標題 仁清雉雞:釉上彩珍寶

  • 石川
類別:
地區的特產品
媒體用途種類:
看板
字數:
251-500
編寫年度:
2022
地區協議會名稱:
Ishikawa Crafts and Cultural Heritage Digital Contents Promotion Council

Ninsei’s Pheasants: Treasures of Overglaze Enamel


The two pheasant-shaped incense burners in the center of the room are masterworks crafted by seventeenth-century ceramicist Nonomura Ninsei. Modeled after the green pheasant, they portray a mated pair: a brightly colored male and a muted female. They are exceptional even among Ninsei’s many celebrated works.

Ninsei was active in Kyoto in the mid- to late seventeenth century. After training at kilns in Kyoto and Seto (in what is now southern Gifu Prefecture), he set up his own kiln near Ninnaji Temple in the foothills of western Kyoto. The techniques he developed there, particularly his use of overglaze enamels, were instrumental in the evolution of the city’s distinctive Kyō ware.

Kyō ware was deeply intertwined with both life at court and tea culture. Many of the earliest surviving examples—including these incense burners—are utensils used in chanoyu, or tea ceremony. Incense is burned in the tea room to heighten the sense of purity and tranquility for the occasion.

Ninsei became one of the first among famed artisans to apply a personal potter’s mark, a signature-like stamp identifying the creator. This practice signified a shift in thinking that elevated potters from anonymous laborers to known, individual artists.

Ninsei was also influential in the development of Kutani ware in Kaga domain (now Ishikawa and Toyama Prefectures). The ruling Maeda family and their retainers deeply admired his style and acquired many of his works, including the male pheasant displayed here.


Plumage and Pigment: The Colorful Male


Ninsei was best known as a master of the potter’s wheel, but this piece shows he was also skilled in handbuilding, painting, and glazing.

For example, the pheasant’s tail: this long, perfectly horizontal extension from the main body is extremely difficult to produce, as clay tends to droop under its own weight or crack during firing. To counteract this, Ninsei placed supports beneath the tail as it went into the kiln, leaving two small marks on the underside.

Viewed from the front, the bird’s head is very slightly cocked, giving it an alert, animated expression. To produce this pose, Ninsei had to account for the way clay shrinks and warps when fired. The ability to anticipate such changes is the mark of a master, and the close fit of the top and bottom halves of the burner are further evidence of Ninsei’s skill. Note the continuity of the feather patterns across the split, which help to disguise the small gap.

The male’s realistically rendered plumage is a fine example of iro-e, an overglaze enamel technique in which the artist paints colored glazes over the surface of a previously glazed and fired piece. The item is then fired again at a lower temperature to fuse the two layers of glaze. Because the paints change color and become fluid during firing, the potter must clearly envisage the desired effect and have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the materials’ behavior at various temperatures. Given that the iro-e technique had only recently been introduced from China in Ninsei’s time, his recreation of the kaleidoscopic plumage of a male pheasant is remarkable.

The Male Pheasant Incense Burner was designated a National Treasure in 1951 under slightly unusual circumstances. Sometime in the late seventeenth or early eighteenth century, the Maeda family gifted it to one of their retainers, whose descendants eventually sold it to the Yamakawa merchant family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The Yamakawas so highly treasured the piece that only a select few were allowed to see it. In fact, when the government wished to designate the work a National Treasure, the Yamakawas refused to bring it to Tokyo for the official exhibition and designation ceremony. As a result, the designation was granted without a public display.

仁清の雉:色絵釉薬の至宝


 展示室の中央に飾られた1対の雉香炉は、17世紀の陶芸家、野々村仁清による傑作です。雉をかたどったこの作品は、鮮やかな色彩のオスと淡い色合いをしたメスのつがいを表現しており、数ある仁清の名作の中でも傑出した作品といえるでしょう。

 仁清は17世紀中頃から後半にかけて京都で活躍した陶芸家で、本名は清右衛門と言います。京都や瀬戸(現在の岐阜県南部)の窯元で修業をした後、京都御室にある仁和寺の門前に自分の窯を構え、仁和寺の「仁」と清右兵衛の「清」をとって「仁清」と名のりました。そこで培った上絵付け(釉薬をかけて焼成した陶磁器の表面に、絵柄を施すこと)の技術が、京焼の発展に大きく貢献することになります。

 当時の京焼は、宮廷のくらしや茶文化に深く組み込まれていました。仁清の雉香炉をはじめ、現存する最古の京焼の多くは茶の湯に用いる道具でした。香炉は茶室で香を焚いて空間を清め、静謐感を高めるために用いられました。

 仁清は名陶工の中でもいち早く、作品に作者を特定できる印となる「陶印」を施し始めた一人でした。この慣習は、もはや陶工たちが無名の労働者ではなく、名のある一人の芸術家であるという意識転換を象徴しています。

 また仁清は、加賀藩(現在の石川県と富山県)の九谷焼の発展にも大きな影響を与えました。藩主前田家や家臣たちは、仁清の作風を珍重し、この色絵雉香炉をはじめとする多くの作品を入手しています。


羽毛の色彩:色鮮やかな雄雉


 仁清は轆轤(ろくろ)の名手として知られていますが、この作品からは彼が手捻り、絵付け(陶磁器に絵や模様を描く)、釉薬の技術にも長けていたことがわかります。

 その一例が雉の長く水平な尾です。この形状では粘土が重みで垂れ下がったり、焼成の過程で割れたりする可能性があります。これを防ぐために仁清が焼成中に尾を水平に保つ支えを用いていたことを示す痕跡が、尾の裏側に2か所残っています。

 正面から見た時のごくわずかな首の傾きが、雉に緊張感と躍動感を与えています。このフォームを作るため、仁清は焼成過程で起こる粘土の収縮やゆがみを考慮する必要がありました。こうした粘土の変化を予測できるのは匠の技といえます。香炉の上部(蓋)と下部(腹部)がぴったり合致している点も、仁清の腕前を物語るものです。さらに、上部と下部が合わさる部分にも連続して羽根の模様を描き、この部分のわずかな隙間が目立たないよう工夫されている点も注目すべきポイントです。

 色絵の好例が、このリアルに表現されたオスの羽毛です。色絵とは、釉薬をかけて焼いた陶磁器に色釉で下絵を描き、再び低温で焼成して二層の釉薬を定着させる技法です。焼成の過程で絵の具が溶けたり、色が変化したりするため、目的通りの作品に仕上げるためには、素材の特性と温度との関係を熟知し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仁清の時代は、中国から色絵の技法が日本に伝来してまだ間もなかったことを考えると、雉の羽根に万華鏡のような色合いを再現した仁清の技術は目を見張るものだといえるでしょう。

 この色絵雉香炉が国宝に指定されたのは1951年ですが、そこには少し変わった経緯がありました。17世紀の終わりから18世紀初めごろ、雉香炉を所有していた前田家は家臣にこの作品を下賜します。その子孫は19世紀末に商家である山川家に雉香炉を売却。山川家ではこれを非常に大切にし、実際に雉香炉を見られたのはほんの限られた人だけでした。後に日本政府は雉香炉の国宝指定を決定しますが、山川家は指定に伴う一般公開と式典のために雉香炉を東京に運ぶことを拒否。その結果、雉香炉は一般公開されないまま国宝に指定されました。

  仁清雉鸡:釉上彩之珍宝


  房间中央陈列的两件雉鸡香炉是17世纪陶艺家野野村仁清的杰作。这两件香炉以绿雉为灵感,展现了一对雉鸡的形象:一只色彩鲜艳的雄雉,以及一只素雅的雌雉。即使在仁清的众多著名作品中,这两件香炉也堪称出类拔萃。

  仁清于17世纪中后期活跃于京都。在京都和濑户(今岐阜县南部)的瓷窑学习后,他在京都西部山麓的仁和寺附近建立了自己的瓷窑。仁清在这座瓷窑开发的技法,尤其是釉上彩的应用,对京都独有的陶瓷“京烧”的发展起到了重要作用。

  京烧与宫廷生活以及茶文化紧密相连。包括这两件香炉在内,许多现存最早的京烧作品均为“茶之汤”,即茶道使用的器具。在茶室中焚香可以为茶会营造出纯净、宁静的氛围。

  仁清是最早使用“陶印”的著名陶艺家之一。陶印是一种类似于签名的标记,用于识别作者的身份。蓋上陶印的行为标志着一种思维的转变,陶艺家从佚名劳动者升级为为人所知的个体艺术家。

  仁清也影响了加贺藩(今石川县和富山县)九谷烧的发展。掌控加贺藩的前田家族及其家臣十分欣赏仁清作品的风格,因此收藏了仁清的多件作品,其中包括这件展出的雄雉。


  羽毛和色彩色彩缤纷的雄雉

  仁清以陶钧(制作陶器所用的转轮)大师最广为人知,但这件作品表明,他的手工制作、绘制和上釉技艺也十分精湛。

  例如,雉鸡的尾部以完全水平的角度从身体延伸出,这种长尾的制作难度极高,因为在烧制过程中,黏土容易因自重下垂或断裂。为了解决这个问题,仁清在将作品放入窑炉时,在其尾部下方放置了支撑物,因此作品的底部留下了两处轻微的痕迹。

  从正面看,雄雉的头微微扬起,神态警觉而生动。为了打造雄雉的这种姿态,仁清必须考虑黏土在烧制过程中收缩和变形的方式。预测黏土变形的能力体现了仁清的大师级水平,而香炉上下两部分能够紧密闭合进一步证明了其不凡的技艺。注意看开口处连续的羽毛图案,这种处理可以隐藏较小的间隙。

  雄雉栩栩如生的羽毛是釉上彩“色絵”的典型例子。所谓“色絵”,是指在已完成上釉和烧制的作品表面绘制彩色釉料,然后将作品在低温下二次烧制,以融合两层釉料。由于釉料会在烧制过程中会液体化并且变色,陶艺家必须清楚地设想作品的预期效果,并全面了解釉料在不同温度下的变化。仁清的这件作品再现了雄雉复杂斑斓的羽毛,考虑到他所处的时代釉上彩技法刚刚从中国传入,其超群绝伦的技艺可见一斑。

  1951年,这件雄雉香炉被指定为日本国宝,而当时的情况略有些特殊。在17世纪末或18世纪初,前田家族将这件香炉赠予了一位家臣,后来,这位家臣的后代于19世纪末将其卖给了世代为商的山川家族。山川家族非常珍视这件作品,仅允许少数人前来欣赏。事实上,当时日本政府希望将这件作品指定为国宝,但山川家族拒绝将这件作品带到东京参加官方展览和评定仪式。因此,这件作品在没有公开展示的情况下即被授予国宝称号。

닌세이의 꿩: 이로에 유약의 걸작


 전시실 중앙에 전시된 한 쌍의 꿩 향로는 17세기 유명한 도예가 노노무라 닌세이가 만든 걸작입니다. 꿩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선명한 색채의 수컷과 은은한 색조의 암컷 한 쌍을 표현하고 있으며, 닌세이의 수많은 명작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닌세이는 17세기 중엽부터 후반에 걸쳐 교토에서 활동한 도예가로, 본명은 세이에몬입니다. 교토와 세토(현재의 기후현 남부) 지역의 가마에서 수련을 한 후, 교토 오무로에 있는 닌나지 절 문 앞에 자신의 가마를 만들고, 닌나지 절(仁和寺)의 ‘仁’과 본명인 세이에몬(清右兵衛)의 ‘清’을 따서 ‘닌세이(仁清)’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곳에서 익힌 우와에쓰케(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 표면에 다시 채색하여 가마에 넣고 저온으로 구워 내는 것) 기술은 교야키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당시의 교야키는 궁중 생활과 다도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닌세이의 꿩 향로를 비롯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교야키의 대부분은 다도에 사용하는 도구였습니다. 향로는 다실에서 향을 피워 공간을 정화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닌세이는 뛰어난 도공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작품에 작가를 식별할 수 있는 표시인 ‘도인’을 새기기 시작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관습은 도공들이 더 이상 이름 없는 노동자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예술가로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상징합니다.

 또, 닌세이는 가가번(현재의 이시카와현과 도야마현)의 구타니야키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번주 마에다 가문과 그 가신들은 닌세이의 작품 스타일을 귀하게 여겨 이 이로에 꿩 향로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소장했습니다.


깃털의 색채: 선명한 색감의 수꿩


 닌세이는 물레작업의 명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손으로 빚는 기술과 에쓰케(도자기에 그림·무늬를 그려 다시 굽는 것), 유약 기술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한 예가 꿩의 길고 수평한 꼬리입니다. 이 형상에서는 점토가 무게로 인해 아래로 처지거나 굽는 과정에서 깨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닌세이가 도기를 굽는 과정에서 꼬리를 수평으로 유지하는데 지지대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꼬리 안쪽에 2곳 남아 있습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살짝 기울어진 목의 각도가 꿩에게 긴장감과 생동감을 더해줍니다. 이 양식을 만들기 위해 닌세이는 도기를 굽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점토의 수축과 뒤틀림을 고려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점토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장인의 역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향로의 상부(뚜껑)와 하부(몸체)가 꼭 맞아떨어지는 점도 닌세이의 뛰어난 기술을 잘 보여줍니다. 또, 상부와 하부가 맞닿는 부분에도 연속적으로 깃털 문양을 그려서 이 부분의 미세한 틈이 눈에 띄지 않도록 세심하게 처리한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로에 기법의 훌륭한 예는 사실적으로 표현된 이 수꿩의 깃털입니다. 이로에란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에 색유로 밑그림을 그리고, 다시 저온에서 재벌구이하여 두 겹의 유약을 정착시키는 기법입니다. 굽는 과정에서 안료가 녹거나 색이 변하기 때문에 의도한 대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소재의 특성과 온도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닌세이 시대에는 이로에 기법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꿩의 깃털에 만화경 같은 색조를 재현한 닌세이의 기술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이로에 꿩 향로가 국보로 지정된 것은 1951년인데, 그 과정에는 약간 독특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꿩 향로를 소유하고 있던 마에다 가문은 이 작품을 가신에게 하사했습니다. 그 후손은 19세기 말에 이 꿩 향로를 상인 가문인 야마카와 가문에 매각했습니다. 야마카와 가문에서는 이 꿩 향로를 매우 소중히 여겨 실제로 이 향로를 본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이후 일본정부는 꿩 향로를 국보로 지정하기로 결정했지만, 야마카와 가문은 지정에 따른 일반 공개와 기념식 참석을 위해 꿩 향로를 도쿄로 옮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꿩 향로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仁清雉雞:釉上彩珍寶


  房間中央陳列著兩件雉雞香爐是17世紀陶藝家野野村仁清的傑作,他以綠雉為靈感,描繪一對雉雞:一隻色彩鮮豔的雄雉,以及一隻樸實無華的雌雉。即使在仁清眾多著名作品中,這兩件雉雞香爐也是出類拔萃的逸品。

  仁清在17世紀中後期活躍於京都,他在京都和瀨戶(今岐阜縣南部)的瓷窯學習製陶技法之後,於京都西部山麓的仁和寺附近建立自己的瓷窯。仁清在自己瓷窯所開發的技法,尤其釉上彩的應用,對京都獨有陶瓷器「京燒」的發展有極重要的貢獻。

  京燒與宮廷生活、茶文化緊密相連,許多現存的早期京燒作品均為茶之湯(茶道儀式)用具,這兩件香爐也不例外。人們在茶室中焚香,營造純淨且寧靜的氛圍。

  仁清是最早使用專屬「陶印」的著名陶藝家。陶印是一種類似簽名的標記,用於識別創作者的身分。蓋上陶印的作法也呈現出思維的轉變,意即陶藝家透過在作品留名,能將自己從無名的勞動者,提升至有辨識度的藝術家個體。

  仁清也影響了加賀藩(今石川縣和富山縣)九谷燒的發展。掌控加賀藩的前田家及其家臣十分欣賞仁清的作品風格,因此收藏了多件他的作品,展出的這件雄雉香爐也是其收藏品之一。


  羽毛和色彩:色彩繽紛的雄雉

  仁清以陶輪(製陶時使用的轉輪)大師最廣為人知為,但從這件作品可看出他的手工技藝、繪製與上釉技巧也十分精湛。

  例如雉雞的尾巴,這條長長的尾巴以完全水平的角度從主體延伸,導致製作難度極高,因為黏土容易在燒製期間因重量而下垂或斷裂。為了解決這個問題,仁清將作品擺進窯中燒製時,在尾巴下方放置了支撐物,也讓作品的底部留下兩處小痕跡。

  從正面看,雄雉的頭微微揚起,神態警覺而生動。為了精準呈現雄雉的姿態,仁清必須考慮黏土在燒製過程中收縮和變形的程度。仁清大師級的技藝體現在預測黏土變形的能力,完美接合香爐的上下兩部分,也進一步證明他不凡的功力。注意其開口處連續的羽毛圖案,這種處理可隱藏微小的縫隙。

  雄雉栩栩如生的羽毛展現出高超的釉上彩技法,這種技法在日語中稱為「色繪」,是指在已完成上釉、燒製的作品表面塗上彩色釉料。接著作品必須經過第二次低溫燒製,才能融合兩層釉料。由於在燒製過程中,釉料會熔為液體,顏色也會改變。陶藝家因此必須明確構想出想要的效果,並全面地了解釉料在不同溫度的變化。仁清的這件作品重現了雄雉斑爛多樣的羽毛,思及他所處的時代釉上彩技法才剛從中國傳入,其超群絕倫的技藝可見一斑。

  這件雄雉香爐於西元1951年獲指定為日本國寶,但當時的情況稍微有些特殊。在17世紀末或18世紀初左右,前田家將這件香爐賞賜給一位家臣,而後這位家臣的後代於19世紀末時,將其賣給從商的山川家。山川家非常珍視這件作品,只允許少數人欣賞。事實上,在日本政府要將這件作品指定為國寶時,山川家拒絕帶這件作品到東京參加官方展示和指定儀式。因此這件作品在沒有公開展示的情況下,便被指定為國寶了。

重新搜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