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Ryokan: The Friendly Monk

  • Niigata
Topic(s):
Villages/Towns
Medium/Media of Use:
Pamphlet
Text Length:
751+ Words
FY Prepared:
2020
Associated Tourism Board:
echigonagaoka kankoshinkoiinkai

人々に慕われた僧侶 良寛


 良寛(1758–1831年)は、一般の禅宗の僧侶とはかけ離れた生活を送っていました。彼の著作や手紙、彼を知る人々の証言、そして彼が生活していた場所で語り継がれる逸話から、彼は決して寺院の僧侶としての職に就かず、代わりに質素で、時には放浪する生活を好んでいたことがわかります。彼は放浪生活の中で、彼の詩、書道、そして個性的で人懐っこい性格で知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その人柄が人望を集め、彼の名声を高めることになり、それは今日まで続いています。

 良寛は、越後国(現在の新潟県)の出雲崎村で山本栄蔵として生まれました。出雲崎は佐渡島で採掘された金や銀の陸揚げ港であり、北国街道の宿場町としても栄えていました。良寛の父は名主で町の神社の神官も務め、家庭は裕福でした。良寛は長男で、跡を継ぐため名主見習いになりましたが、18歳の時出家、良寛と名のり近くの光照寺に居を構えました。

 しばらくして、国仙という禅師が光照寺を訪れ、これが良寛の人生の大きな転機となりました。良寛は国仙の教えに感銘を受け、弟子になりたいとお願いしました。国仙はこれを承諾し、二人はすぐに彼の故郷である玉島(現在の岡山県倉敷市の一部)にある円通寺に行きました。そこで良寛は、朝3時に起きて経を唱え、料理や掃除をし、托鉢に出かけるという修行をしました。良寛には「大愚」という号もあります。これは国仙が授けたもので、愚者の意味ではなく、世間体や他人の目に惑わされず、無心に我が道を究めようとする良寛への尊称です。

 良寛が寺の修行を終えた翌年に国仙が亡くなり、良寛は型にはまらない道を選びました。円通寺を出て日本全国を巡礼し、訪れた他の寺から教えを受け、貧しい人々と同じ視点に立つ手段として物乞いをしました。これは悟りを開いた後の訓練の一環でした。彼は施しを受けることを恥じず、何年もの間、周囲の人々の親切にだけ頼って生活をしていました。

 海外では、良寛は詩や書道でよく知られているかもしれませんが、彼は高名な人物からの依頼は断ることが多く、自分の書いたものを誰にも売ろうとはしませんでした。代わりに、彼は貧しい人々が求めた場合や、彼を助けた人々のためにだけ、個人的な感謝の意を込めて書きました。

 やがて良寛は故郷の越後に戻り、必要最小限のものに囲まれた生活を続けました。寺泊では、草庵や照明寺で生活していました。彼の自然への愛は、子供たちへの愛情や貧しい人々への思いやりと同様に、多くの著作物に反映されています。

 また、良寛は和島村(現在は寺泊とともに長岡市に合併)を中心に多くの交友関係を持ち、後にそこで生活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その中でも最も有名なのは、晩年の良寛の世話をしてくれた若い尼僧、貞心(1798–1872年)との友好関係でしょう。彼女と出会った時の良寛は70歳で、健康状態は衰えていました。しかし年齢や社会的地位の違いにもかかわらず、二人は深い絆で結ばれ、頻繁に和歌(日本伝統詩)を交わします。これらの優しい句には、良寛らしいユーモアがよく表れています。

 もう一人の良寛の親友で晩年の庇護者に、商人の木村元右衛門(1778–1848年)がいます。元右衛門は良寛に引っ越すよう家に招き、その滞在中に良寛は貞心と出会います。貞心によると、良寛の死に際は、まるで眠りについたかのように瞑想の姿勢をとっていたと言われています。

 和島にある「良寛の里美術館」には、良寛の手書きの詩や書の一部が展示されています。良寛が訪れた場所、彼を知る人々、彼が残した作品などがあり、彼の人生をより詳しく知ることができます。彼がよく通っていた地元のスポットの多くは、近くのはちすば通りにあります。元右衛門の家や、良寛が時々子供たちと遊んでいた神社などがあり、隆泉寺には彼のお墓があります。

 ここ長岡では良寛の著作を直接目にし、その足跡をたどることで、良寛について学び、彼がいかに愛された人物であったかを知ることができます。彼が亡くなって2世紀経った今も、多くの人々に慕われた僧侶の遺産は受け継がれています。

善心僧人良寬


良寬(1758-1831)的人生遠不同於尋常禪僧,從他留下的書籍信件,相識者的敘述以及他生活過的地方流傳的奇聞軼事,都顯示出他從未擔任過任何一家寺院的住持。相反,他似乎更喜歡簡單甚至是流浪式的生活方式。雲遊之間,他的詩、書法,乃至於他獨特而瀟灑友善的個性漸漸為人們所熟知。這些特質讓他贏得了大眾的喜愛,更為他帶來了延續至今的聲譽。

良寬出生在越後國(今新潟縣)出雲崎的一個小村莊,本名山本榮藏。出雲崎是佐渡島所產金銀礦石在本州的貨運登陸港,也是北國街道上一處繁忙的驛鎮。良寬家境富裕,父親兼任著村長與神社的神官,良寬是家中長子,早早便立下出家為僧的志向,住進了附近的光照寺。

「良寬大愚」是他受戒時得到的法名,意思是「心胸寬廣、大度且大智若愚的人」。後來,一位名叫「國仙」的禪師來到光照寺,這也成為了良寬人生中重要的轉捩點。年輕的僧人良寬受禪師教誨,銘感五內,請求拜師,而國仙答應了,師徒二人很快便一同返回了國仙的寺院——玉島(今岡山縣倉敷市部分區域)圓通寺。在那裡良寬淩晨3點起床、誦經、灑掃做飯、出外化緣,每日修行不輟。

就在良寬完成寺院修行的第二年,國仙禪師過世。從此,良寬走上了一條不尋常的修行道路。他離開圓通寺開始巡禮全國,在行經的每一所寺院學習,沿途乞求佈施以瞭解窮人的生活視角。這是他開悟之後的一項修行,他不以接受施捨為恥,在許多年裡,他完全依靠周遭人們的善心生活。

在日本以外,良寬最出名的或許是他的詩作和書法,他的書法不拘一格,採集前人名家之所長,例如,他的楷書學的是陶弘景、黃山谷,草書兼具懷素、王羲之、孫過庭、尊圓法親王等眾家之風,假名則研習了小野道風的《秋荻帖》,在各類傳統書法上都頗具造詣。儘管如此,他卻從不出售書法作品,對自己的作品也要求頗為嚴苛。但只要有窮人開口提出要求,或是需要答謝幫助過自己的人,他就會提筆創作。他對自然的熱愛、對孩子的喜愛和對窮苦大眾的同情在許多書法作品中都有所體現。

良寬最終選擇返回故鄉越後國定居寺泊地區,依然繼續著他極簡主義的生活方式。他在一間小屋安身,也住過照明寺。他還在和島村(與寺泊合併為今長岡市)度過了人生的最後階段,並結下了許多友誼。其中最著名的,或許就是他與貞心(1798-1872)的友情了。貞心是一名年輕僧尼,兩人相遇時良寬已經68歲,健康狀況每況愈下,他最後的幾年時光都是在貞心的照料下度過的。儘管存在著年齡的鴻溝和社會地位的差異,倆人依然結下了深厚的情誼。他們常常互贈俳句,溫柔的詩句裡處處閃現著良寬那廣為人知的幽默。

良寬晚年的另一位密友兼施主,是一位名叫木村元右衛門(1778-1848)的商人。元右衛門曾邀請良寬到家中居住,良寬也正是在這裡遇到了貞心。據貞心所言,良寬去世時「好像只是睡著了一樣」,還保持著冥想的姿勢。

和島的「良寬之里美術館」内藏有一些良寬手寫的詩句和書法作品,同時展示了更多他的生平細節,包括他到訪過的地方,與他相識的人以及他留下的作品等等。他在當地常常出入的地方大多集中在附近的街道「はちすば通」(Hachisuba Dori)。在那裡,可以找到位於隆泉寺裡的良寬墓,寺旁就是元右衛門宅邸,還有一處良寬當年常與孩子們遊戲的神社。

兩個世紀過去了,這位善良親切的僧人遺跡猶在。今天的人們依然能夠一窺良寬的人生,欣賞他親筆書寫的作品,跟隨他的腳步來到長岡,瞭解他究竟是一位多麼受人愛戴的人物。

善心僧人良宽


良宽(1758-1831)的人生与寻常禅僧很不同。从他留下的书籍信件,相识者的叙述以及他生活过的地方所流传的轶事看来,他从未担任过任何寺院的住持,相反,他似乎更喜欢简单甚至是行脚僧式的生活方式。云游之间,良宽的诗与书法,乃至于他独特却潇洒友善的个性渐渐为人们熟知。这些品质令他赢得了大众的喜爱,更为他带来了延续至今的巨大声誉。

良宽出生在越后国(今新潟县)出云崎的一个小村庄,本名山本荣藏。出云崎是佐渡岛所产金银矿石在本州的货运登陆港,也是北国街道上一处繁忙的驿镇。良宽家境富裕,父亲兼任村长与神社的神官。良宽是家中长子,早早便立下出家为僧的志向,住进了附近的光照寺。

“良宽大愚”是他受戒时得到的法名,意思是“心胸宽广、大度且大智若愚的人”。后来,一位名叫“国仙”的禅师来到光照寺,这也成为了良宽人生中重要的转折点。年轻的僧人良宽受禅师教诲,铭感五内,于是请求拜师。国仙答应后,师徒两人很快便一同返回了国仙的寺院,位于玉岛(今冈山县仓敷市部分区域)的圆通寺。在那里,良宽凌晨3点起床,诵经、洒扫、做饭、出外化缘,每日修行不辍。

就在良宽完成寺院修行的第二年,国仙禅师过世。从此,良宽走上了一条不同寻常的修行道路。他离开圆通寺,开始巡礼全国,在行经的每一所寺院学习,沿途乞求布施以了解穷人的生活视角,这是他开悟之后的一项修行。他不以接受施舍为耻,在许多年里,他完全依靠周遭众人的善心生活。

在日本以外,良宽最出名的或许是他的诗作和书法。他的书法不拘一格,集采前人名家之所长。例如,他的楷书学的是陶弘景、黄山谷,草书兼具怀素、王羲之、孙过庭、尊圆法亲王等众家之风,假名则研习了小野道风的《秋荻贴》,在各类传统书法上都颇具造诣。尽管如此,良宽对自己的作品要求十分严苛,也从不出售书法作品,但只要有穷人开口提出要求,或是需要答谢帮助过自己的人,他就会提笔创作。良宽对自然的热爱、对孩子的喜爱和对穷苦大众的同情在许多书法作品中都有所体现。

良宽最终选择返回故乡越后国,定居寺泊地区,依然继续着他极简主义的生活方式。他在一间小屋安身,也曾入住照明寺。他在和岛村(与寺泊合并为今长冈市)度过了人生的最后阶段,也结下了许多友谊。其中最著名的,或许就是他与贞心(1798-1872)的友情。贞心是一名年轻僧尼,良宽遇到她时已经68岁,健康状况每况愈下,他最后的几年时光都是在贞心的照料下度过的。尽管存在着年龄的鸿沟和社会地位的差异,俩人依然结下了深厚的情谊。他们常常互赠俳句,温柔的诗句里处处闪现着良宽那广为人知的幽默。

良宽晚年的另一位密友兼施主,是一位名叫木村元右卫门(1778-1848)的商人。元右卫门曾邀请良宽到家中居住,良宽也正是在这里遇到了贞心。据贞心所言,良宽去世时还保持着冥想的姿势,“好像只是睡着了一样”。

和岛的“良宽之里美术馆”里藏有部分良宽手写的诗句和书法作品,同时提供了更多他的生平细节,包括他到访过的地方,与他相识的人以及他留下的作品等等。他在本地常常出入的地方大多集中在附近的街道“はちすば通”(Hachisuba Dori)一带。在那里,可以找到位于隆泉寺里的良宽墓,寺旁就是元右卫门宅邸,还有一处良宽当年常与孩子们玩耍的神社。

两个世纪过去了,这位善良友好的僧人遗迹犹在。今天的人们依然能够一窥良宽的人生,欣赏他亲笔书写的作品,跟随他的脚步来到长冈,了解他究竟是一位多么受人爱戴的人物。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승려, 료칸


 료칸(1758–1831년)은 일반 선종의 승려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습니다. 료칸의 저서나 편지, 료칸을 아는 사람들의 증언, 그리고 그가 생활하던 곳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화들을 통해, 그는 사원 승려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고, 대신 검소하며 때때로 방랑하는 생활을 즐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료칸은 방랑 생활 중에 그의 시, 서예, 그리고 개성적이고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러한 인품이 인망을 모아 료칸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료칸은 에치고국(현재 니가타현)의 이즈모자키마치에서 야마모토 에이조로 태어났습니다. 이즈모자키는 사도 섬에서 채굴한 금이나 은의 양륙항이었으며, 홋코쿠 가도의 여행자에게 숙소를 제공하던 역참 마을로 번성했습니다. 료칸의 아버지는 마을의 장이었고 마을 내 신사의 신관이기도 해서 가정은 유복했습니다. 료칸은 장남으로 뒤를 잇기 위해 마을의 장이 되기 위한 견습생이 되었지만, 18세에 출가하여 료칸이라 이름 짓고 근처 고쇼지 절에서 거주했습니다.

 얼마 후 고쿠센이라는 선사가 고쇼지 절을 방문했고, 이는 료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료칸은 고쿠센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제자로 삼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고쿠센은 이를 승낙했고, 두 사람은 바로 그의 고향인 다마시마(현재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의 일부)에 있는 엔쓰지 절로 갔습니다. 거기서 료칸은 아침 3시에 일어나서 경을 외고, 요리나 청소를 한 후 탁발을 하러 나가는 수행을 했습니다. 료칸에게는 ‘다이구(大愚)’라는 호도 있습니다. 이는 고쿠센이 하사한 호로, 어리석은 자라는 뜻이 아닌 사회적 체면이나 다른 사람의 시선에 현혹되지 않고 무심히 자신의 길을 통달하고자 하는 료칸을 향한 존칭입니다.

 료칸이 절의 수행을 끝낸 이듬해에 고쿠센은 세상을 떠났으며, 료칸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엔쓰지 절을 나와 일본 전역을 순례하고 방문한 다른 절에서 가르침을 받아 빈곤한 사람들과 같은 입장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동냥을 했습니다. 이는 득도한 후 훈련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는 동냥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몇 년간 주위 사람들의 친절에만 기대어 생활했습니다.

 해외에서는 료칸이 시나 서예로 유명할 수도 있지만, 그는 유명한 인물의 의뢰는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신이 쓴 글을 누구에게도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료칸은 가난한 사람들이 요청하는 경우나 그를 도와준 사람들을 위해서만 개인적으로 감사의 뜻을 담아 썼습니다.

 이윽고 료칸은 고향인 에치고로 돌아갔고, 최소한의 물건으로 둘러싸인 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데라도마리에서는 초가집이나 쇼묘지 절에서 생활했습니다. 그의 자연을 향한 사랑은 아이들을 향한 애정과 빈곤한 사람들을 향한 배려와 마찬가지로 많은 저작물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료칸은 와시마무라(현재는 데라도마리와 함께 나가오카시로 합병됨)를 중심으로 많은 교우 관계를 맺었고, 이후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노년에 료칸을 보살펴준 젊은 여승, 덴신(1798–1872년)과의 교우 관계일 것입니다. 덴신과 만났을 때의 료칸은 70세였으며, 건강은 쇠약해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연령과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 빈번하게 하이쿠를 주고받았습니다. 이러한 부드러운 분위기의 와카(일본 전통 정형시)에는 료칸다운 유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다른 료칸의 벗으로는 말년의 후원자인 상인 기무라 모토에몬(1778–1848년)이 있습니다. 모토에몬은 료칸에게 이사하도록 집으로 초대하였고, 그곳에서 체류하던 중 료칸은 덴신과 만납니다. 덴신의 말에 따르면 료칸이 세상을 떠날 때 마치 잠든 것처럼 명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와시마에 있는 ‘료칸노사토 미술관’에는 료칸이 손으로 쓴 시와 서적 일부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료칸이 방문한 장소, 그를 아는 사람들, 그가 남긴 작품 등이 있어 료칸의 인생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료칸이 자주 다니던 현지 장소의 대부분은 인근 하치스바 거리에 있습니다. 모토에몬의 집이나 료칸이 때때로 아이들과 놀던 신사 등이 있으며, 류센지 절에는 그의 묘가 있습니다.

 이곳 나가오카에서는 료칸의 저작물을 직접 보고 그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료칸에 대해 배울 수 있고, 또 료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료칸이 세상을 떠난 지 2세기가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승려의 유산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Ryokan: The Friendly Monk


Ryokan (1758–1831) lived a life far removed from the typical Zen Buddhist monk. His books and letters, the accounts of those who knew him, and anecdotes that have been passed down in the places where he lived indicate that he never took on a position as a temple priest, preferring instead to adopt a simple, and at times nomadic, lifestyle. In his wanderings, he became known for his poetry, his calligraphy, and his offbeat but personable nature. These qualities endeared him to others and contributed to his outsized reputation, which still lives on today.

Ryokan was born Yamamoto Eizo in the village of Izumozaki, in Echigo Province (present-day Niigata Prefecture). Izumozaki was a landing port for gold and silver mined on Sado Island. It was also a busy post town on the Hokkoku Highway. Ryokan’s father was a village leader and priest, and the family was wealthy. Ryokan was the eldest son, but at an early age he decided that he wanted to be a monk and took up residence at Koshoji, a nearby temple.

It was when he was ordained that he received the name “Ryokan Taigu,” which can be translated as, “One who is broad of heart, generous, and foolish.” Sometime later, a Zen master named Kokusen came to visit Koshoji. This proved to be a major turning point in Ryokan’s life. The young monk was impressed with Kokusen’s teachings and asked to become his disciple. Kokusen agreed, and the two soon returned together to his home temple, the Entsuji monastery in Tamashima (part of the present-day city of Kurashiki in Okayama Prefecture). There, Ryokan’s training involved waking up at 3 a.m., chanting sutras, cooking and cleaning, and going out to solicit alms.

When Kokusen died the year after Ryokan completed his temple training, Ryokan chose an unconventional path. He left Entsuji and embarked on a pilgrimage around Japan, learning from other temples as he went, and begging as a way of gaining the perspective of the poor. This was part of his post-enlightenment training. He saw no shame in accepting charity, and for many years he lived entirely off the kindness of those around him.

Outside of Japan, Ryokan is probably best known for his poetry and calligraphy, but he was selective about his compositions and would not sell his writing services to anyone. Instead, he would only write for the poor, if they requested it, or for those who had helped him, as a personal expression of gratitude.

Eventually, Ryokan returned to his native Echigo, where he continued his minimalist lifestyle. In the Teradomari area, he lived in a hut and at Shomyoji Temple. His love for nature is reflected in many of his writings, as is his fondness for children and his compassion for the needy.

Ryokan also formed many friendships around the village of Washima (now incorporated, with Teradomari, into the city of Nagaoka), where he came to reside later in life. Perhaps the most famous of these was his friendship with Teishin (1798–1872), a young nun, who helped care for Ryokan in his final years. He was 68 years old and in declining health when they met. Despite the gap in their age and their different social standing, the two formed a deep bond. They frequently exchanged haiku, and these tender poems demonstrate Ryokan’s renowned humor.

Another of Ryokan’s close friends and patrons toward the end of his life was the merchant Kimura Motoemon (1778–1848). Motoemon invited Ryokan to move into his house, and it was while staying there that he met Teishin. According to Teishin, Ryokan was seated in a meditation position when he died, “as if he had just fallen asleep.”

The Ryokan no Sato Art Museum in Washima contains some of Ryokan’s handwritten poetry and calligraphy. It offers visitors more details about his life: the places he visited, the people who knew him, and the works he left behind. Many of the local spots he frequented are located on a nearby street, Hachisuba Dori. You can find his grave there, at Ryusenji Temple, along with Motoemon’s house and a shrine where Ryokan sometimes played with children.

People today have the opportunity to learn about Ryokan and appreciate what a beloved figure he was by seeing his writings firsthand and following in his footsteps in Nagaoka. Two centuries after his passing, the friendly monk’s legacy end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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