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History of Kobe Kitano Ijinkan-gai

  • Hyogo
Topic(s):
Villages/Towns Public Works & Institutions (Museums, etc.)
Medium/Media of Use:
Web Page
Text Length:
251-500
FY Prepared:
2024
Associated Tourism Board:
Kitano ijinkan kyogi-kai

神戸北野異人館街の歴史


江戸時代(1603~1867)の間、日本は鎖国政策を維持し、ほとんどの外国との貿易、渡航、接触を厳しく禁止していました。この政策は200年以上続き、1858年に日本と5つの西洋列強との間で安政条約が締結されることで終わりを迎えました。1868年、神戸は外国貿易に開放された数港の一つとなりました。


当時の計画では、神戸の海岸に外国人が居住し働くことを想定した外国人居留地を設立することが予定されていました。しかし、江戸時代末期の混乱により、居留地は期限までに完成しませんでした。そこで政府は、生田川と宇治川の間の周辺地域において、外国人が日本人市民と共に居住することを許可することにしました。多くの外国人は、後に北野町山本通地区となる山手地域に魅力を感じました。そこは外国人居留地の北に位置する魅力的な田舎の丘陵地で、なだらかな斜面からは港と海の景色が見えました。1880年代から、ここはユニークな外国人居住区として発展し、北野異人館街として知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異人」は「外国人」を意味する言葉で、「館」は「家」を、「街」は「地区」を意味します。


20世紀半ばまでに、北野異人館街は200以上の洋風建築と和風建築を擁するまでに成長しました。この地区は日本人と外国人が調和して共に暮らせる場所として知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外国の影響は、技術的進歩とライフスタイルの変化ももたらしました:神戸の異人館街は、肉食文化、洋装、そしてゴルフの影響を日本で最初に受けた場所でした。


外国人の家は「異人館」と呼ばれ、ドイツ人のゲオルク・デ・ラランデやイギリス人のA.N.ハンセルなどの優れた非日本人建築家の存在により、神戸の多くの家屋や他の洋風建築のデザインは非常に品質が高いものでした。同時に、日本のデザインと建築技術が西洋のものと組み合わされ、多大な融合が起こりました。大工、左官、石工、屋根葺き職人は通常日本人でしたが、彼らは進歩的な「国際化された」技能を備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やがて、ベランダ、出窓、レンガの煙突、塗装された木製の下見板張りや漆喰の外壁などの共通の特徴を持つ「神戸異人館様式」が現れました。こうした建物は多くの場合、日本人の従業員にとってより快適な和風の翼部と接続されていました。


これらの洋風建築の多くは、第二次世界大戦による被害、戦後の開発、そして時の経過による劣化のために消滅しました。しかし、1960年ごろに始まった保存活動が成功したおかげで、19世紀から20世紀初頭に建設されたそのような建物の約30棟が今日も残っています。このことは、かつては活気に満ちていた外国人居留地の痕跡がほとんど残っていない横浜や長崎などの他の旧開港地とは顕著な対照をなしています。そうした理由などにより、北野異人館街の数多くの洋風住宅は、日本の、そして国際的な歴史文化の重要な一時代を物語る貴重な物的証拠となっています。

神戶北野異人館街的歷史


日本在江戶時代(1603-1867)施行鎖國政策,嚴格禁止與大多數的外國貿易、旅行和接觸。這項政策持續了200多年,直到1858年日本與五個西方列強簽訂《安政條約》後才告終。1868年,神戶成為開放對外貿易的幾個通商口岸之一。 


當時計畫在神戶的沿海地區建立一個外國人居留地,供外國人居住與工作之用。然而,由於江戶時代末期時局動盪,該居留地未能按期完成,因此日本政府決定讓外國人與日本市民共同居住在生田川與宇治川之間的周邊區域。許多外國人被「山手地區」,即後來的北野町山本通地區所吸引。山手地區位於外國人居留地的北方,是一處極具魅力的鄉村丘陵地;其平緩的坡地是俯瞰港口和海洋景色的好地方。此一地區自1880年代起,逐漸發展成一個獨特的外國人居住區,並以「北野異人館街」之名而為人所知。「異人」指的是「外國人」,「館」是「家」,「街」則是「地區」的意思。


北野異人館街在20世紀中葉以前,已經發展到擁有200多幢西式建築和日式建築的規模。此一地區也逐漸因為日本人與外國人的和諧共處而為人所知。外國的影響帶來了技術的進步,以及生活方式的改變──神戶異人館街是日本最早受到肉食文化、洋裝,乃至於高爾夫球運動影響的地方。


外國人的居所被稱作「異人館」。得益於德國建築師格奧爾格・德・拉蘭迪(Georg de Lalande)與英國建築師A.N.漢塞爾(A. N. Hansell)等傑出的外籍建築師的貢獻,神戶的眾多房屋及其他西式建築均展現出卓越的設計品質。日本與西方的設計理念、建築技術在此融合,達到了高度的和諧與統一。木匠、泥瓦匠、石匠以及屋頂工匠通常是日本人,他們在實作中逐漸掌握了先進的「國際化」技能。不久,具有陽台、凸窗、磚砌煙囪以及上漆的護牆板或灰泥外牆等共同特徵的「神戶異人館樣式」便應運而生。這樣的建築物多半與「對日本職員而言,更為舒適」的和式翼樓相連。


這些西式建築當中有不少因為歷經第二次世界大戰的破壞、戰後開發以及歲月的侵蝕而不復存在。不過,幸好於1960年左右開始的保護活動取得了成功,讓約莫30幢建於19世紀至20世紀初的建築仍被保存至今。這一點與橫濱、長崎等地形成了鮮明的對比,因為曾經充滿活力的外國人居留地在其他那些舊有的通商口岸幾乎已不留痕跡。基於此等原因,北野異人館街的眾多西式房屋已成了見證日本,乃至於國際的歷史文化中一個重要時代的珍貴物證。

神户北野异人馆街的历史


日本在江户时代(1603-1867)实行锁国政策,严格禁止与大多数国家的贸易、旅行和接触。这项政策持续了200多年,直到1858年日本与五个西方列强签订《安政条约》后才宣告结束。1868年,神户成为开放对外贸易的几个港口之一。


当时的计划是在神户沿海地区建立一个外国人定居点,供外国人生活和工作。然而,由于江户时代末期的动荡,该定居点未能在约定的期限内完成。于是,日本政府决定允许外国人与日本市民共同居住在生田川和宇治川之间的相关区域。许多外国人被“山手地区”,即后来的北野町山本通地区所吸引。山手地区位于外国人定居点以北,是一片极具魅力的乡村丘陵地带,其平缓的坡地可以俯瞰港口和海景。自19世纪80年代起,这一地区逐渐发展成为独具特色的外国人居住区,并被称为“北野异人馆街”,这里的“异人”意为“外国人”。


到20世纪中叶,北野异人馆街已壮大到有200多栋西式建筑和日式建筑的规模。该地区以日本人与外国人和谐共处的生活方式著称。外来影响推动了技术的进步,改变了当地的生活方式:神户异人馆街是日本最早受到肉食文化、西式服装以及高尔夫运动影响的地方。


外国人的居所被称作“异人馆”。得益于杰出的外国建筑师如德国的乔治·德·拉兰德(Georg de Lalande)与英国的A.N.汉塞尔(A. N. Hansell)等人的贡献,神户的众多西式住宅和建筑展现出卓越的设计品质。日式设计和建筑技术与西方风格巧妙融合,达到了高度的和谐统一。参与其中的木匠、泥瓦匠、石匠及屋顶工匠通常是日本人,他们在实践中掌握了一套“国际化”的建筑技能。一种独特的“神户异人馆风格”应运而生,其典型的特征包括阳台、凸窗、砖砌烟囱以及涂漆的护墙板或石膏外墙。这些建筑通常与日式厢房相连,对日本雇员来说日式房间更舒适。


历经第二次世界大战的破坏、战后开发以及岁月的侵蚀,这些西式建筑中有许多已不复存在。不过,得益于1960年左右开始实施的有效保护措施,大约30栋建于19世纪至20世纪初的建筑被保存至今。北野异人馆街的众多的西式房屋,已成为日本乃至国际历史文化重要节点的珍贵实物档案。

고베 기타노 이진칸 거리의 역사


일본은 에도 시대(1603~1867) 동안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거의 모든 외국과의 무역, 도항 및 접촉을 금지하였습니다. 쇄국 정책은 200년 이상 유지되었지만 1858년 일본이 5개의 서양 열강 국가들과 안세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 정책을 폐지하게 되었습니다. 1868년, 고베는 외국과의 무역이 개방된 몇 곳의 항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당시 계획으로는 외국인들이 일하고 정착할 지역이라 예상했던 고베 해안가에 외국인 거주 지역을 설치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도 시대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국 때문에 거주지를 기간내에 완성할 수 없었습니다. 정부는 이쿠타와 우지가와 사이의 주변 지역을 외국인이 일본인과 함께 거주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습니다. 많은 외국인은 후에 기타노초/야마모토도오리 지구가 되는 야마테 지역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 지역은 외국인 거주지의 북쪽에 위치한 매력적인 시골 언덕 지대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언덕 위에서 항구와 바다의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1880년대부터 이곳은 독특한 외국인 거주 지역으로 발전하였고 ‘기타노 이진칸 가이(北野異人館街)’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각각 ‘이진(異人)’은 ‘외국인’, ‘칸(館)’은 ‘집’ ‘가이(街)’는 ‘지역’을 의미하는 일본어입니다.


20세기 중반까지 기타노 이진칸 가이는 200채 이상의 서양식 건축물과 일본식 건축물이 들어설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일본인과 외국인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생활할 수 있는 장소로 알려졌습니다. 외국의 영향은 기술적 발전은 물론 라이프 스타일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고베의 이진칸 가이는 육식 식문화, 서양식 복장 및 골프의 영향을 일본에서 최초로 받은 지역이기도 합니다.


외국인들의 집은 ‘이진칸’이라고 불렀습니다. 독일인 게오르그 드 라란데와 영국인 A.N 한셀 등 실력있는 일본인이 아닌 건축가들 덕분에 고베의 많은 가옥 및 서양 건축물들의 디자인은 특히 뛰어난 품질을 자랑합니다. 동시에 일본의 디자인과 건축 기술이 서양의 기술들이 결합하면서 멋진 융합을 이루게 됩니다. 목수, 미장공, 석공, 기와 장인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지만, 진보한 ‘국제화된’ 기술 능력을 발전시켰습니다. ‘고베 이진칸 스타일’이 등장하였고, 베란다, 퇴창, 벽돌로 만든 굴뚝, 페인트칠 된 목제 보드, 회반죽 외벽 등이 이 스타일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이 건축물들의 대부분은 일본인 종업원들에게 보다 편안한 일본 스타일의 건물 날개 부분과 연결되었습니다.

이 같은 서양식 건축의 대부분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 전후 개발, 그리고 시간 경과로 인한 노후화로 소멸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1960년경 시작된 보존 활동이 성공함에 따라 19세기에서 20세기초에 건설된 건축물 약 30여채가 오늘날에도 보전되어 있습니다. 이는 과거에는 활기 넘치던 외국인 주거지의 흔적이 거의 사라진 요코하마나 나가사키 등 다른 옛 개항지들과 현저한 대조를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기타노 이진칸 가이의 수많은 서양식 주택은 일본 및 국제 사회의 역사와 문화에 있어 중요한 시대의 물적 증거입니다.

History of Kobe Kitano Ijinkan-gai


Japan maintained a policy of national seclusion during the Edo period (1603–1867), with strict prohibitions on trade, travel, and contact with most foreign countries. This policy remained in effect for over 200 years, ending in 1858 with the signing of the Ansei Treaties between Japan and five Western powers. In 1868, Kobe became one of several ports to be opened to foreign trade.


Plans at the time called for the establishment on the Kobe coast of a foreign settlement where non-Japanese were expected to live and work. Due to the turmoil at the end of the Edo period, however, the settlement was not completed by the agreed deadline. The government then decided to allow foreigners to live alongside Japanese citizens in the surrounding neighborhoods between the Ikuta and Uji rivers. Many foreigners were drawn to the Yamate area, where Kobe’s Kitano-cho/Yamamoto-dori district was eventually located. It was an appealing rural hillside to the north of the foreign settlement, with a gentle slope that provided a view of the port and the sea. Beginning in the 1880s, the district developed into a unique foreign residential area that became known as Kitano Ijinkan-gai. Ijin is a word for “foreigner,” kan means “house,” and gai means “district.”


By the mid-twentieth century, Kitano Ijinkan-gai had grown to contain more than 200 Western-style and Japanese-style buildings. The district became known as a place where Japanese and foreigners could live together harmoniously. The foreign influence also brought technological advances and lifestyle changes: Kobe’s Ijinkan-gai was the first place in Japan to be influenced by meat-based cuisine, Western-style clothing, and golf.


The homes of foreigners were called ijinkan (“foreigner houses”). Thanks to the presence of skilled non-Japanese architects such as the German Georg de Lalande and the Englishman A. N. Hansell, the designs of many Western-style houses and other buildings in Kobe were of a very high quality. At the same time, there was great hybridization as Japanese design and construction techniques were combined with Western ones. The carpenters, plasterers, stonemasons, and roofers were usually Japanese, but they developed a progressive “internationalized” skill set. A “Kobe Ijinkan Style” soon emerged, with common features such as verandas, bay windows, brick chimneys, and painted clapboard or plaster exterior walls. The buildings were often connected to a Japanese-style wing that was more comfortable for Japanese employees.


Many of these Western-style buildings have disappeared due to damage caused by World War II, postwar development, and the ravages of time. But thanks to successful preservation efforts that began around 1960, approximately 30 such buildings constructed in th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remain standing today. This is in marked contrast to other former treaty ports in Japan such as Yokohama or Nagasaki, where little remains of formerly vibrant foreign settlements. For these and other reasons, the numerous Western-style houses of Kitano Ijinkan-gai are precious physical documents of an important era in Japanese and international history and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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