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Tahōin Temple

  • Akita
Topic(s):
$SETTINGS_DB.genreMap.get($item) Shrines/Temples/Churches Public Works & Institutions (Museums, etc.)
Medium/Media of Use:
Web Page
Text Length:
≤250 Words
FY Prepared:
2020
Associated Tourism Board:
akitashirakami kankorenraku choseikyogikai

多宝院は、仏教の禅宗の最大宗派である曹洞宗の寺である。寺は1489年に茨城県に建立され、何十年にもわたり多賀谷家の菩提寺として利用されてきた。1602年、佐竹義宣(1570~1633)が久保田藩(現秋田県)の大名になったとき、彼の家臣や支持者の多くが同行した。多賀谷家は結婚と忠誠によって佐竹家と結びつき、菩提寺と共に久保田に移ってきた。 1610年、檜山城のすぐ下に多宝院が再建されたが、1771年に現在の場所に再び移された。

正門の山門は比較的シンプルなデザインで、多賀谷家の階級としては少し珍しいものである。歴史家たちによると、これは江戸時代(1603~1867)に施行された徳川幕府の「参勤交代」政策によって引き起こされた財政難を表すものだと例証している。この政策により、大名と多賀谷家の家臣は自分の藩と首都の江戸(現在の東京)に交互に住むことが命じられた。二か所の住居を維持し、江戸との間を大名行列で往来する儀式を行うことは、大名にとって絶え間ない出費であった。寺に残る記録によると、多賀谷家は、多宝院建設の資金集めのために、地元住民の協力を求めたという。

本堂は1771年に再建され、慈悲の菩薩である観音菩薩が祀られている。また、多宝院での宗教的慣習は、神道的な側面も受け継いでいる。1868年に明治新政府が全国的に2つの宗教を強制的に分離するまで、仏教崇拝と神道崇拝の融合は、神社や寺において一般的であった。今日では、多宝院のような神仏混淆の施設は比較的珍しい。

寺のその他の注目すべき特徴は、本堂の天井にある大きな円形の龍の絵と、正面通路の「鶯張りの床」である。この木の床は、侵入者が忍び足で歩いても大きな音がするように設計されている。

寺の敷地には大きなしだれ桜が立ち並び、花見と呼ばれる春の桜を鑑賞する人気の場所である。


多寶院


多寶院屬曹洞宗(日本佛教禪宗裡最大的宗派)寺廟,於1489年創建於今日的茨城縣境內,之後幾十年間一直是多賀谷家族的家廟。1602年,佐竹義宣(1570-1633)成為久保田藩(今秋田縣)領主,他的許多家臣和支持者都隨行而來。多賀谷家族與之聯姻,發誓效忠於佐竹家族,更連同家廟一同搬遷至久保田定居。1610年,多寶院於霧山的檜山城腳下重建。1771年,寺院再次搬遷至現今所在的地方。

寺院山門(正門)形制相對簡單,就多賀谷家族的地位來說,顯得有些不尋常。歷史學家認為,江戶時代(1603-1867)的德川幕府推動「參勤交代」政策導致了地方財政困難,而這座山門就是佐證之一。所謂參勤交代,就是要求地方領主——包括多賀谷這樣的家臣在其藩屬地與首都江戶(今東京)兩地輪流居住。維持兩地居所以及往來江戶間的出行儀仗成為了常規財政支出,領主們不得不持續消耗財庫儲蓄。寺院也有記載顯示,當年為修建多寶院,多賀谷家族曾向當地民眾募集資金。

寺院本堂(正殿)於1771年重建,裡面供奉著大慈大悲觀世音菩薩。此外,多寶院的宗教活動裡至今可見許多神道教的痕跡。在1868年明治新政府下令拆分神道教與佛教之前,被稱為「神佛習合」的宗教融合在日本全國各地的神社和佛寺中都很常見。只是到了今天,像多寶院這樣的混合式宗教建築已經相對不多了。

寺院的其他特色還包括:本堂天井上繪製的一條巨大的盤龍;正門通道上的「夜鶯地板」,這些木地板踩上去會發出很大的聲響,可以防止外人悄無聲息地潛入。此外,相傳本堂後方的庭院是參照京都銀閣寺修建的。

寺院內生長著高大垂枝櫻,每到春天,多寶院便成為了賞櫻的熱門去處。

多宝院


多宝院属曹洞宗(日本佛教禅宗里最大的宗派)寺院,于1489年创建于如今的茨城县境内,之后几十年间一直是多贺谷家族的家庙。1602年,佐竹义宣(1570-1633)成为久保田藩(今秋田县)领主,他的许多家臣和支持者都随行至此。多贺谷家族与之联姻,发誓效忠于佐竹家族,更连同家庙一同搬迁至久保田定居。1610年,多宝院于雾山的桧山城脚下重建。1771年,寺院再次搬迁至如今所在的地方。

寺院山门(正门)形制相对简单,就多贺谷家族的地位来说,显得有些不寻常。历史学家认为,江户时代(1603-1867)的德川幕府实施“参勤交代”政策导致了地方财政困难,而这座山门就是佐证之一。所谓参勤交代,就是要求地方领主——包括多贺谷这样的家臣在其藩属地与首都江户(今东京)两地轮流居住。维持两地居所以及往来江户间的出行仪仗成为了常规财政支出,领主们不得不持续消耗财库储蓄。寺院也有记载显示,当年为修建多宝院,多贺谷家族曾向当地民众募集资金。

寺院本堂(正殿)于1771年重建,里面供奉着大慈大悲观世音菩萨。此外,多宝院的宗教活动里至今可见许多神道教的痕迹。在1868年明治新政府下令拆分神道教与佛教之前,被称为“神佛习合”的宗教融合在日本全国各地的神社和佛寺中都很常见。只是到了今天,像多宝院这样的混合宗教设施已经相对不多了。

寺院还有一些其他值得留意的特色,比如,本堂天井(天花板)上绘制着一条巨大的盘龙;正门通道上铺设着“夜莺地板”,这些木地板踩上去会发出很大的声响,可以防止外人悄无声息地潜入。此外,相传本堂后方的庭院是参照京都银阁寺修建的。

寺院内生长着高大垂枝樱,每年春天,多宝院都是人们观赏樱花的热门去处。

다호인 – 수양벚나무


다호인은 선종의 최대 종파인 조동종의 사원입니다. 1489년에 현재의 이바라키현에 건립되었으며, 수십 년 동안 다가야 가문의 보리사로 이용되었습니다. 1602년 사타케 요시노부(1570~1633년)가 구보타번(현 아키타현)의 다이묘(넓은 영지와 가신단을 갖춘 무사를 말함)가 됐을 때 그의 많은 가신과 지지자들이 동행했습니다. 다가야 가문은 혼인과 충성으로 사타케 가문과 묶여 있었고, 보리사와 함께 구보타로 이주해 왔습니다. 1610년 다호인은 히야마성 바로 아래에 재건되었다가 1771년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습니다.

정문(산문)은 비교적 단순한 디자인으로 다가야 가문의 격식으로서는 다소 이례적입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는 에도시대(1603~1867년)에 시행된 도쿠가와 막부의 ’참근교대’ 정책으로 야기된 재정난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근교대에 의해 다이묘와 다가야 가문의 가신은 자신의 번과 에도의 도읍(현재의 도쿄)에서 번갈아 살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두 곳의 주거지를 유지하고 다이묘 행렬로 에도를 오가는 의식을 치르기 위한 비용은 지속해서 재정을 압박하는 문제였습니다. 사원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다가야 가문은 다호인 건설 자금을 모으기 위해 지역 주민들에게 협력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본당은 1771년에 재건되었으며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또한, 다호인의 종교적인 관습은 신도의 측면도 계승하고 있습니다. 1868년 메이지 신정부가 전국적인 신불분리령을 시행하기 전까지 불교 숭배와 신도 숭배의 융합은 신사와 절에서 일반적이었습니다. 오늘날 다호인 같은 신불혼효 시설은 비교적 드문 존재입니다.

그 밖에 주목할 만한 특징은 본당 천장에 있는 커다란 원형 용 그림과 정면 통로의 ‘우구이스바리 마루(나이팅게일 마루)’ 입니다. 이 마루는 침입자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걸으면 큰 소리가 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사원 부지에는 커다란 수양벚나무가 늘어서 있어 봄에는 벚꽃을 감상하는 꽃놀이 인기 명소가 됩니다.

Tahōin Temple


Tahōin is a temple of the Sōtō school of Buddhism, the largest school in the Zen sect. The temple was founded in 1489 in what is now Ibaraki Prefecture, and for many decades it served as the family temple of the Tagaya clan. In 1602, when Satake Yoshinobu (1570–1633) became daimyo of Kubota domain (now Akita Prefecture), many of his retainers and supporters accompanied him. The Tagaya clan was tied by marriage and fealty to the Satake family, and they relocated to Kubota—bringing the family temple with them. In 1610, Tahōin was re-established at a site just below Hiyama Castle on Mt. Kiriyama, but was moved again in 1771 to its current location.


The main gate (sanmon) is of relatively simple design, which is somewhat unusual for the Tagaya family’s rank. Historians cite this as evidence of the financial hardships caused by the “alternate attendance” policy (sankin kōtai) enforced by the Tokugawa shogunate during the Edo period (1603–1867). The policy required daimyo—and vassals like the Tagaya family—to alternate between living in their own domains and in the capital of Edo (now Tokyo). The cost of maintaining dual residences and of the ceremonial processions to and from Edo was a constant financial drain. According to temple records, the Tagaya family asked the local populace for help in raising funds for the construction of Tahōin.


The main hall (hondō) was rebuilt in 1771 and is dedicated to Kannon, the bodhisattva of compassion. Religious practices at Tahōin also retain many aspects of Shinto. This syncretic blend of Buddhist and Shinto worship was common at shrines and temples throughout the country until 1868, when the new Meiji government enacted a nationwide forced separation of the two religions. Today, mixed institutions like Tahōin are relatively rare.


Other notable features of the temple are a large, circular image of a dragon on the main hall’s ceiling and an uguisubari, or “nightingale floor,” in the front entryway. These wooden floors were designed to squeak loudly when walked upon to prevent intruders from making a silent entrance.


Large weeping cherry trees stand on the grounds, making Tahōin a popular spot for springtime cherry-blossom viewing, an activity called han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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