竹子。此外,千利休喜欢让客人一眼就能看到为茶会挑选的卷轴书画和插花,织田有乐却将元庵的“床之间”(和式壁龛)设在了茶会亭主(主人)的身后。

‘겐안(元庵)’


겐안

 겐안은 근대에 재건된 다실로, 과거 우라쿠가 살았던 오사카 집 다실의 옛 도면을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호리구치 스테미(堀口捨己)는 그 다실도 '조안(如庵)'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우라쿠엔을 구축함에 있어 이 도면을 토대로 지어지는 다실의 정식 명칭이 필요했는데, 호리구치는 최초의 은거지를 의미하는 ‘겐안’이라는 이름을 제안했습니다.

 이 다실의 역사를 풀어가기 위해서 호리구치는 현재 조안과 관련된 유물 중 하나로 남쪽에 걸려있는 편액을 참고했습니다. 이 편액에는 ‘조안’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으나, 그 날짜가 1599년이라고 되어 있어 쇼덴인(正伝院, 정전원)이나 조안이 교토에 세워지기 훨씬 이전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호리구치는 이 편액은 이전부터 있던 같은 이름의 다실을 위해 만들어졌고, 우라쿠가 오사카를 떠날 때 그것을 가지고 나와 교토에 세운 새 다실에 이 편액과 이름을 다시 사용한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우라쿠는 1614년 겨울까지 오사카성 바로 북서쪽에 위치하는 덴마(天満)에 살았지만, 그의 옛 거처는 그 3년 후에 신설된 가와사키토쇼구(川崎東照宮)에 예속되었습니다. 1837년에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우라쿠의 다실은 신사의 일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1871년에 이 땅에 조폐국이 신설되었고, 그 부지 일각에 당시 다실의 일부로 입실 전에 손님들이 신발을 벗는 '구쓰누기이시(답탈석)'이 남아있습니다. 겐안을 재건할 때 호리구치는 이 돌을 우라쿠엔으로 옮길 수 있도록 교섭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겐안 재건이 완료되면서 편액이 필요해졌습니다. 호리구치는 새로운 재료가 아니라 과거 나라(奈良)의 기코지 절에 걸려 있던 비판(扉板)으로, 오이소의 미쓰이 가문 별저에서 재사용되었다는 유서 깊은 목재를 선택했습니다. 우라쿠엔 직원들은 목재를 교토까지 운반하여 오모테센케 제13대 종장 무진 소사(無盡宗左, 1901-1979)에게 진상했습니다. 그리고 무진이 편액에 선택한 이름을 새기고, 새로 완성한 다실을 정식으로 '겐안’이라 명명했습니다.

 겐안은 조안보다 넓고, 내장도 마찬가지로 파격적인 것들뿐이었는데, 그 중에는 우라쿠의 스승인 센리큐의 취향에서 분명하게 벗어난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라쿠는 방의 마감으로 창호지 창문의 나무틀 등에 리큐가 싫어했던 대나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또, 주인과 손님의 자리를 나누는 기둥에도 대나무를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리큐는 다회(茶會, 차모임)용으로 선택한 족자나 꽃꽂이를 손님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지만, 우라쿠는 도코노마(일본식 방의 상좌에 바닥을 한층 높게 만든 곳)를 주인 뒤쪽에 배치했습니다.

Gen-an


The tea house called Gen-an is a modern reconstruction. It is based on surviving plans for a tea house Uraku built at his earlier residence in Osaka—one which Horiguchi Sutemi believed may also have been called “Jo-an.” During the construction of Urakuen, an official name was needed for the tea house that would be built using these plans. Horiguchi suggested the name “Gen-an,” which means “original hermitage.”

To piece together the history of this earlier tea house, Horiguchi used a clue hidden on one of the artifacts now associated with Jo-an: the name plaque that hangs on its southern side. Although this plaque is inscribed with the name “Jo-an,” it is dated 1599—long before the Shōdenin and Jo-an were built in Kyoto. Horiguchi concluded that the plaque must have been created for an earlier tea house with the same name, and that Uraku took the plaque with him when he left Osaka. Presumably, Uraku then reused it and the name for the new tea house he built in Kyoto.

Uraku lived in the Tenma area of Osaka, just northwest of Osaka Castle, until the winter of 1614. Three years later, Uraku’s former residence was absorbed by the newly founded Kawasaki Tōshōgū Shrine. His tea house was preserved as part of the shrine until both were destroyed by fire in 1837. In 1871, the newly founded Japan Mint was built on the site. A single part of the original tea house survives in one corner of the mint grounds: the kutsunugi-ishi (“shoe-removal rock”), where guests would pause to remove their shoes before entering. During the reconstruction of Gen-an, Horiguchi negotiated to have this rock relocated to Urakuen, but he was unsuccessful.

When the reconstruction of Gen-an was complete, it needed a name plaque. Rather than use new materials, Horiguchi selected wood with a distinguished pedigree: a door panel that had once hung in Kikōji Temple in Nara and had been reused in the Mitsui family villa in Ōiso. Urakuen officials took the wood to Kyoto and presented it to Mujin Sōsa (1901–1979), the thirteenth head of the Omotesenke school of tea. Mujin inscribed the plaque with the chosen name and officially bestowed the name “Gen-an” on the newly finished tea house.

Gen-an is larger than Jo-an, and many of its interior features are equally unconventional. Several show Uraku’s clear departure from the preferences of his mentor, Sen no Rikyū. For example, Uraku used bamboo—a material Rikyū disdained—for many of the finishings in the room, such as the wooden frames of the shōji windows. There is also a bamboo pillar that separates the host’s seating area from the guests. Furthermore, Rikyū preferred to give the guests a direct view of the scroll and flower arrangements chosen for the gathering, but for Gen-an, Uraku positioned the tokonoma alcove behind the host inst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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