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산키로

  • 야마구치
  • 후쿠오카
장르:
사적·성터
매체 이용 구분:
웹페이지
단어 수:
251-500
작성 연도:
2023
지역 협의회명:
kammon imbaundo ukeire kyogikai

Sankirō


Constructed in 1931, Sankirō is one of Moji’s most beloved historic buildings. Perched on the hillside above Mojikō Station, the large, three-story wooden building overlooks the Kanmon Strait and presents its handsome countenance to the bustling port below. During the early Shōwa era (1926–1989), Sankirō rose to prominence as Moji’s leading luxury restaurant. Not merely a place to dine, it functioned also as a social salon for artists, entertainers, socialites, and executives of some of the nation’s largest companies and financial institutions.


Architecture

Sankirō is one of the largest restaurant buildings in Kyushu, with a total floor area of more than 1,200 square meters and more than 20 rooms. Its chandelier-bedecked, 116-square-meter banquet hall on the second floor is fronted by a 29-square-meter stage.


One of Sankirō’s most notable features is the beautiful craftsmanship of its windows and accompanying transoms, each designed to resemble an image of nature. The Fujikatō-mado (literally, “Mt. Fuji Window”) is a bell-shaped window whose outline resembles Japan’s most iconic mountain. The Tenkū e no Kaidan, or “Stairway to the Stars,” is a staircase flanked by windows that have been named matsu (pine), yama (mountain), tsuki (moon), and kumo (cloud).


On April 5, 1931, a correspondent for the local newspaper Moji Shinpō praised the building’s elegant, bold construction and its blend of old and new, writing, “The view is lovely. The Japanese-style restaurant has a magnificent exterior that is without equal in Kitakyushu.”


Miyake Asa: Geisha and Entrepreneur

Sankirō owes its existence to one person: an industrious, enterprising, and slightly mysterious former geisha named Miyake Asa (1854–1937). In her youth, Asa apprenticed as a female entertainer (geiko) in Kyoto’s Gion district. There, she developed an appreciation for traditional culture and the performing arts. But, feeling hampered by the physical and intellectual constraints of her situation, Asa chose to escape her apprenticeship and pursue her ambitions as a restaurateur. She made the 560-kilometer trip to Moji, and by 1906 she had founded Sankirō.


Asa was in the right place at the right time: the rapid growth of Moji’s port jump-started a multitude of commercial enterprises. The city’s newly wealthy merchants and traders wanted to dine and be entertained in style, and Sankirō catered to their desires. Asa’s fledgling business boomed. Within twenty-five years of leaving Kyoto, Asa had built Sankirō into a pillar of the community, and when she passed away at the age of 83, she left behind an entrepreneurial and artistic legacy that continues today.


Playground of the Rich and Famous

Asa died childless, but her successors, Iseko (1899–1986) and Tamejirō (1895–1988), took over the Miyake family name. Sankirō continued to thrive under their stewardship. The pair enthusiastically supported and participated in the performing arts, staging Noh plays, dances, and nagauta (traditional music) to accompany the restaurant’s lavish banquets. The venue attracted both literati and glitterati who came to Moji just to visit Sankirō.


Following those heady years, during which Sankirō was the very embodiment of Moji’s prosperity, the restaurant went into decline after World War II (1939–1945) and closed its doors in 1955, becoming the private residence of Asa’s grandson. On his death in 2004, with his family unable to maintain the building’s upkeep, Sankirō seemed headed for demolition, but the residents of Moji rushed to its aid. Local volunteers formed the Association for the Preservation of Sankirō, and within a year they had collected 16,000 signatures and 19 million yen to buy the building and donate it to the city. Today, the building operates as Sankirō Saryō Kaito, a restaurant specializing in puffer fish cuisine. An exhibition room on the ground floor explains its storied history.

三宜楼


1931年に建てられた三宜楼は、かつて門司港の料亭のトップ3に数えられた高級料亭だ。丘の中腹に建つ木造3階建ての大きな建物からは、関門海峡を一望できる。単に食事をするだけの場ではなく、芸術家や芸能者、社交界の名士、国内有数の大企業や金融機関の役員等が集う社交サロンでもあった。


美しい木造建築

三宜楼は、床面積延べ1,200平方メートル以上、部屋数は20以上で、現存する料亭の建物としては九州で最大級だ。2階にある116平方メートルの宴会場にはシャンデリアが輝き、正面には29平方メートルのステージがある。


最も注目すべきなのは、美しく細工された窓と欄間で、いずれも自然の風景を表したデザインである。輪郭が富士山に似ている「富士火灯窓」もその一つだ。また、「天空への階段」と呼ばれる階段の両側には松、山、月、雲と名付けられた窓がある。


1931年4月5日、地元紙「門司新報」の記者は、新旧が融合した優雅で大胆な建物を絶賛し、「眺めが素晴らしい。北九州では比類のない立派な外観の料亭」と書いている。


三宜楼を一代で築いた女性実業家:三宅アサ

三宜楼は、三宅アサ(1854-1937)という女性が一代で築いた。勤勉で進取の気性に富んでいたアサは若い頃、京都の祇園で芸妓の見習いをし、伝統文化や伝統芸能を学んだ。しかし、肉体的・精神的に制約されることを不当に感じたため、アサは見習い生活から逃げ出し、飲食店を経営するという野望をかなえることにした。彼女は門司まで560キロの旅をし、1906年には「三宜楼」を創業した。


アサが三宜楼を開いたのは、ちょうど門司の港が急速に発展している時期だった。三宜楼は、新たに裕福になった商人たちにスタイリッシュな食事や接待を提供した。アサの駆け出しのビジネスは大成功を収めたのである。京都を離れて25年も経たないうちにアサは三宜楼を地域の名物に育て上げた。1937年に83歳でこの世を去ったが、彼女が残した企業家精神と芸術的遺産は今日に受け継がれている。


富裕層や著名人の遊び場

アサには子どもがいなかったが、後継者の伊勢子(1899-1986)と為次郎(1895-1988)のもとで三宜楼は繁栄を続けた。豪華な宴席にあわせて能楽(室町時代から続く日本を代表する舞台芸術)、舞踊、長唄(江戸時代に歌舞伎の音楽として成立、発展した三味線音楽)などの舞台芸術を上演し、セレブたちを魅了した。そのため三宜楼のためだけに門司を訪れる人もいた。


三宜楼は華やかな時代を経て、第二次世界大戦(1939-1945)後は衰退していき、1955年に閉業してアサの孫の私邸となった。2004年にアサの孫が亡くなり、建物は取り壊されるかと思われたが、門司の住民達が支援に乗り出した。彼らは1年以内に1万6000人分の署名と1900万円を集めて建物を買い取り、門司市に寄贈した。現在、三宜楼の建物は、関門エリアの名物であるフグ料理の専門店「三宜楼茶寮 KAITO」として営業している。1階にある展示室では、三宜楼の歴史を紹介している。

三宜樓


建於1931年的三宜樓是門司最受歡迎的歷史建築之一。這座大型木造建築有三層高,矗立在門司港站上方的山坡上,俯瞰著關門海峽,與山下熙熙攘攘的海港相映成趣。據說三宜樓在昭和時代(1926-1989)早期就已經躋身門司港最頂級餐廳的前三名。它不僅是用餐之地,還是一處社交沙龍,藝術家、藝人、社會名流以及來自全國巨頭公司和金融機構的高管絡繹不絕。


建築風格

總面積超過1200平方公尺的三宜樓擁有20多個房間,是九州現存規模最大的日式料亭之一。面積達116平方公尺的宴會廳位於二樓,在吊燈照耀下光彩熠熠。宴會廳正面還有一個29平方公尺大的舞台。

精美絕倫、做工精細的格子窗和與之相配的「欄間」(障子門與房頂之間的裝飾性木雕)是三宜樓最大的亮點,每一處設計都寓意著大自然的美景。例如「富士火燈窗」意為富士山之窗,以鐘形的輪廓勾畫出日本的象徵;「天國之梯」的樓梯兩側是造型各異的格子窗,分別名為「松」、「山」、「月」、「雲」。

「此處風景甚美。」當地《門司新報》的記者在1931年4月5日稱讚三宜樓的建築風格新舊融合,優雅而大膽。他寫道:「這家日式料亭外觀之華麗,在北九州無人望其項背。」


三宅アサ:白手起家的女企業家

三宜樓要歸功於一個人:三宅アサ(Miyake Asa, 1854-1937)——一位勤勞、進取且略顯神祕的前藝伎。三宅アサ在年輕時曾是京都祇園(祇,音同「奇」)的一名藝伎學徒。在祇園,她對傳統文化和表演藝術產生了濃厚的興趣,但由於當時環境限制了她的身心發展,三宅アサ擺脱了學徒生涯,走上了經營餐廳之路。她長途跋涉560公里來到門司,在1906年創辦了三宜樓。

當時門司港正值高速發展期,商貿企業紛紛成立,新晉富商們正需要高檔餐飲和娛樂場所,三宜樓恰好滿足了他們的需求,可以說,三宅アサ是在最佳時機來到了最佳地點,她的事業剛起步就獲得了傲人的成績。在離開京都不到25年的時間裡,她將三宜樓打造成了當地支柱企業。三宅アサ享年83歲,其創業精神和藝術遺產一直延續至今。


富人和名流的樂園

去世時,三宅アサ膝下無子,但繼任者伊勢子(1899-1986)和為次郎(1895-1988)繼承了三宅家姓氏,三宜樓在他們的悉心管理下繼續蓬勃發展。夫婦倆熱心支持並參與藝術表演,為豪華宴會表演能劇、舞蹈和傳統音樂「長唄」,這吸引了各地文人雅士,有些人甚至只為了三宜樓專程來到門司。

在那段輝煌日子裡,三宜樓就是門司繁榮的化身。然而好景不長,第二次世界大戰(1939-1945)後餐廳逐漸衰落,終於在1955年關門,三宜樓成了三宅アサ孫子(伊勢子和為次郎之子)的私人宅邸。他在2004年去世後,家人無力再對建築進行維護,三宜樓也面臨著被拆除的命運。此時,門司居民紛紛伸出了援手,當地志工成立了「三宜樓保護協會」,一年內就徵集到16,000個簽名和1900萬日圓,他們購下三宜樓後將其捐贈給了北九州市。三宜樓的維修保護工程在2012年啟動,到了2014年3月,主體建築施工完成。

如今,三宜樓是一家河豚料理專門店(插入第24號解說文連結)「三宜樓茶寮KAITO」,一樓還有一間介紹三宜樓歷史的展覽室。


開館時間:10:00~17:00

閉館日:週一(如遇節假日順延)

門票:免費

三宜楼


三宜楼建于1931年,是门司最受欢迎的历史建筑之一。这座三层高的大型木构建筑矗立在门司港站上方的山坡上,俯瞰着关门海峡,与山下熙熙攘攘的海港相映成趣。据说在昭和时代(1926-1989)早期,三宜楼就已跻身门司港最顶级餐厅的前三位。它不仅是用餐之地,还是一处社交沙龙,吸引了艺术家、艺人、社会名流以及来自全国巨头企业和金融机构的高管前来。


建筑风格

三宜楼总面积超过1200平方米,拥有20多个房间,是九州现存规模最大的日式料亭之一。位于二楼的宴会厅面积达116平方米,在吊灯的照耀下光彩熠熠。宴会厅正面还设有一个29平方米大的舞台。

三宜楼最大的亮点是精美绝伦、做工精细的格子窗和与之相配的“栏间”(障子门与房顶之间的装饰性木雕),每一处设计都寓意着大自然的美景。例如“富士火灯窗”意为富士山之窗,以钟形的轮廓勾画出日本的象征;“天国之梯”的楼梯两侧是造型各异的格子窗,分别名为“松”“山”“月”“云”。

1931年4月5日,当地《门司新报》的记者称赞三宜楼的建筑风格新旧融合,优雅而大胆,并写道:“此处风景甚美。这家日式料亭外观之华丽,在北九州无人望其项背。”


三宅アサ白手起家的女企业家

三宜楼要归功于一个人:三宅アサ(Miyake Asa, 1854-1937)——一位勤劳、进取且略显神秘的前艺伎。年轻时,三宅アサ曾是京都祇园(祇,音同“奇”)的一名艺伎学徒。在那里,她对传统文化和表演艺术产生了浓厚的兴趣。但由于当时环境限制了她的身心发展,三宅アサ摆脱了学徒生涯,转而走上经营餐厅之路。她长途跋涉560公里来到门司,并于1906年创办了三宜楼。

三宅アサ在最佳时机来到了最佳地点。当时门司港发展迅猛,无数商贸企业纷纷成立,新晋富商们正需要高档餐饮和娱乐场所,三宜楼恰好满足了他们的需求。于是,三宅アサ的事业刚起步就获得了巨大的成功。在离开京都不到25年的时间里,她将三宜楼打造成了当地支柱企业。三宅アサ享年83岁,她的创业精神和艺术遗产一直延续至今。


富人和名流的乐园

三宅アサ去世时膝下无子,但继任者伊势子(1899-1986)和为次郎(1895-1988)继承了三宅家族姓氏。在他们的悉心管理下,三宜楼继续蓬勃发展。夫妇俩热心支持并参与艺术表演,为豪华宴会表演能剧、舞蹈和传统音乐“长呗”,这也吸引了各地文人雅士,有些甚至为了三宜楼而专程来到门司。

在那段辉煌的日子里,三宜楼就是门司繁荣的化身。然而好景不长,第二次世界大战(1939-1945)后餐厅逐渐衰落,并于1955年停业,三宜楼成了三宅アサ孙子(伊势子和为次郎之子)的私宅。2004年他去世后,家人无力再对建筑进行维护,三宜楼面临着被拆除的命运。此时,门司居民纷纷伸出了援手。当地志愿者成立了“三宜楼保护协会”,在一年内征集到16,000个签名和1900万日元,他们购下三宜楼后将其捐赠给了北九州市。2012年三宜楼的维修保护工程终于启动,2014年3月主体建筑施工完成。

如今,三宜楼是一家河豚料理专门店(插入第24号解说文链接),名为“三宜楼茶寮KAITO”,一楼还有一间介绍三宜楼历史的展览室。


开馆时间:10:00~17:00

闭馆日:周一(如遇节假日顺延)

门票:免费

산키로


 1931년에 세워진 산키로는 한때 모지 항구 요정 중 톱 3에 꼽힌 고급 요정입니다. 언덕 중턱에 있는 목조 3층 구조의 큰 건물에서는 간몬 해협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식사만 하는 곳이 아니라 예술가와 연예인, 사교계 명사, 일본 내 유수의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임원 등이 모이는 사교 살롱이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목조 건축

 산키로는 연면적이 총 1,200m2 이상이고, 방의 개수는 20개 이상으로 현존하는 요정 건물로는 규슈에서 손꼽히는 규모입니다. 2층에 있는 116m2의 연회장에는 샹들리에가 빛나고, 정면에는 29m2의 무대가 있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름답게 세공된 창문과 교창인데, 모두 자연의 풍경을 표현한 디자인입니다. 윤곽이 후지산을 닮은 ‘후지 화두창’도 그중 하나입니다. 또한, ‘덴쿠에노카이단(천공의 계단)’이라고 하는 계단 양쪽에는 마쓰(소나무), 야마(산), 쓰키(달), 구모(구름)라는 이름이 붙은 창이 있습니다.


 1931년 4월 5일, 현지 신문 ‘모지 신보’의 기자는 신구가 융합된 우아하고 대담한 건물을 극찬하며, ‘전망이 훌륭하다. 기타큐슈에서는 비할 데 없는 훌륭한 외관을 가진 요정’이라고 썼습니다.


산키로를 당대에 일궈낸 여성 사업가: 미야케 아사

 산키로는 미야케 아사(1854~1937)라는 여성이 당대에 일궈냈습니다. 근면하고 진취적인 기질이 풍부했던 아사는 젊은 시절, 교토의 기온에서 예기의 견습생 생활을 하며, 전통문화와 전통 예능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제약받는 것을 부당하다고 느껴 아사는 견습생 생활에서 도망쳐 음식점을 경영하겠다는 야망을 이루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모지까지 560km를 여행했고, 1906년에는 ‘산키로’를 창업했습니다.


 아사가 산키로를 연 것은 마침 모지의 항구가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산키로는 새로이 부유층이 된 상인들에게 세련된 식사와 접대를 제공했습니다. 아사의 신생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토를 떠난 지 25년도 지나지 않아 아사는 산키로를 지역의 명물로 키워냈습니다. 1937년에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기업가 정신과 예술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부유층과 유명 인사들의 놀이터

 아사에게는 자식이 없었지만, 후계자인 이세코(1899~1986)와 다메지로(1895~1988)의 아래에서 산키로는 번영을 이어갔습니다. 호화로운 연회석과 함께 노가쿠(무로마치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본을 대표하는 무대 예술), 무용, 나가우타(에도 시대에 가부키의 음악으로서 성립, 발전한 샤미센 음악) 등의 무대 예술을 공연하여 유명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산키로만을 위해 모지를 찾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산키로는 화려한 시대를 지나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에는 쇠퇴해 갔으며 1955년에 폐업하여 아사 손자의 사저가 되었습니다. 2004년 아사의 손자가 죽은 후에 건물은 철거되는 듯했으나 모지 주민들이 지원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1년 이내에 1만 6,000명분의 서명과 1,900만 엔을 모아 건물을 사들여 모지시에 기증했습니다. 현재, 산키로 건물은 간몬 지역의 명물인 복요리 전문점 ‘산키로 사료 KAITO’로 영업하고 있습니다. 1층에 있는 전시실에서는 산키로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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