タイトル 座間味村 座間味島:鰹漁業創始功労記念碑

  • 沖縄県
ジャンル:
集落・街
媒体利用区分:
Webページ
ワード数:
251-500
作成年度:
2020年
地域協議会名:
環境省沖縄奄美自然環境事務所

Bonito Fishing Memorial


A little history is helpful in understanding the reason for this monument to the bonito fishing industry on Zamami Island.


Men from the Keramas were the first in the Okinawa region to start fishing for bonito. Matsuda Wasaburo (1853–1923), a Zamami native who also served as village headman, pioneered the business in 1895 by getting bonito fishermen from Kagoshima and Miyazaki prefectures in southern Kyushu to train the local fishermen. He acquired a fishing boat and went into business for himself in 1901.


This worked out so well that by the 1910s, the islanders had 11 ships, 10 bonito fishermen’s associations, and 10 factories. Almost all the men on the island were involved in the fishing, while the women worked in the factories that produced blocks of dried bonito used to make katsuobushi (bonito shavings), the common basis of soup stock. The katsuobushi business led to a dramatic improvement in the fortunes of the islanders. For example, all the children on Zamami were able to attend primary and secondary schools at a time when that was still extremely rare in the rest of Okinawa.


Matsuda expanded the business until dried bonito shavings became the second-largest industry in Okinawa Prefecture after sugar. At the dawn of the Showa era (1926–1989), however, the fortunes of the business reversed suddenly due to a decline in fish stocks, typhoon damage, and collapsing prices caused by the global recession. With the encouragement of the prefectural government, the fishermen of Zamami expanded their fishing grounds to the islands of the South Sea mandate (Palau, the Northern Mariana Islands, Micronesia, and the Marshall Islands), and thereby managed to secure good catches and make a living despite the scarcity of fish. The industry was interrupted during World War II, when the boats of the fishermen were first requisitioned by the Japanese military, then destroyed by US air raids. Bonito fishing from Zamami did resume after the war with the purchase of larger fishing boats. Various problems, however, including a lack of men to crew the boats, brought the business to an end in 1976.


This memorial dates from 1922, when the bonito fishing business was still at its height. The front face reads, “Memorial to the Heroic Founders of the Bonito-Fishing Business.” On the other faces are the names of the people who contributed funds, the names of the people (including Matsuda) who built up the industry, and a history of bonito fishing on Zamami.


鰹漁業創始功勞紀念碑


了解下面這段歷史,您就能明白當地人為何替座間味島的鰹魚漁業樹立紀念碑。

  

慶良間是沖繩一帶最早開始捕撈鰹魚的地區。在座間味島土生土長的松田和三郎(西元1853–1923)曾擔任村長,他在西元1895年從九州南部的鹿兒島縣和宮崎縣招募鰹魚漁民來訓練當地漁民,開創了鰹魚捕撈事業。西元1901年,松田和三郎購入一艘漁船,開始自己做生意,

  

這項事業發展非常順利。到了1910年代,島上居民已經擁有11艘船,並成立了10個鰹魚漁民協會和10家工廠。在座間味島上,幾乎所有男性都從事捕魚作業,女性則在生產乾鰹魚塊的工廠工作。鰹魚乾是製作鰹節(柴魚片)湯頭時常用的原料。鰹節生意使島民的財富大幅增加。舉例來說,當年座間味島的所有兒童都能上小學和中學,這在沖繩其他地區還很罕見。

  

由於松田不斷擴大業務,最終鰹節產業成為沖繩縣內僅次於製糖業的第二大產業。不過到了昭和時代(西元1926–1989)初期,魚類資源開始減少,再加上颱風破壞、全球經濟衰退造成價格暴跌,導致鰹魚業的命運突然逆轉。在縣政府的鼓勵下,座間味的漁民將漁場擴大到南洋群島(帛琉群島、北馬里亞納群島、密克羅尼西亞和馬紹爾群島),在魚類資源稀少的情況下,得以保持良好的捕獲量並維持生計。在第二次世界大戰期間,島上漁民的船隻先被日本軍隊徵用,後因美軍空襲而遭摧毀,導致捕撈作業被迫中斷。隨著戰後島上居民購買更大的漁船,座間味島的鰹魚漁業得以恢復。只是因為缺乏船員等各種問題,這項事業於西元1976年宣告終結。

  

這座紀念碑建於西元1922年,當時鰹魚漁業仍處於鼎盛時期。碑身正面寫著「鰹漁業創始功勞紀念碑」,背面則刻有出資者的姓名、產業建立者的姓名(包括松田),以及座間味島的鰹魚捕撈史。

鲣渔业创始功劳纪念碑


了解下面这段历史,您就能明白当地人为什么要为座间味岛的鲣渔业树立纪念碑。

  

庆良间是冲绳最早开始捕捞鲣鱼的地区。曾担任村长的松田和三郎(1853–1923)是座间味本地人,他在1895年从九州南部的鹿儿岛县和宫崎县招募鲣鱼渔民来培训当地渔民,开创了鲣鱼捕捞业务。1901年,他买了一艘渔船,开始自己做生意。

  

这项事业发展很顺利,到1910年代,岛上居民已经拥有了11艘船、10个鲣鱼渔民协会和10家工厂。座间味岛上的几乎所有男性都从事捕鱼作业,而女性则在生产干鲣鱼块的工厂工作。这些鲣鱼干(鲣节)用于制作鲣鱼片,后者是制作汤料的常用原料。鲣节生意使岛民的财富得到了大幅增长。例如,当年座间味岛的所有儿童都能上小学和中学,这在冲绳其他地区还很罕见。

  

松田不断扩大业务,直至鲣节产业成为冲绳县仅次于制糖业的第二大产业。然而,在昭和时代(1926–1989)初期,由于鱼类资源减少、台风破坏以及全球经济衰退造成的价格暴跌,该行业的命运突然发生逆转。在县政府的鼓励下,座间味渔民将渔场扩大到南洋群岛托管地(帕劳群岛、北马里亚纳群岛、密克罗尼西亚群岛和马绍尔群岛),在鱼类资源稀缺的情况下取得了良好的捕获量并维持了生计。在第二次世界大战期间,岛上渔民的船只先是被日本军队征用,后又被美军空袭摧毁,捕捞作业被迫中断。战后,随着岛民购买更大的渔船,座间味岛的鲣鱼捕捞业得以恢复。然而,由于缺乏船员等各种问题,这项业务于1976年宣告终结。

  

这座纪念碑建于1922年,当时鲣鱼捕捞业仍处于鼎盛时期。碑身正面写着:鲣渔业创始功劳纪念碑。背面则刻有出资者的姓名、产业创建者的姓名(包括松田)以及座间味岛的鲣鱼捕捞历史。

가다랑어 어업 창시 공로 기념비


자마미지마 섬의 가다랑어 어업을 기념해 만들어진 이 비를 이해하려면 역사를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키나와 지역에서 처음으로 가다랑어 어업을 시작한 이들은 게라마 제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마미에서 태어나 촌장까지 지낸 마쓰다 와사부로(1853~1923)가 1895년에 규슈 남부의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현에서 가다랑어잡이 어부를 초청하여 지역 어부를 훈련시키고 1901년에 배를 손에 넣어 섬에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공하여 1910년대에는 가다랑어잡이 배 11척, 10조합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섬의 남자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했고 한편 여자들은 국물을 내는 가쓰오부시(가다랑어 살을 삶고 훈연하여 건조한 식품)를 제조하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가다랑어잡이는 섬 주민들의 부를 극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마미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오키나와의 다른 지역에서 이는 당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마쓰다 와사부로는 사업을 계속 확장하여 가쓰오부시는 오키나와에서 설탕에 뒤이어 두 번째로 큰 산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쇼와 시대(1926~1989) 초기에 흉어가 이어지고, 태풍 피해, 세계 공황에 따른 대폭락 등으로 인해 사업운이 갑자기 쇠퇴했습니다. 자마미의 어부들은 태평양 제도(팔라우, 북마리아나 제도, 미크로네시아, 마셜 제도)까지 어장을 확대하라는 독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어선이 징용되고 미군의 공습 때문에 어선이 모두 불타버려 자마미의 가다랑어 어업은 중단되었다가 이전보다 큰 어선으로 재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배를 조종할 인원의 부족 등 다양한 문제로 인해 사업은 1976년에 끝을 맞았습니다.


이 기념비가 만들어진 해는 1922년입니다. 가다랑어 어업은 그때도 아직 전성기였습니다. 정면에는 ‘가다랑어 어업 창시 공로 기념비’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자마미의 가다랑어 어업 역사, 우측면에는 마쓰다 와사부로를 비롯하여 가다랑어 어업을 위해 힘을 쏟은 사람들, 좌측면에는 기념비 설립 발기인(자금을 제공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鰹漁業創始功労記念碑


座間味島の鰹漁業を記念して作られたこの碑を理解するには、歴史を少し知るといいでしょう。


沖縄地域で初めて鰹漁業を始めたのは慶良間諸島の人々でした。座間味生まれで村長も務めた松田和三郎(1853–1923)が、1895年に九州南部の鹿児島県と宮崎県から鰹漁師を招き、地元の漁師を訓練し、1901年に船を手に入れて、島で本格的に事業を始めました。


これが功を奏し、1910年代には鰹船11隻、10組合の勢力にまで発展しました。島の男性のほとんどが漁業に従事し、一方女性たちは出汁となる鰹節を製造する工場で働きました。鰹業は、島民財産の劇的な向上につながりました。例えば、座間味では子供たち全員が小学校と中学校に通うことができましたが、沖縄の他地域では当時、それは極めて異例なことでした。


松田和三郎は事業拡大を続け、鰹節は沖縄で、砂糖に次いで2つ目に大きな産業になりました。しかし昭和(1926–1989)のはじまりに、不漁が続き、台風の被害、世界恐慌による大暴落などによって事業の運は突然後退します。座間味の漁師たちは、南洋諸島(パラオ、北マリアナ諸島、ミクロネシア、マーシャル諸島)まで漁場を拡大することを促されました。そして第二次世界大戦における漁船の徴用や米軍の空襲により全てを焼失したことによる中断を経て、座間味の鰹漁業は以前より大きな漁船で再開しました。しかし操船人員の不足など様々な問題のため、1976年に事業は終わりを迎えました。


この記念碑が作られたのは1922年です。鰹漁業は、その時もまだ全盛期でした。正面には「鰹漁業創始功労記念碑」とあります。裏面には、座間味の鰹業の歴史、右側面には松田和三郎を始め鰹漁業発展のために尽力した人々、左側綿には記念碑設立の発起者(資金提供者)の名前が記さ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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